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 연성.
일본 만화 <강철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금지된 연금술로, 재료와 능력만 받쳐 준다면 다양한 연금술이 가능한 해당 만화의 세계관 안에서도 한 번을 성공한 적이 없다는 연금술이다. 이주연과 이재희는 ‘사람을 만들어낸다’는 이 연금술에 푹 빠져 반 년을 보냈다. 재희는 만들고 싶은 사람이 둘이나 있었고, 그리고 주연은 그런 재희를 사랑했기 때문에.
인체 연성에 성공한 사례는 조사 결과 없다. 세상에 존재했던 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체의 구성 물질 외에도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가 가졌던 기억, 추억, 관계 같은 것들. 어떤 한 개인이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드는 요소들 말이다. 그런 것들 때문에 닮은 사람을 찾는 일과 같은 사람을 새로이 만드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보다도 큰 차이가 있다.
애석하게도, 애초에 사람을 다시 만들고자 하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다. 누군가는 절대 다른 누군가와 완전히 같을 수 없다는 점. 그러니까 ‘인간의 대체 불가능성’은 수많은 고통과 아픔을 만들어내는데, 특히 재희의 경우에는 그것이 깊은 그리움의 원인이 되었다. 한 번 잃어버리면 다시는 찾을 수 없다. 한 번 없어지면 다시는 같은 것을 가질 수 없다. 이 사실들은 확실히 아프다. 그런 아픔은 바다의 모래알과 물방울을 하나하나 분류해 뒤지고 우주의 모든 별들에 이름을 붙이는 정성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 한 사람—재희의 경우에는 두 사람—의 부재는 그와 관련한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구멍으로 남아 버리는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은 절대 그저 잊혀지지 않고, 크고 작은 구멍이 되어 남겨진 인간을 스펀지처럼 만들어버리며, 그 구멍들에는 끈적끈적한 슬픔이 스며들기에 아주 적절하다는 그런 자명한 사실이…….
주연을 슬프게 만들었다.
그 누구도 재희가 가진 추억과 기억의 주인공이 새로이 되어 줄 수 없었다. 재희를 아주 사랑하는 주연조차도. 그래서 주연은 재희가 부모님을 새로 만들고 싶다고 할 때 고개를 끄덕였다.
“입양되고 싶다는 거죠?”
약간 잘못 이해해서 뺨을 한 대 맞기는 했지만.
주연은 그 뒤로 몇 번 성인 입양 절차에 대해 찾아 보았으나 재희에게 말한 적은 없다. 주연은 그것들을 구태여 고백하지 않는 대신, 연금술에 심취한 재희를 성심성의껏 내조하는 것으로 큰 지지를 보내 주었다. 마치 목사님과 사모님 같은 관계랄까. 영적으로 충만한 대신 광적으로 메마른 데가 있던 둘은 서로를 그럭저럭 보필해 가며 많은 것들을 익혀나갔다.
인체 연성에 필요한 재료, 주의 사항, 연금술을 행하는 순서, 기타 등등.
위키 하우, 각종 오타쿠 카페, 허무맹랑한 해외 웹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던 둘은 마침내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 있다고 굳게 믿으며 연구를 이어나가던 한 모임에까지 당도하게 됐다. 재희에게든 주연에게든 잘 된 소식이었다. 종착지를 찾아냈다는 건 둘 모두에게 큰 안정을 가져다주었으므로. 거기다 그 모임에 주기적으로 참석하는 모두는 <강철의 연금술사> 시청 이력이 있었다. 누군가는 스물여섯 번이나 <강철의 연금술사>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재희는 그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고 했고 주연은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해 주었다.
그리하여 장장 사 개월간의 친목 끝에 얻게 된 인체 연성 준비물.
물 35L
탄소 20kg
…
…
유전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의 피
주연은 처음 리스트를 받아보았을 때, 암모니아를 어디에서 사야 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쿠팡에서 팔까? 고등학교 과학실에서나 봤던 암모니아를 대체 어디에서 구해야 할까. 그러나 재희는 핸드폰 화면을 넉넉하게 채운 준비물을 보면서도 별 말 없이 턱이나 괴고 있었다. 그러더니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나 집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어제 새로 했다던 젤 네일을 손톱 끝에서부터 잘근잘근 깨물었다.
