“네, 어디서 오셨어요?”
“MU125요.”
“멀리서 오셨네요. 지구엔 왜 오셨어요?”
재현은 못을 박아도 뚫리지 않을 피부를 가진 이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마침 탈피가 진행되려는지 두꺼운 비늘 가죽들이 군데군데 벗겨지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비늘을 주워 모으며 당황해하는 이에게 재현은 “괜찮아요, 다들 그래요. 냅두시면 다 치워드려요.” 무감히 위로를 건네었다. 위로보단 축하가 어울렸겠지만, 재현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더할 나위가 없네요. [신체적응력 : 문제없음] 서류를 작성하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그는 지구인이었고, 외계종족 이주 센터 – E1 본부에서 이주 도움 업무를 보는 것이 그의 현 직책이었다. (E1은 지구의 인공행성이며 그것의 대기와 기온은 지구와 꼭닮았다.) 지구로 이주하고 싶은 외계인이라면 누구라도 이곳에서 마지막 심사를 마쳐야했다. 재현의 바로 앞, MU125출신의 외계인도 지구에 입성하기 위한 마지막 절차를 밟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제 앞의 심사관의 질문에 뜸을 들였다. 심사관의 어깨너머를 넋놓고 응시하더니 미세히 초점을 옮겨 다시 심사관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은 감상과 결이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심사관의 등 뒤로 펼쳐진 광활한 유리 벽면이 끝도 없이 펼쳐진 우주를 담아내기 때문이었다. 그 중앙엔 여정의 목적지인 지구가 있고, 심사관은 (문지기마냥) 또다시 그 중앙에 앉아있다. 웅장하다. 이 자리에 앉은 이들은 모두 거치게 되는 관문같은 구조에, 공통되는 감상이었다.
“MU125는 너무 춥고 초록색이 없어서요.”
“그쵸. 무지하게 춥고 온통 파란색인 게 예쁘죠.”
심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주 상투적 말씨를 가진, 매너리즘에 절여진 심사관이었지만 MU125의 파란색 청년은 고개를 꾸벅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구식 인사도 벌써 몸에 익은 듯 보였다. 일어나기가 무섭게 또다시 가죽이 후두둑 떨어졌다.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하는 이주민에, 재현은 지구 토박이의 가벼운 친절을 베풀었다. 제가 치울게요. 적응력이 좋으세요.
"지구에서 뵙겠습니다."
"이 정도면 지구에 쉽게 적응할 수 있겠죠?"
"네, 무리없으세요."
"정말이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정말입니다. 걱정마세요.."
원체 다정하길 타고난 재현이지만 이젠 정말 입에 경련이 일 것 같았다.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을 하자니 좀이 쑤셨다. 그렇지만 건넨 말은 진심이었다. 저 정도의 적응력이면 아주 양호한 편이었다. 제 집에 묶인 누군가를 떠올리면 말이다. 이재현의 커다란 실수. 날아드는 소행성을 게임하듯 폭파시키고 지구령 경계에서 알짱거리는 이들 가장 처음으로 맞아주던 이재현이 이주민 뒤치다꺼리나 하며 서류 업무 보게 만든 아주 아주 커다란 실수.
재현은 푹 나오려던 한숨을 어색한 미소로 감추었다. 그 누구도 탓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연의 뿌리를 보기 위해 거슬러 가보자면 .. 그때 주연을 주워오면 안됐다.
곧바로 지구로 어디로
우여곡절이 길다.
사건 발생 전, 지구 영우주 경계에서 이주 센터를 바라보며 정찰돌고 있을 때였다. 우주 쓰레기 처리 시스템이 허술했는지 센터 반경 1km내에 덩어리들이 둥둥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저거 그대로 뒀다가는 충돌할 수도 있겠는데.. 격추해서 가루낼까 싶었지만 너무 위험했다. 쯧. 혀를 차며 쓰레기처리반에 연락을 넣었지만 그쪽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신경끌까라며 머리도 벅벅 긁었는데 또 못본척은 못하는 성격이라 덩치 큰 우주선을 몰고가서 둔하게 밀어내야했다. 최대한 멀~리.
덩어리들을 치우며 천천히 우주를 유영했다. 틈틈히 달을 잘 돌아가고 있는지, 경로에서 어긋나거나 속도 변화가 이상한 유성체들이 있는지 확인도 했다. 마지막 덩어리를 치우고 센터 주변을 한바퀴 사악 돌아볼 생각이었는데, 아무리봐도 지구인 같아보이는 게 하나 있었다. 껌껌한 우주 속에 혼자 누워서는. 무슨 작업 중인가? 그러나 움직임이 없어보였다. 저거저거 곧 슈트 터질 거 같은데.. 쟤 처리반인가? 근거리 무전 버튼을 눌러 통신을 시도했다.
- E-FP13 이재현입니다. 도움 필요하세요?
무전 버튼 바로 위 통신 스피커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흘러나오질 않았다. 곧바로 다시 한번 통신을 시도했다.
- 지구 FP 입니다. 도움 필요하시면 도와드리겠습니다.
- …
-세 번 불응 시 메뉴얼대로 해야 하거든요?
-…
좆됐다. 저거 아무리봐도 지구인이었는데 응답이 없었다. 첫번째 통신 시도에서부터 불과 15초 정도 지난 시점이었지만 생사의 갈림길에서 시간의 플러스는 생명의 마이너스와 직결된다. 재현은 곧장 슈트를 유영모드로 변경하고 우주선의 문을 열었다. 목의 옆쪽에 위치한 센서에서 빨간 불이 반짝였다. 5분이면 충분하겠지. 출동합니다. 보고를 마치고는 곧장 몸을 던졌다. 우주로.
호흡 정상 맥박 정상. 신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걸 깨달은 재현이 그제서야 숨을 돌리고 남자를 살폈다. 작은 얼굴을 구성하는 선 중 하나라도 어긋난 게 없었다. 아직 어린 거 같은데…. 꺼진 곳 없이 모두 각이 졌는데 희한하게도 어려보였다. 우주 한바닥에서 쓸쓸히 얼어갔으면 억울했을 얼굴이라 생각하며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선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기능을 잃었을 슈트를 살피는데, 처리반의 것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유니폼인데. 민간인? 얼마 전 관광우주선 하나에 빵꾸 뚫렸댔는데 설마 거기서? 와씨 큰일 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작은 머리통의 남자가 눈을 떴다. 전혀 놀라지 않은듯 남자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는 단번에 재현을 향해 초점을 잡았다.
깜빡 깜빡
우주를 빼다 박은 눈동자라고 재현은 생각했다.
"괜찮아요?"
"……"
“…E-FP 소속 이재현입니다. 당장 가까운 의료센터로 갈게요.”
재현이 곧장 일어서 조종석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남자는 벌떡 일어나 입고 있던 슈트를 마구 더듬어댔다. 재현이 애써 선체모드로 바꾸어놓은 것을 유영모드로 바꿔버리곤 재현을 멀뚱히 바라봤다. 뭐야? 남자에게서 눈을 떼면 안되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눈을 남자에게 고정하자 남자 또한 재현만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래 그러고 있어. 남자의 초점은 오로지 재현의 눈에 있었다. 재현은 조종석 통신보드에 뻗어놓은 손만을 움직여 센터에 신호를 보냈다.
"의료센터로 갈 거예요. 진입 허가 나면 빠른 속도로 움직일 겁니다."
"……"
"슈트. 내 우주선이 좀 좋아서 지금 버티고 있는 건데 유영모드 안 풀면 몸에 무리 올 거거든요?"
"……"
“…좀 바꿉시다. 도와주려고 그러는 거예요.”
재현이 남자 쪽으로 한발짝을 내딛자 남자가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왠지 모를 긴장감이 선체 내에 감돌았다. 큰일났네. 머리를 다쳤나 왜 대답을 안 해. 생각은 곧 출동 전 지체한 15초로 이어진다. 재현의 죄책감과 책임감이 두터워진다. 의료센터에서 진입 허가가 나면 우주선은 급하게 속도를 낼 것이었고, 남자가 준비하지 못하고 넘어진다면 더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그 전에 남자를 앉히든가 어쩌든가 해야했고 슈트의 모드를 바꿔줘야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계기판의 스피커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재현이 손을 한번 더 길게 뻗어 버튼을 누르고 신호를 보냈다. 꾹. …. 한번 더. …. 또 한번 더. 무응답이었다.
“오늘 운수 왜이러냐.”
혼잣말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그 말에 남자는 움직였다. 선체의 문 쪽으로. 열리지도 않는 문 앞에서 멍하니 서있다가 재현을 힐끗 보더니 문을 이리저리 더듬었다. 나가려고 그러는 거구나. 안 열리거등요. 재현은 판단을 바꾸어 일방향 무전을 보냈다.
- 좌표 고정. 의료선 보내주세요.
남자는 다시 한번 재현을 쳐다보더니 문을 콩콩(쿵쿵) 두드렸다. 와 어뜩하냐. 재현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남자는 인상을 쓰고 재현을 바라봤다. 그리곤 이번엔 주먹을 들어 문을 쾅 쳤다. 순간 선체 내가 소등되었다. 둘 중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재현은 어둠 속에서도 그를 놓지 않고 바라봤다. 내내 잠잠하던 스피커에서는 이상한 기계음이 파드득 튀더니 이내 그런 적도 없었다는 듯 고요해졌다. 잠시간의 정적 후, 전등이 천천히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남자의 얼굴을 가리었던 어둠이 하나씩 걷어졌다. 마지막 그늘이 사라졌을 때, 그는 재현을 보고 있었다. 서늘하게도 생겼네.
"나가고 싶어요?"
남자는 여전히 경계태세였다.
“잠깐 괜찮은지 검사만 쫌 하게요.”
재현은 천천히 다시 남자에게 다가섰다. 일단 재현의 우주선에 발을 들였으니 괜찮은지 확인은 하고 보내야 한다. 책임을 피해갈 수는 없다.
"그런 다음에 보내줄게요, 가고 싶으면."
“……”
여전히 서늘한 눈으로 재현을 보던 남자는 재현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더니 문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나 누구랑 얘기하니."
이 이상의 답답함은 쌓을 생각 없는 재현이 남자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문 탐구에 몰두해있던 남자는 재현이 조금 가까워지자 문에서 떨어져 거리를 늘릴 수 밖에 없었다. 불행하게도 선체의 입구 쪽 구조는 통로형이었다. 도망가고자 해도 도망갈 구석이 없었다. 재현이 승리의 미소를 슬쩍 지을 때였다. 남자의 슈트 오른쪽 옆구리 센서에서 빨간 불이 들어왔다. 슈트에 과부하가 왔다. 유영모드의 수명이 다해가는 모양이었다. 환경이 맞지 않은 상태에서 모드를 지속하면 수명은 배로 빨리 닳았다. 계속 뒀다간 남자가 견디지 못할 것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재현은 남자의 옆구리로 불쑥 손을 뻗었다. 남자는 놀란 고양이처럼 순식간에 손을 피하더니 재현이 흐트러진 틈을 타서 통로를 빠져나갔다. 재현은 불쑥 치솟는 화를 참지 못하고 빠득 이를 갈았다. 교근이 두드러졌다. 다시 침착하자, 속으로 다짐하며 뒤를 돌아 남자를 봤다. 그러나 방어 태세로 재현을 노려보는 남자에 그 다짐은 1초도 못가 으스러지고 말았다. 재현의 성질머리와 함께.