재희는 한참 싱크대 앞에서 핸드폰을 두드리더니, 무늬목 싱크대 문짝을 발로 뻥뻥 차 대며 주연을 향해 되묻듯 중얼거렸다.
“이재현한테 연락해야겠지?”
당시 주연은 부모님을 살리는 데에 왜 이재현까지 필요한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으나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재희의 부모님은 곧 재현의 부모님이기도 하니까. 하긴, 그렇지. 부모님을 살리려면 형제자매와 상의를 거쳐야 했겠구나 짐작했을 뿐이다. 언젠간 나한테도 재희 누나가 중대사를 상의해 줄까. 누군가를 살리는 일에 대해서 나한테도 의견을 구하고 허락을 받을까. 재희 누나와 가족이 되면. 누군가가 죽고 다시 누군가가 살아나는 세계에서 우리가 어떤 테두리로 엮인다면. 주연은 부엌의 노르스름한 불빛을 수직으로 받으며 서 있는 재희를 보며 웃었다.
“요즘 서로 안부는 물어요?”
그런 이재희가 죽어버린 지금.
이주연은 이재희를 살려도 괜찮을지, 만약 살린다면 거사는 언제쯤 진행하면 좋을지, 재료 수급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상의할 만한 사람을 아직 찾지 못했다.
사실 재현을 포섭하는 게 가장 빠르고 쉬운 지름길이긴 했다. 하지만 이재희가 영영 죽어 없어진 줄로 알고, 이재희의 흔적을 싸그리 없애려 드는 이재현은 이런 중대사를 함께 논의하기에 적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주연에게는 재현 같이 뾰족한 사람을 설득할 정도의 언변이 있지도 않았을 뿐더러 재현은 재희만큼 어딘가에 몰두하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 어딘가가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런 측면에서 바라봤을 때, 주연은 재현보단 자신이 재희에 조금 더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주연은 재희가 꾸준히 하던 알바도 하고, 재희가 나가던 강철의 연금술사 오타쿠 모임 a.k.a 죽은 사람 살려내기 연구회에도 꼬박꼬박 나갔으며, 결정적으로 재희처럼 죽은 사람을, 그러니까 이제는 죽어버린 이재희를 살리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재희 누나랑 나도 그런 걸까.
그래서 사랑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은 가족이 될 수 있는 거구나.
나는 결국 해내지 못했지만서도.
짧은 감상과 함께 주연이 TV 앞에 자리 잡은 이재현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좁아 터진 오피스텔에 이 악물고 들인 TV는 소파와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덕분에 시력이 영쩜오 정도는 하락했을 거다. 이재현은 시력 하락에도 개의치 않고 무슨무슨 축구 게임을 한참 들여다 보고 있었다. 주연은 좌식 소파에 엉거주춤 앉아 TV 안에 금방이라도 빨려들어갈 것 같은 이재현의 뒤통수를 다시금 응시했다.
작고 단단해 보였다
주연은 문득 피 대신 머리카락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규정 외의 추측을 한다. 있어서 나쁠 건 없잖아. 원래 친자 확인 같은 걸 하는 데에도 머리카락을 쓸 수 있고. 그러니 이재현의 머리카락도 분명 쓸 일이 있을 거다. 하다 못해 재희가 좋아하던 무당집 굿판을 벌이는 데에서도 가끔 손발톱이나 머리카락을 요구하지 않았던가. 주연의 커다란 손이 재현의 소복한 뒤통수로 천천히 향했다. 주연은 엄지와 검지로 그의 머리카락을 한 가닥 집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한 가닥이 아니었다. 재현의 머리카락을 한 가닥만 섬세히 집기에는 그의 손가락이 너무 두툼했던 탓이었다. 그러나 주연은 여기서 물러날 수 없었다. 그는 손끝에 힘을 주고 손목 스냅을 이용해 탁 머리카락을 뽑아냈다.
“아!”
“아.”
“씨발 뭐냐 지금?”
“머…… 머리카락요.”
“그걸 니가 왜 만지는데?”
“완전 흰 머리가 있어서…….”
“바로 몇 주 전에 검정으로 염색했는데?”
“아아…….”
그런 거였구나. 새까만 머리칼이 이재희와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에 재희의 DNA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약간 두근거리기까지 했는데. 원래는 노란 머리였다고 말하며 고개를 돌리는 재현의 모습이 슬로 모션처럼 보였다. 그는 덧붙였다. 탈색 머리였어. 너처럼.