“야!! 너 죽는다고!”
소리를 높이니 남자는 또 파드득 놀란다. 뭘 놀래긴 놀래 짜식이. 답답해진 재현이 바디랭귀지를 섞어가며 너. 옆구리. 쿡쿡. 꺼. 끄자. 제발. 해봤지만 남자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상이 있을 수도 있는 사람한테 무력을 행사할 순 없었다. 그리고 맞붙는다 하더라도 우주선 한구석이 분명 날아갈 것이었다. 하... 재현이 한숨을 내쉬고 다시 움직였다.
몇번의 시도에도 남자는 재현의 손에 잡히질 않았다. 접전이 이어졌다. 어느새 재현은 조종석을 뒤에 두고 서있었다. 계기판을 힐끗 보자 통신이 완전히 끊긴 상태였다. 개망했다. 재현이 잠깐 한눈을 판 사이를 타고 남자는 다시 한번 문을 쳤다. 남자의 센서는 이제 점멸하는 중이었다. 카운트다운.
에이씨. 재현이 입고 있는 슈트의 유영모드 수명도 얼마남지 않았는데. 우주선에서 시체가 나올거면 둘이든 하나든 뭐가 별반 다르겠는가. 방법은 하나였다. 체념한 재현이 제 슈트를 유영모드로 변경했다.
동시에 선체에 큰 진동이 인다.
묶여있던 중력이 사라지고 선체 내 모든 것이 떠오른다.
상황을 예상했던 재현이 조종석을 딛고 먼저 남자에게 다가섰다. 당황한 남자가 공중에서 허우적대다 기둥을 붙잡고는 발로 찼다. 재현에게서 다시 한번 더 멀어졌다. 재현도 똑같이 그의 루트를 따라갔다. 두둥실. 속도가 원하는대로 나질 않자 재현은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다행히도 남자의 센서는 점멸을 멈췄다. 그러나 또 언제 점멸이 시작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남자는 재현보다도 유영에 익숙해 보였다. 재현이 다가가면 멀어지고 다가가면 멀어졌다. 혼자 멈춰서서 재현이 떠올 때까지 지켜보는 꼴이 여간 열받는 것이 아니었다. 근데 내가 지금 싸우자는 게 아니잖아. 남자는 지칠 줄을 모르고 다시 문 쪽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무중력 상태인 지금, 문을 두드려봤자 남자는 반대편으로 튕겨져 나갈 뿐이었다. 부딪힌 반대편으로 간이 스위치가 있었는데 그걸 잘못 건들였는지 우주선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축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럽게, 점점 더 빨라지며 들어찬다. 그와 함께 선체 내 모든 조명이 깜빡깜빡 켜졌다 꺼지길 반복한다. 모든 것이 정신없게 산만하다. 재현의 짓인 줄 알았는지 고개를 돌려 노려보는데, 보였다 안보이길 반복하는 표정에서 원망을 읽어낼 수 있었다. ... 어려보이기만 한 게 아니었구나. 곤란함에 재현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놨다. 동시에 점멸하는 빛 속 붉은 색을 발견한다. 남자의 옆구리에서 발한 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은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뾰족한 수 또한 없었다. 재현은 남자의 눈을 보고 크게 말했다.
“괜찮아.”
빈틈 없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대로 다시 한번 공중을 딛고 남자에게 다가섰다. 손을 뻗었다. 통로에 몰린 남자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최대한 몸을 뒤로 뺐다. 재현은 가장 가까운 곳에 닿기로 한다. 뻗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남자의 손을 잡았다. 다른 한손은 항복한다는 듯 들어 보였다. 악의가 없음을 표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또박또박.
"지구에 가자."
"……"
“지구.”
마주한 눈을 피하지 않았다. 맞잡은 남자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너도 나 잡은 거다. 재현이 남자를 잡은 손의 팔을 끌어당겼다. 곧장 둘의 거리가 줄어들었고, 동시에 남은 손으로는 간이 스위치로 우주선 축 변경을 멈추었다. 시끄럽게 돌아가던 기계음이 멈추었다. 점멸하던 선체의 빛 또한. 둘의 공간이 죽은듯 조용해진다. 소음에 멍멍했던 귀가 고요한 공간에 적응을 하자 숨 뱉는 소리가 점차 들려온다.
남은 건 하나였다.
남자의 슈트에서 점멸하는 빨간 빛에 손을 얹었다가 떼었다. 이거 지금 꺼야 해. 눈으로 말했다.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센서의 손을 얹어 빛을 가리었다. 남자의 얼굴에 이젠 적개심이 없었다. 멀뚱한 표정. 탐색하는 표정.
가만히 있던 남자가 손을 움직여 재현의 목에 가져다댔다. 까맣게 잊고 있던 붉은 점멸이 사라진다. 재현이 찾지 못한 마지막 하나였다.
재현은 안도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더이상 사위를 어지럽히는 점멸은 없다.
남자는 생각보다 온순했다. 재현이 지구를 가리켜보이자 그것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눈을 꿈뻑꿈뻑,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통신이 다 끊긴 터라 이주 센터에 들리지 않고 바로 지구로 가야했다. 지구를 향해 달리는 동안 남자는 뚫어져라 지구만 쳐다봤다. 아무래도 민간인이 맞는 것 같았다. 이렇게 신기해하는 사람이 처리반일 리가 없었다. 아님 뭐 외계인이든가….
그리고 그는 외계인이 맞았다. 데리고 들어간 순간부터 난리가 났다. 통신이 끊겨 이재현이 죽을 줄로만 알았던 지구인들이 우주선이 착지하기도 전부터 생중계를 해댔다. 인류의 생활범위가 타행성까지 넓혀진 이후로는 통신이 끊기는 일은 거의 없었을 뿐더러, 끊긴 우주선이 다시 지구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현장은 각종 무전과 방송으로 가득했다. 소란스럽기에 짝이 없었다. 민간인은 이런 환경에 익숙하지 않았는지 열린 문 앞에 서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멀리 바라만 볼 뿐, 움직이질 않았다. 재현이 다시 한번 손을 뻗어야했다. 재현의 손을 잡은 남자는 지구에 발을 디뎠다. 그 장면이 지구 전역으로 생중계 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 지구인인 줄만 알았다고…. 말도 통하지 않는데, 아주 멍청했다.
“자연사 하게 뒀어야지.”
그는 지구 출입 불가 종족이었다. 그가 속한 종족은 지구와 자유 이주 협약을 맺은 다른 행성들에서도 환영 받지 못했다. 교류 일절 금지 행성이었다. 그들은 소리내어 대화하지 않았다. 그들만의 소리로 대화한다고, 지구인이 알아낸 바로는 그랬다. 지구인의 표현을 쓰자면 마음으로 대화하는 것이었는데 어떠한 방법과 체계로 대화하는지는 일절 알 수가 없었다. 지구인들에게 주어진 힌트는 '접촉' 밖에 없었다. 'NGC 2264의 종족과 접촉하지 마세요. 모든 걸 들킬 수도 있습니다.' 교육생 시절, 교육관은 말했었다. '어떻게 보면 아주 투명하고 가장 진실된 종족이죠. 거짓말을 할 수 없으니까요.' 그 말에 재현은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그런데…
"아주 음침한 종족이라고. 말은 한마디도 안하면서 우리네 생각은 다 읽고 있을 줄 누가 알아."
“기밀이 다 빠져나가게 생겼어.”
이런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추었다. 우주선 내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그 남자(외계인)가 제 생각을 읽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나쁜 애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러고보니 손을 잡으니 온순해졌었지. 재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닥치기로 했다. 상관들은 요주의 외계인을 죽이거나 실험하여 종족의 체계를 밝혀내고 싶어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우주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었고, 이미 그 외계인이 지구인과 손을 잡고 지구에 도착한 것을 외계인권 운동가들이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날마다 센터 앞에 서서 시위를 했고, 매스컴에는 매일같이 그들의 여행기와 사진 등등이 올라왔다. 개중에는 외계인의 외계인권과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면 당장 NGC 2264로 날아가 실험체가 되겠다며 우주선 연료를 채우는 사람도 있었다. 지구는 이미 여러 종족으로 가득 찬 행성이었다. 그런 곳에서 외계인 하나를 감춰버린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관심은 사그라들지를 않았다. 이미 요주의 외계인에 마음대로 '주인공'이란 이름을 붙인 후 였다.
덕분에 재현도 중징계를 면했다. 대신 쫓겨났다. 이주 가능 종족에 대해 아주 자세히 공부하고 오라며 이주 센터로 매일 출퇴근을 해야했다. 모든 것이 재현의 잘못이기에 입 닫고 응해야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주인공'은 NGC 2264로 돌아가지 못했다. 지구 뿐만 아니라 지구에 거주하는 여러 종족의 기밀을 엿듣고 발설할 것이라 판단한 지구 종족 위원회의 결정이었다. 재현이 봤을 땐 의사소통도 전혀 안되는 것 같았는데 너무한 처사였다. 할 말은 해야겠어서 슬쩍 입을 놀렸더니 니가 케어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다음 날 '주인공'은 재현의 집으로 이송되었다.
"앞으로 발생하는 모든 일은 E-FR 913의 책임임을 명심하길."
“네 알겠습니다.”
상관이 자리에서 떠나자 재현은 한껏 힘이 들어갔던 목을 돌려 풀었다. 아무런 가이드 라인이 없었다. 그저 접촉을 금한다는 말뿐. 게다가 재현은 우주로 출퇴근을 해야했다. 아주 사고를 치라고 판을 벌려주시네. 그들은 사고가 발생하기만을 기다렸다가 기회가 되면 어떻게든 책잡아 '주인공'을 없앨 생각이었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재현의 목도 날라갈 것이었다.
골이 아팠다. 외계인은 멀뚱히 서서 집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현의 시선을 느낀 외계인은 눈알만 굴려 재현을 쳐다봤다. 눈빛이 미묘하게 사나워져있었다.
“미안.”
그렇게 내뱉자 외계인은 다시 눈동자를 도르륵 굴려 다른 곳을 탐색했다. 한순간 지구의 불청객이 되어버린 외계인. 지구를 멸망의 위기로 몰게 된 이재현. 이 지구에 서 있는 둘은 운명공동체와 마찬가지였다. 둘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예상할 수 없었다.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재현은 하던대로 목소리에 진심을 가득 담았다.