지금 너처럼…….
이주연은 약간 실망했지만 티내지 않았다. 그 사이에 주연을 다시 돌아본 재현은 인상을 쓰며 머리카락 뭉치를 쥐고 있는 주연의 손을 터억 내리쳤다. 어어 하는 사이에 그의 귀한 머리카락들이 바닥과 소파에 사뿐사뿐 흩어졌다. 재현은 입속으로 쯧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티브이로 시선을 옮겼다. 주연의 뒷목 솜털이 쭈뼛 솟았다. 혹시 속셈을 들켰을까. 머리카락을 뽑아다가 재희를 만들겠다는 엄청난 포부를. 주연은 긴장으로 마르는 입속을 혀끝으로 문지르다, 이내 떨어뜨린 머리카락들을 좀 주워 보려 손을 움직였다.
그 순간 재현이 TV를 껐다.
TV의 검은 화면에 머리카락을 줍는 주연의 엉거주춤한 모습과 재현의 무표정한 낯이 한 프레임으로 비친다.
“니 뭐하냐?”
“네?”
“씨발 내 머리카락 갖다가 뭐 하냐고.”
“아.”
“개 음침한 새끼야.”
재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그리고는 이주연의 물건이라는 나름의 표식인 빨간 동그라미 스티커가 붙은 청소기를 와당탕 끌고 와선 그 근방을 전부 청소해 버렸다. 결국 주연의 손에 남은 건 먼지 몇 톨 뿐이었다.
“꿈도 꾸지 마라.”
뭘 꿈꾸지 말라는 걸까? 이재희의 부활? 이재현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더 묻기 힘들어 알 수는 없었지만, 재현은 그 뒤로 방을 자주 청소하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는 걸 발견하기라도 하면 이주연이 다가가기도 전에 이삭 줍는 여인네 뺨치는 속도로 덥석 주워 주머니에 넣거나 변기에 넣고 내려 버렸다. 콰르르. 내려가는 변기를 먼 곳에서 멀거니 바라보며 주연은 생각했다.
머리카락도 저 정도인데 피는 어떻게 뽑지…….
사실.
이재희를 살려내서 무엇을 할것인가에 대해 생각한 적은 없다.
재희의 죽음이 어쩐지 운명처럼도 느껴진다. 재희가 그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을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든다. 그날 그 사건이 트럭의 잘못도 재희의 잘못도 아닌 어떤 의도였을 것만 같다는 확신까지 일었다. 그러나 주연의 마음이 주장한다.
재희 누나.
누나가 죽은 사람을 불러내기 위해 그렇게나 애썼는데 말이에요.
누구도 누나를 살려내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면 그건 너무 슬프잖아요 그냥 그래서 저는…….
그렇게 말해야겠다. 재희와 다시 대화할 수 있다면. 나를 왜 살려냈냐고 짜증스럽게 째려보는 재희의 얼굴에 대고 속도 없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집에서는 자꾸만 물건이 줄어들었다. 이재현이 이혼 조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재희의 것이었던 물건 (적어도 그가 그렇다고 생각한 것)과 이주연의 것이 확실한 것들 사이의 선을 벅벅 긋고 이재희의 것이었던 물건들을 박스에 옮겨 정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주연에게 묻는다 이건 누구 거냐고
이주연은 대답한다 누나가 많이 썼죠
그럼 이재현은 그것을 냉동 치킨 로고가 그려진 종이 박스에 담는다.
이주연은 재현의 지휘 하에 점점 정리되어가는—휑해져가는— 집안을 보면서 무언가 가슴 안쪽이 간질거림을 느낀다. 불쾌한 가려움이다. 그러나 입매만큼은 스물스물 올라간다. 주연은 알아서 이해한다. 원래 그렇잖은가, 누군가 간지럼을 태우면 당연히 웃음이 나고 그 이유는 과학자들도 밝혀내지 못했다고 하니까….
이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주연은 재희를 보낼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재희를 살려내야 했다. 인체 연성이라는 재희의 거대한 계획을 실행해 내야만 했다. 정말이지 완결성 있는 생각이 아닐 수가 없었다. 주연은 자화자찬에 가까운 결론을 낸 채 레쓰비 캔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집에 들어가야지. 주연은 냄새가 코를 찌르는 암모니아수 통을 옆구리에 낀 채 집으로 향했다.