"잘 지내보자."
잘 지낼 수 없었다. 당연한 것이었다. 둘은 소통이 안됐다. 접촉하면 안됐기에 더욱 그랬다. 밥 먹는 것, 씻는 것, 잠자는 것은 기초적인 것이라 곧잘 하는듯 보였지만 다른 부가적인 것에 있어 불편함이 컸다. 무엇을 해야하고, 하면 안되는지 알게 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중 하나는… 외계인은 현관문을 자주 노려봤다. 아무래도 우주선 문을 한번 부수려고 한 전적이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허름한 빌라의 현관문 정도야 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건 절대 안되는 것 중 한가지이다.
"주연. 안돼 그거.“
주인공은 좀 입에 안붙고 야야 거리기에는 뭐해서 재현은 주연을 주연이라 불렀다. 거기는 진 짜 안돼. 이미 문짝에다가 빨간 테이프를 좍좍 붙여서 엑스자를 만들어놓은 후였다. 출근이 불가피한 재현은 온 집을 봉쇄해야만 했다. 넓지도 않은 집에 가둬놓는 것이 미안해서 티비도 플스도 VR도 모두 전원을 켜두고 집을 나섰다. 주연은 재현의 집에서 이탈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도 평생 애를 집에 가둬놓을 순 없는 일이었다. 방법을 찾아야했다.
그렇게 된 지가 한 이주 되었나? 이제 주연은 재현이 자신을 '주연'이라 부르는 것을 아는 듯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주연. 나 왔다.' 말하니 재현 쪽을 힐끔 쳐다봤다. 포탈을 타고 지구에 도착하는 것은 매일 하는 것이었지만 매번 피곤했다. 제 우주선을 그리워하며 구두를 벗어 던졌다. 고개를 드니, 주연은 여전히 재현을 응시하고 있다. 현관으로 다가온다. 왜. 뭐.
사나운 표정의 주연이 손을 내민다. 재현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스윽 비켜지나갔다. 접촉은 절대 금지였기 때문에. 소통 문제만 빼면 접촉 불가더라도 불편한 점은 없었다. 주연이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를 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근데 요즘엔 자꾸만….
“안돼.”
주연이 다시 재현을 앞질러 앞에 서서는 손을 내민다. 한걸음 성큼 내딛으니 재현은 뒤로 한발짝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단호한 목소리로 한번 주의를 주고는(못알아들을 것이 뻔하였지만) 다시 비어있는 틈 사이로 주연을 피해갔다. 퇴근하고 나면 꼭 지나야하는 관문이었다. 처음 며칠은 재현을 없는 사람 취급하더니 주연은 자꾸만 재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재현은 아는 것이 너무 많았다!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지만 생각하지 말라면 필시 생각하게 되는 법. 재현이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둘의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주연과 닿는 것은 금기였다.
교류 대상 행성이 아니기에 공용 즉석 번역기도 먹히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답답할 주연을 위해 유아 한글 학습지를 가져와서는 앉아봐. 이거능... 해봤지만 주연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재현을 무시하고는 거실 한구석 놓인 축음기에 손을 댔다. 재현이 틀어놓고 간 티비, 플스, VR 등등은 손도 대지 않더니 케케묵은 턴테이블에는 좀 관심이 가는 모양이다. 저녁을 다 먹자마자 쇼파에 앉아 턴테이블 위에 올려진 LP에 손가락을 얹어고는 빙빙 원을 그린다. 손가락 속도가 느렸다가 빨랐다가, 표정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한다. 주연의 연령이 의심되었다. ..알고 보면 완전 어린애인 건가? 그런 건가? 싶어 어느날은 기차 놀이 세트, 우주선 주차 놀이 세트 양손에 무겁게 들고 퇴근했더니 그건 또 쳐다도 안봤다. 애는 아닌가보네. 또 LP 위에 원만 빙글빙글 그렸다. 주연의 행성엔 없는 물건인가 보다.
재현의 집에선 그저 인테리어용인 골동품일 뿐이었다. 그래 그거 니꺼해라. 헛웃음이 픽 나왔다. LP 몇장 선물 받은 것이 생각나서 방에 들어가 몽땅 집어왔다. 주연에겐 다 똑같은 판일테지만… 캐릭터 얼굴이 그려진 LP판이면 좀 새롭지 않을까해서였다. 주연이 만지고 있는 LP에 손을 가까이하자 주연은 동작을 멈추고 재현을 올려다봤다. 표정이 … 평소보다 쫌 덜 사납고 손이 슬그머니 움직이는 게. 오해한 모양이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괜히 미안하게 됐다. 재현은 손을 피해 얼른 턴테이블 위 LP판을 들어냈다. 그러자 주연이 흠칫 놀라더니 LP를 꽉 붙잡고 놔주질 않는다.
"야 이거 바꿀라고 하는 건데,"
"……“
눈을 치뜨고 노려보길래 바로 주지 않고 한 번 더 힘을 줘 제 쪽으로 당겨봤다. 지지 않고 손에 힘을 실는 게 느껴졌다. 어쭈. 우주선에서 절대 잡히지 않으려고 경계태세로 날을 세우던 주연이 떠오른다. 그땐 인상이 사납기만 했는데 위에서 봐서 그런가, 쫌 귀여운 인상인 듯했다. 재현이 입꼬리를 씰룩거리자, 주연은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LP가 뚝, 두동강이 났다.