집에는 이재현이 있을 거였다.
이제 나눌 물건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거의 다 정리된 짐을 차에 싣기라도 했을까?
주연은 주위를 둘러본다. 재현에게 줘 버린 스파크 닮은 차도 없었다. 대신 아직 치워지지 않은 트리들과 산타 장식들이 더럽게 밟힌 눈 위 전봇대 밑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주연은 문득 재희가 죽은 날을 헤아려 본다. 빼빼로 데이가 가까웠었지. 그 전이나 후였을 것 같다. 정확한 날짜는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기억나지 않는다. 원래 너무 큰 사건을 겪으면 그때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하던데, 과연 주연은 재현을 어떻게 만났는지조차 흐릿했다.
벌써 연말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재희가 없다는 것도.
재희가 없는 새해는 어떤 모습일까?
비어 버릴 집을 생각하니 문득 무거워 죽겠는 암모니아수 통을 이고 지고도 한참을 방황하고 싶기만 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집에는 이재현이 있겠지.
뭔가 안심이 되네……. 주연은 주먹 쥔 손바닥에 입김을 뿜으며 잠시 눈을 깜빡였다.
음 무슨 기분이지 이건…… 주연은 더 생각하기 싫어서 탈색모를 북북 비볐다. 갑자기 얼른 집에 가고 싶어졌다. 재현이 모든 것을 정리해 버리기 전에 도착하고 싶다는, 조급한 기분까지 인다. 오늘은 재현이 무슨 질문을 할까. 하루에 하나 꼴로, 한 달 반이나 이어진 지난한 소유권 질답의 끝이 보이는 와중에. 재현은 수저 개수까지 세서 나눠 갖자고 할까? 찬장에 꼴랑 한 통씩 있는 소금과 설탕을 반씩 나눠 갖자는 말 같은 걸 하지는 않을까.
그럼 나는 설탕은 필요 없으니 소금만 놓고 가라고 해야지. 주연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은 일일일일일일 비번 누르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산산이 깨어진다.
집안에 불이 꺼져 있었다. 저녁엔 꼬박 집에 붙어서 불을 켜 두고 있던 재현인데. 주연은 문득 위화감을 느낌과 동시에 그 고작 한 달 반의 시간 동안 누군가 자신 없는 동안 집을 지키고 있음에 익숙해졌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주연은 거실과 부엌을 나누는 아일랜드 테이블 위, 어항의 LED 조명이 수면을 푸르게 빛내는 그 바로 위에서 재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음을 알아챈다. 주연은 천천히 현관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금붕어들의 지느러미 움직임에 잔잔하게 찰랑이는 푸른 빛, 그 빛을 받아 일렁이는 재현의 얼굴은 흡사 귀신 같다. 이주연의 시선이 이재현의 표정에서 어깨로 어색하게 빗겨 흐른다.
한 폭의 사진 같은 모습이다. 폭이 칠팔십 센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직사각형 어항이 재현의 얼굴을 아래서부터 비추는데, 재현은 가만히 서서 현관에 선 주연을 바라본다. 그는 삼베 완장이 없는 상복을 입은 채다. 셔츠에 검은 바지를 차려 입은 그가 너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야.”
“네.”
“이 금붕어 어차피 다 네 건데 왜 밥 안 줘? 다 뒈지라고?”
“네?”
“이재희처럼?”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이재현은 셔츠 소매도 걷지 않은 채 어항에 풍덩 손을 담근다. 그의 손이 자아내는 우레와 같은 기척에 금붕어 세 마리가 급히 네모난 어항의 구석으로 달아난다. 주연은 그가 어항 안에서 천천히 인양해 올린 것을 본다. 얇고 하얀 직사각형, 판때기 같이 생긴, 그건…….
“이재희 폰 비번.”
“.......”
“이 집 비번이랑 똑같더라고.”
“.......”
“일일일일일일이 뭐냐?”
아, 이주연은 이재희의 휴대폰을 바라본다. 푹 젖은 채 꺼진 화면을. 이재현이 재희의 휴대폰을 금붕어 밥으로 줬다 빼앗은 와중에도 주연은 한 마디를 더하고 싶어진다. 당신도 영영영영영영 쓰잖아. 당신이 이재희처럼 소파 밑에 앉아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릴 때, 나는 그 뒤에서 언제나처럼 보고 있어서 알 수 있었다고. 당신들은 닮았어 아주 지독하게. 끔찍할 만큼 닮은 가족. 남매. 쌍둥이. 바다에 한 방울만 타도 맡을 수 있을 것 같은 피의 짙음을 나는 알아볼 수가 있다고…….
그러니까 나는 필요해. 당신의 피가.
그렇게 주장하는 대신 이주연은 번개처럼 뛰쳐나갔다. 현관을 박차고 집 안으로. 신발조차 벗지 않은 채로. 재현의 눈이 둥그렇게 뜨이며 동공이 열리는 모습이 주연의 시야를 가득 채운다. 주연의 긴 팔은 수조와 그 뒤에 선 이재현을 한데 밀쳐 엎어 버렸다. 수조의 모서리가 바닥에 닿았고, 벼락 같은 소리와 함께 수조가 박살났다. 크고 작은 조각들로 흩어진 유리 파편들의 난장 한가운데에서 젖은 셔츠 차림의 재현이 씨근덕거리며 누워 있다. 그러나 핏물은 보이지 않는다. 재현은 이 와중에도 피 한 방울 흘려 주지 않는 것이다.
나쁜 새끼.
순간 주연은 분노로 머리가 도는 것을 느낀다. 나쁜 새끼. 씨발 새끼. 그깟 피 몇 방울이 뭐가 아까워서 재희를 주지 않았을까. 재희에게 부모님을 다시 볼 기회조차 빼앗아 버렸을까. 적어도 시도해 볼 기회를 줬다면. 연락을 받았더라면. 한 번 만나 줬더라면.
“형님이 죽인 거예요.”
주연은 헐떡이며 말했다. 눈물이 치밀어 올랐으나 꾹 참았다. 재현의 어깨 너머 바닥을 짚은 주연의 손바닥이 뜨겁게 젖어들며 크림색 마루에 붉은 물기를 퍼뜨렸다. 두 명분의 숨소리 너머로 금붕어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파닥이는 소리가 먹먹한 귓전을 두드렸다.
“형님이 죽인 거예요.”
“야…….”
“형님이 죽인 거예요…….”
그러니까 책임을 지세요. 주연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으로 깨진 유리가 가득한 바닥을 더듬어 움켜쥘 만한 크기의 조각을 하나 집어올린다. 이미 너절하게 찢어진 손바닥에 투명하고 날카로운 간석기 모양의 유리 파편이 붉은 빛으로 번쩍 빛난다. 주연은 무릎을 벌려 재현의 명치를 깔아 뭉개고 앉은 채로 천천히 그것을 재현의 목 언저리에 가져다 댔다. 그의 도드라진 목울대가 긴장하는 것을 유리 끝으로 느낄 수 있었다. 주연은 피에 젖은 다른 손으로 재현의 한쪽 뺨을 감싸 쥔다.
“가만히 있어요, 형님…….”
잘못 움직이시면 진짜 죽어요. 사람 죽이기 싫어요 저는……. 형이랑 다르니까. 그 정신 나간 속삭임에 재현의 떨림이 꼴깍 멎는다. 주연은 서슬퍼런 눈빛으로 재현을 내려보다가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속눈썹을 떨었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뭐 이런 미련이 다 있어? 뭐 이런…… 씨발. 뭐 이런 사랑이 다 있어. 아파.
재현은 주연이 어깨를 크게 틀어 틈을 만들 때에도, 신중하게 목을 겨냥해 유리 조각을 대어볼 때에도 도망치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간 꼼짝없이 피를 내 주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재희 누나…….”
들었다.