"……"
"……"
"이건 있잖냐…"
"……"
"내가 직접 산 단 하나의 LP판이었어…."
아는지 모르는지. 입이 벌어져서는 반만 뜬 눈을 꿈뻑꿈뻑, 반쪼가리 LP를 들여다보기만 했다. 눈빛에서 공허함이 느껴졌다. 충격 받기는 했나보다. 야 괜찮아…. 재현은 떫은 표정으로 가져온 커버 뭉탱이에서 새 LP를 꺼냈다. 주연이 충격에 빠져있는 틈을 타, 플래터 위에 새 LP를 얹고 톤암을 올렸다. 이렇게 하는 게 맞았었나.. 플래터 돌아가는 소음만이 웅웅 공간을 채운다. 재현과 어느새 시선을 빼앗긴 주연도 멍청히 그걸 바라보고 있었다. 홀로 흐르는 백색소음이 길었다. 쩝, 하고 고장났나... 하는 순간. 주연이 LP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서서히 볼륨이 높아지더니 노래가 흘러나왔다. 첫 음이 따스하고 단조로웠다. 거실에 채워지는 분위기가 생각보다 근사해서, 뒷목이 쭈뼛거리고 낯설다는 느낌이 들기까지 했다. 미동이 없어보이는 주연을 바라보니 그 또한 스스로 빙글빙글 도는 LP에 시선이 꽂혀있었다.
"원래 이렇게 쓰는 거야."
"……"
"자."
LP 뭉탱이를 주연에게 내밀었다. 주연은 그것을 천천히 받아들었다. 의욕 잃은 눈은 사라지고 귀가 쫑긋해진 게, 재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LP를 받아든 투박한 손이 꼼질거렸다. 잠시 가만히 있더니 미심쩍은 눈으로 재현을 올려다보고는 슬쩍 손을 내밀었다.
안됨.
재현은 또다시 엑스표를 만들어 보일 수 밖에 없었다. 고개는 까딱까딱 음악에 맞추어 흔들리는 중이었다. 그 날 주연은 손장난을 그만두고 재현이 건네 준 LP를 번갈아서 계속해서 틀었다. 손으로 빙빙 문질러보는 것은 두동강 난 LP 한 장뿐이었다.
"자기 바로 집에 들어갈 거야?"
"네, 피곤해죽겠네요."
"뭐 사서 간다고 하지 않았어?"
"배달 시켰죠."
"요즘 배달 조심해야해, HRU 출신 잡상인들이 그렇게 돌아다니더라."
"저희 집은 안 오겠죠."
아…. 본부장이 실수했단 표정으로 재현을 쳐다봤다. 재현은 다 안다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기야 그러게 걔를 왜 살렸니…. 그럼 안살리나요…. 안 살렸으면 나랑 안만났을 거 아니야…. 전 본부장님 만나서 행복합니다…. 퇴근길 포탈 속 두 직장인은 너무나도 피곤했다. 기운이 다 빠진 채로도 알랑방귀를 뀌자 재현에겐 휴가라는 포상이 내려져왔다. 자기 너무 딱하다…, 필요할 때 올리면 승인 내줄게. 고마워서 눈물이 고일 뻔했다.
택배를 가득 안고 현관문을 여니 여전한 턴테이블의 음악 소리가 재현을 반긴다. 오늘도 현관에서부터 주연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주연은 어쩌면 신사적이었다. 손을 내밀기만 할 뿐 먼저 접촉해오지는 않았다. 기특해서 머리라도 쓸어주고 싶었지만(오바해서) 그럴 수 없으니 택배 상자를 북북 열어재꼈다. 며칠째 똑같은 플레이리스트 들으려니 질리는 감이 있어 다른 LP를 몇장 더 사봤다. 제 손으로 LP를 사는 것은 이번이 두번째였다.
자, 니꺼. 옆에서 대기 타고 있는 주연의 손에 LP판을 스윽 내밀었다. 그리곤 주연이 가져가기 전에 다시 제 쪽으로 훽 가져왔다. 주연의 눈동자에 삐딱한 의아함이 가득이다. 큭큭 웃으며 다시 한번 더 슬쩍 줬다가 잽싸게 당겼다. 이게 지구식 장난이라는고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재현이 다시 한번 LP들을 내밀었다. 이번엔 정말 줄 요량으로.
그러자 퍽.
주연이의 솥뚜껑만 한 손이 빠르게 LP판을 강타한다. 충격 받은 것들이 땅바닥으로 다이빙한다.
끼악!
"……"
"…야 미안하다.."
재현이 허리를 숙여 LP상태를 살폈다. 이거 깨진 거 아니야? 요즘 팔지도 않어서 비싸…. 꿍시렁 거리며 LP 하나하나 확인하더니 읏쌰하고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그냥 직접 틀어줄 심산이었다. 그러나 몇걸음도 가지 못해서, LP판은 또다시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뒤쫓아온 주연이 다시 한번 펀치를 날렸기 때문이다. 어이가 털린 재현은 얼척 없다는 얼굴로 주연을 돌아본다. 정확히 재현을 노려보는 주연의 눈빛이 아주 사납다.
"……"
"……좋다매."
"……"
"니가 LP 좋다매."
재현의 일갈에도 주연은 시종일관 모난 눈을 유지한다. 그 모습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던 재현이 팍 한숨을 쉬며 다시 걸음을 떼려고 한 순간, 주연이 재현에게 팔을 뻗는다. 급습이었다. 당황한 재현이 제 가슴 앞까지 뻗어온 손을 팔로 빠르게 쳐낸다.