그게 너무 징그러웠다. 이재희를 위해서 내 피를 씨발 이게 뭐하는 짓거리야? 기껏 집안 물건 다 정리해 주고 눈 앞에서 이재희 잘만 지워 주는 동안 너는 나한테서 이재희만 쳐보고, 머리카락 뽑고 피 빨아서 뭐 이상한 짓 할 생각이나 하고. 좆같은, 좆같은 새끼야. 재현은 억울함에 몸이 다 굳었다. 황당을 넘어 당황스러운 상황에 뒤통수에서 바스락거리는 유리 부스러기가 거슬리지도 않았다. 반사적으로 주연의 목울대를 붙든 재현의 손등에 핏줄이 곤두섰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울분의 분보다 울 함유량이 압도적으로 높은 주연의 표정에……
재현은 갑작스레 저항할 의지가 사라지고 만다. 이재희의 빈소에 젖은 걸레처럼 널브러져 있던 그날처럼. 물풍선 주둥이 풀린 것처럼. 얘는 뭐 이렇지. 재현은 알 수 없는 기분에 이주연 탓을 댄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사람 목 찌르고 피를 죽죽 빨아젖힐 것처럼 달려들었던 주연의 기세가 훌쩍이며 사그라들 때까지도 가만히 있어 주었다. 그가 멍청한 표정으로 울며 주머니에서 어떤 종이를 꺼내, 하나하나 세다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금 신중하게 재현의 목덜미에 유리 조각을 겨눌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냥 이주연이 뭔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든 냅둬 주려고 했었다
“맞다. 피 담아야 하는데.”
“.......”
주연이 자신의 가슴팍을 깔고 앉은 엉덩이를 멈칫거리며 일어서려고 굴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밥, 밥그릇이라도 가지고 올 테니까 잠깐 계실래요?”
“뭐 이 씨발롬아?”
“쿠팡에서 피 담을 용기를 샀는데 아직 안 왔나 봐요.”
“너 쿠팡 와우 회원 아니지?”
“네…….”
“그러니까 바로 안 오지.”
이 용기도 없는 좆밥 병신아.
답답함이 한계치리밋을 부숴버린 이재현은 고대로 뚜껑이 열렸다. 그는 오른쪽 손을 더듬어 두 번째로 큰 유리 조각의 뭉툭한 부분을 잡아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멍 존나 때리는 면상에 그어버리려다 짧게 탄식했다. 아오, 씨발. 씨발! 그 고함에 놀란 주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이재현은 그냥 이주연의 아랫턱을 겨냥해 단타로 주먹을 날렸다. 주연은 아주 간단하게, 커다랗게 휘청하다 뒤쪽으로 나자빠졌다. 재현은 단숨에 마운트 포지션을 점한다. 오랫동안 명치를 압박당한 재현은 작은 기침을 씨근덕거리며 짧은 숨을 끊어 내쉬다, 자신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헐떡였다.
“내가 말할 차례지 이제?”
니 그 종이 뭐야. 이리 내.
part 3
좆소 면접을 망치고 들어온 이재현은 하나 있는 정장 타이부터 북북 풀어 던져 놓았다. 상복 완장 달았던 팔뚝 핏이 좀 거슬리는, 딱 하나 있는 정장. 시커먼 타이에 이어 가다마이를 벗어다 소파에 던지고, 셔츠 단추까지 두어 개 푼 재현은 집안 찬장을 휘 둘러보다 문득 이주연에게 전화하려고 했다. 집에 있는 양념이라곤 소금과 설탕밖에 없는데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곧 이주연의 전화번호 같은 건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화번호부에 [ㅇㅈㅇ]을 쳐 넣고 나서야.
알아야 한다는 생각도 한 적이 없는데 왜 이주연의 전화번호를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누군가와 마지막으로 같이 살았던 건 당연히 이재희였고, 이재희 이전에는 그녀를 포함한 4인 가족이었고, 그들의 전화번호 같은 건 휴대폰 메모리에 저장하지 않아도 당연히 외우고 있는 종류의 정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재현은 짧게 혀를 찼다.
재희의 방에 있는 물건은 거의 다 정리가 되었고, 남은 건 부엌과 거실에 섞여 있는 물건들이었다. 그나마도 이젠 찬장에 들어있던 식기류와 양념류 같은, 네 거 내 거 따지기 몹시 구질구질한 것들만 남아 있었다. 재현은 소파에 털퍽 주저앉아 휑뎅그렁하게 비어 버린 집안을 한 번 둘러 보았다.
원래 이렇게까지 넓었던가, 집이.
둘이 살기엔 충분하고도 남는 넓이 같다. 적절한 크기의 방도 하나씩 나뉘어 있고, 거실이나 부엌 같은 공용 공간도 서로 부딪히면서 살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하고. 이재희는 뭐가 부족해서 이런 신혼집 같은 곳에서 제대로 살림 꾸리고 살 생각도 않은 채 바깥으로 나돈 걸까.
재현도 실은 알고 있다. 재희는 술만 마시면 엄마 아빠 이야기를 하곤 했으니까. 신경질이 잔뜩 묻은 남자 혹은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가 보면 항상 듣는 레퍼토리가. 엄마도 없는 번호 아빠도 없는 번호 하나 남은 전화번호부의 이름에 걸었는데 이제야 받네 모셔 가세요 에라이 퉤 재수가 없으려니까 이런 미친 년이 귀찮게 하고 젊은 아가씨가 밤 무서운 줄 몰라 길거리에서 아주…… 같은 잔소리들. 뒤에는. 꼭.
등에 업힌 재희가 여섯 살 먹은 어린애처럼 속살거리며 울었다. 엄마. 엄마. 아빠아아. 이제는 우리의 엄마보다도 아빠보다도 키와 덩치가 커져버린 이재현의 등에 업혀서도 끝끝내 울면서 찾는다. 마스카라 아이라인 섀도우 질질 번진 것을 이재현의 검은 티셔츠에 반짝반짝 묻히면서.
그럼 재현은 생각했다.
이재희에게 엄마 아빠를 대신할 무언가가 되어 줘야 할 텐데
이재현으로서는 존나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이재희의 정신적 지주 역할까지 도맡기에 이재현은 스스로의 상황조차 적잖이 벅찬 사람이다. 사람이 죽으면 저절로 땅에 묻히는 게 아니다. 성가시기까지 한 절차들을 읊고 많은 것들을 정하고 한차례 밀렸다 빠지는 인파를 목격하고 난 뒤에야 재현은 땅바닥에 가라앉았다. 그냥 자리에 주저앉아 추모할 수는 없는 건가. 죽음을 목격한 시점부터 무너질 수는 없는 건가. 이렇게까지 체면치레를 한 뒤에야, 모든 것이 지나치게 착착 진행된 뒤에야……. 아니 씨발 대체 언제부터 슬퍼할 수 있는 거지.
그러니까 이재현은 죽음이라는 것에 이골이 나 있었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먼 친척이 어른 없는 집에 쳐들어와 재현의 어깨를 흔들어댈 때에도 재현은 버겁다는 느낌을 받았다. 초록 매실 캔을 작달막한 손에 쥐여 주면서 어색한 듯, 그러나 단호하게 중얼대던 목소리. 재현아 네가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이제부터 네가 재희 챙겨야 한다. 재현아 네가 정신 똑바로 차려야 돼……. 세뇌와 같은 그 말 덕인가. 알코올에 몸이 기울어도 이재희 연락은 제정신으로 받았다. 어디냐 물으면 공부하려고 나왔다고 구라를 깠고 그 이후 한 시간 동안 걸으며 술기운을 뺐다. 나사 빠져 사는 이재희 앞에서 제정신 유지하는 일은 에너지 소모가 큰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타이밍을 놓친 것에 가깝다.
슬퍼할 타이밍. 책임을 벗어던질 타이밍.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날 타이밍.
제대로 배출하지 못한 슬픔이 응고돼 어딘가에 박혀 있었다. 요로결석 뭐 그딴 것처럼. 이재현은 그 씁쓰름하고 뜨끔하고 텁텁한 감정을 서술할 길을 도무지 찾지 못했다. 아무리 문질러도 색이 배어 나오지 않는 굳은 물감. 딱딱해질 대로 딱딱해진 지우개. 잉크가 다 빠진 형광펜. 간신히 예를 들자면 그런 종류였다.
그래서 궁금하긴 했다. 무책임하게 쏟아내는 느낌이 어떤 건지.
마음껏 슬퍼하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껏 사랑하지 못했다는 말과 동치될 수 있을까?
재현은 불현듯 깨닫는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도, 이재희가 죽고 나서도 그는 죽은 이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 없다는 사실을. 아니, 사실 생각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동안은 절차가 끝나면, 장례만 버티고 나면 끝이라고 여겨왔다. 이재현은 애도라는 단어 앞에서는 언어를 처음 들어본 사람처럼 머릿속이 허얬다.
애초에 향 피우고 꽃 꽂는 것 외엔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애도그게뭔데대체어떻게하는건데이씹덕아
라고 외쳐 봤자고.