"야 주연, 안,"
말을 끝내기도 전에 주연이 손을 한번 더 뻗는다. 재현은 또다시 팔로 막아낸다. 이번엔 머리 위로 손이 뻗어온다. 다른 팔을 위로 올려 막아냈다. 주연은 끊임 없이 시도했다. 어딘가가 목표인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상반신인 건 확실했다. 촵.촵.촵.촵. 뻗어오는 손을, 재현은 열심히 합기.합기.(어릴적 합기도에서 배운 호신술 중 하나) 하며 막아냈다. 외계인의 왕펀치펀치를 막아내며 재현은 하나 깨달았다. 주연이 자신의 마음을 읽기 위해서는 특정한 부위와의 접촉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렇지 않다면 지금 당장 눈 앞에 놓인 재현의 팔을 잡으면 될 것이 아닌가.
결국 재현은 주연의 두 팔을 잡아냈다. 도박이긴 했지만 몸에서 뭐가 빠져나가는 것 같진 않았다. 느낌이 좋았다. 재현의 가설이 맞았을 것이다. 주연이 팔을 놓으란듯 버둥거렸다. 힘이 장난이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각 잡고 있던 팔을 위로 모아 한 손에 쥐고는 아래로 서서히 내렸다. 제 손에 묶인 주연의 손이 눈 앞에 오자, 재현은 그 너머에 있는 주연의 사나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다음 단계를 알려주듯이.
"이 정도는 해도 되는 거지."
그러곤 남은 한 손으로 주연의 두 손을 덮듯이 감쌌다. 주연의 손이 무진장 크긴 했지만. 손목을 묶고 있던 다른 한손도 서서히 주연의 두손 아래로 위치를 옮겼다. 잠시간 그렇게 있다가 … 힘이 누그러진 순간, 손을 놨다. 쓰읍. 안돼. 그러나 또 퍽. 못마땅한 표정의 주연은 제 발치에 떨어져있던 LP들을 발로 차버리곤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서 영영 안나올 것 같더니, 집에 찾아온 잡상인들과 재현이 실랑이를 할 때에는 고개를 빠끔 내밀고 지켜보는 것이 느껴졌다. 쟤 누군지 아세요? 무서워요. 갈 수 있을 때 가세요. 재현이 쾅하고 문을 닫은 후 돌아보자 언제 그랬냐는듯 또다시 숨어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그 후로도 주연은 포기하지 않고 재현의 어딘가를 노렸다. 그럼 재현은 장단 맞추어 원투원투 해주다가 단호하게 끝맺음했다. 몇번 반복하다보면 주연도 지칠 것이라고 안되는 건 안되는 것이라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다. 삐딱함이 날로 커져가는 것이 보였는데도 말이다. 운명공동체의 운명이 그려지지도 않는 주제에 재현은 너무 큰 것을 바랐다.
휴가를 하루 앞둔 저녁이었다. 재현은 그날따라 너무 피곤해서 밥을 먹자마자 샤워를 하러 욕실에 들어갔다. 이번 휴가에는 생각이라는 것을 진득하게 해볼 요량이었다. 주연과 제가 어떻게 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주연은 지구인의 구속을 벗어나고 재현은 이주 센터를 벗어나고. 욕조에 몸을 담그고 한참을 생각해도 돌파구는 떠오르질 않았다. 스케일이 너무 컸다. 우주전쟁 그리고 지구멸망까지 생각하고 나면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머리가 띵하니 아파서 얼른 나왔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으니 주연이 소리없이 나와 욕실로 들어가려는게 보였다. 재현은 손짓으로 주연의 시선을 불러다가 제 허리에 둘러진 수건을 쿡쿡 찔렀다. 잊지 말고 따라하라는 뜻이다. 주연은 첫날 자연인의 모습을 보여주어 재현을 놀라 자빠지게 한 전적이 있었다.
달린을 찾아가야하나?
입안 가득 까끌한 탄산이 들어찼다. 달린은 예전에 재현이 소행성 파괴 임무 중 만난 인물이었다. 그녀는 행성이 파괴된 우주난민이었는데, 그녀가 머물고 있던 우주선에 달려드는 소행성을 재현이 우연히도 격추했다. 그녀 또한 지구 출입 불가 종족이었으나 주연이 속한 종족인 NGC 2264와 같은 케이스는 아니었다. 그들은 스스로 다른 종족과 교류하는 것을 거부했다. 자기들은 너무나도 대단하고 위험한 존재라면서. 우주의 시간축과 공간축을 건들 수 있다며, 그들 중 우두머리가 잠을 설치는 바람에 행성이 파괴되고 말았다며. 그런 말을 했는데 진위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었다. 달린의 말은 보통 거짓인지 진실인지 알기가 어려웠다. 달린은 재현에게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이종족과의 교류는 있어선 안될 일이라며 재현을 떠났다. 그 이후로 재현은 달린을 떠올린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달린의 이능력이 절실하다. 생각하다보니 맥주캔이 텅텅. 다 마신 모양이었다. 방 밖으로는 아직 물떨어지는 소리가 한창이었다.
띵동띵동
무거운 고민과 상반된 경쾌한 초인종 소리가 울려퍼진다. 하… 징계먹은 E-FP13의 집에 '주인공'이 산다는 것은 지구 위 모두가 아는 사실일 텐데, 잡상인들은 겁이 없는듯했다. 당장 나가서 쫓아낼까 싶었지만 피곤했기에 제 풀에 지쳐 떨어져나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기지개를 쭉 펴고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다. 맥주캔까지 찌그러트리고 나니 이상한 이질감이 들었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듯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멎은 지 꽤 되었다. 씨발.
"야 주연!!!"
우당탕탕 재현이 방에서 튀어나왔다. 욕실의 열린 문에선 훈기가 세어나오고 있었고 문 앞부터 현관으로 이어지는 바닥엔 누군가가 뚝뚝 떨친 물이 낭자했다. 고개를 돌려 현관을 보자 반라상태의 주연이 여전히 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 걸치라는 건 잘 걸쳤네. 보폭을 넓혀 빠르게 다가갔다. 주연의 앞에는 며칠전 집을 찾아왔던 잡상인이 서있었다. 저거 오지말랬는데 또 왔네. 라고 생각하는 순간. 잡상인이 주연의 손을 턱 잡더니 위아래로 크게 흔들었다.
"야야야 저기요 놓으세요. 뭐하는 거야?"
황당함에 말이 앞서나갔다. 이제 재현은 주연의 바로 뒤에 서있었다. 그리고 주연의 어깨를 잡아채려는 순간, 주연이 양팔을 벌려 잡상인을 껴안았다. 여전히 물이 흥건한 반라의 상태로. ……지금 모하는거야? 재현은 벌어진 입도 닫지 못하고 주연과 잡상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떼어냈다. 그러나 주연은 포기를 모르고 멀어진 잡상인에게 손을 뻗었다. 야!! 너 이러면 안돼!! 재현이 주연의 팔목을 잡고 막아섰다. 그리곤 잡상인에게 소리쳤다. 나가. 나가. 나가세요. 나가!!
"이분께서 우주선을 구입하시겠다고…."
"나가시라고요 당장."
잡상인도 미쳤는지 포기를 모르고 재현의 어깨너머로 주연에게 뭐라뭐라 말을 했다. 다음에 올게요! 어차피 주연은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HRU 종족 특유의 날카로운 숨이 맨 어깨에 닿자 더럽게 따끔거렸다. 재현이 인상을 팍 써가며 잡상인을 돌아보자 그제서야 주춤주춤 나가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이종족커플 집인지는 몰랐네요. 이렇게 신고도 없이 사시면 큰일나는 거 아시죠? 눈감아줄테니 다음번엔 꼭 한번 이용해주세요오 ~~ ……… 쾅.
드디어 현관문이 닫혔다.
재현의 얼굴에 늘상 서려있던 장난기는 더이상 없었다. 잡상인이 좀 모자라 보여서 다행이지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잡상인이 집에서 사라지자 주연도 몸에서 힘을 빼고 재현의 눈을 바라봤다. 이걸 어떡해야하지. 진짜 말도 안통하고. 주연은 아무일도 없었다는듯 다시 손을 재현에게 내밀었다. 골아픔에 볼을 씹던 재현이 한숨을 짧게 팍 내쉬곤 주연의 손을 잡아챘다. 이제 뭐 어쩌자고. 잡은 손을 눈앞에 흔들어보였다가 아래로 떨어트린다.
주연이 재현에게 다가섰다. 잡은 손아귀의 힘이 커지는 것이 느껴진다. 주연은 머리를 재현에게 들이밀었다. 평소와 같은 공격패턴이 아니라서 그런지 재현은 당황한다. 주연이 다가오면 다가오는대로 밀린다. 주연이 몇백번은 들었을 안된다는 소리도 뱉어봤지만 먹히질 않았다. 결국 재현은 발목을 잡힌다. 발뒷꿈치가 문턱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완전한 패배로 이어지는 지름길이었다. 주연의 턱을 타고 흐른 물방울이 똑, 재현에게로 떨어진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주연은 위협적이었다. 재현은 제가 너무 겁이 없었구나 깨닫는다. 연구자료도 충분히 없는 미스테리의 존재인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감정이라곤 없어보이는 저 눈동자의 소유자가 이제 재현의 뇌를 헤집을 것이었다.
주연은 섣불리 손을 뻗지 않는다. 천천히 재현과 가까워진다. 주연의 눈동자는 재현에게 꽂혀있다. 재현을 잡아두기를 바라는 것처럼. 재현은 그에 응해준다. 뭐 할 건데. 주연이 재현의 몸통 위로 무릎을 세워 앉았다. 눈은 가만둔 채로 남은 손을 재현의 가슴으로 뻗는다. 주연의 서늘한 살갗이 재현에게 와닿는다. 지그시 눌린다. 이 때 깨닫는 것이 있다. 주연이 노려왔던 것은 이것이라고.
우주를 빼다 박은 눈동자가 파랗게 빛난다. 맞닿은 어디로든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주연이 재현을 헤집어 놓은 것이 분명하다. 무언가가 빠져나간 자리를 불안감이 채운다. 재현이 탐탁지 않아 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주연과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놓치면 안됐다. 주연의 양 손에선 힘이 점차 빠졌다. 눈빛 또한 본래대로 돌아왔다.
재현은 주연이 자신에게서 무엇을 앗아간 건지 알 수 없었다. 주연이 입을 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안 뺏어갔어."
"…너?"
"정말이야."
소년 같은 목소리가 낯설다. 말하는 데에 익숙지 않은 것처럼 음가들이 가벼웠다. 첫시도에 성공한 남자는 천진한 웃음을 지어보인다. 오로지 재현만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남자를 쳐다본다. 분명히 무언가가 빠져나갔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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