재현은 그 시점에서 주연을 떠올린다. 거대한 빼빼로 바구니를 들고 장례식에 와서 끝의 끝까지 울어젖히던 주연을. 빈 상이 네모반듯하게 줄지어 있는 장례식장 구석에 앉아 모든 의례가 끝날 때까지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던 주연을. 재희의 흔적이 성실하게 지워지고 있는 집을 마지막까지 질질거리며 붙잡고 있는 이주연.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미련 맞게 굴고 넘칠 정도로 등신 같은 이주연.
이재현은 솔직히 이주연에게 배우고 싶었다. 아니면 묻기라도 하고 싶었다.
내 인생에서 없었다 치는 것 말고. 장례 끝났으니 기억에 지워버리는 것 말고. 대체 어떤 식으로 시체들과 함께 살아나가야 할지. 얼마나 울고 얼마나 불편해야 할지. 혹시 정해진 바가 있는지. 없다면 어떻게 알아나가야 할지.
이재희의 죽음을 같이 견디고 애도할 생각이 있는지.
그러니까 재현에게 유예할 만한 건 이제 수저 몇 벌을 갈라 가질 것인지와 소금 설탕을 반씩 담아 나눌 것인지 혹은 네가 소금 내가 설탕을 가져갈 것인지에 대한 결정 정도인데.
주연의 휴대폰 번호가 없어 지금 당장 전화를 걸어 그것을 따져 묻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재현에게는 너무나도 다행인 이 상황이 너무나도 황당했다. 사실 전화하지 않아도 소금과 설탕 정도야 알아서 할 문제긴 하지만 그딴 거 씨발 집어 치우고 야 있잖아.
씨발 모르겠다 걍
빨리 끝내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이대로도 썩 싫진 않은 것 같기도 해
재현은 언젠가 재희의 영정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연히도 그런 차림을 한 채, 벅벅 마른 세수를 했다.
이재희가 지구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곤 이주연밖에 없는데 이주연과의 관계가 이렇게 싱겁게 끝나도 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이대로 이주연이 집에 들어오면 끝나는 걸까? 거의 다 싼 짐을 들고, 소금 또는 설탕 또는 소금과 설탕 반씩을 챙겨서, 비밀번호 일일일일일일인 이 집을 나서면, 이제 이주연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전화번호도 나이도 가족 관계도 하는 일도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나는 그저……
재현은 남은 이재희를 닥닥 긁어다 들쳐업고 그에게서 떠나가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주연에게서 이재희를 빼앗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내 몫까지의 애도까지 그 자식이 다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재희에게도 미안한 일이 아닐까
재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소파에 앉았다. 그는 더없는 갑갑함에 속이 끓었다. 짚은 손 밑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만져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익숙한 핸드폰이었다.
이주연이 매번 물고 빨던 그 폰.
이주연이 핸드폰을 두고 나갔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재현은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이게 이재희의 핸드폰일 거란 사실을. 왜냐면 그렇지 않고서야 애지중지 들여다보고 심각하게 토독거리고 화면에 빨려 들어갈 듯 화면을 응시하던 그 눈빛이 설명 안 되니까.
재현은 엎어진 핸드폰을 천천히 뒤집었다. 배터리 86퍼센트 남은 핸드폰 액정은 차 사고로 죽은 사람의 것 답지 않게 깨끗했다.
이래서 이주연이 이상한 고집을 부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유품 정리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당연히 비밀번호가 걸려 있었다. 처음엔 부모님 기일을 입력했는데 아니었다. 혀를 쯧 차고 이재희 생년월일 여섯자리를 두드려 넣었다. 아니었다. 이주연 생년월일은 모르니까 패스고. 이재현 생일로 비번 설정해 둘 애틋한 사이는 아니니 애초에 시도도 안 했다 그건. 아 대체 뭐지. 얘 그렇게까지 복잡한 애가 아닌데.
습관처럼 주머니에서 폰 꺼내 영영영영영영 두드리다가 그제야 아, 싶었다. 현관 비밀번호. 깨달음을 얻은 이재현의 표정이 짜게 식어갔다. 아 존나 쪽팔리게 서로 이딴 걸 왜 닮아. 하여간 존나 단순해가지고.
일 여섯 개 연달아 난타하자 공장초기화 한 것처럼 새하얀 기본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핸드폰을 쓰긴 한 건지 메모도, 쓰던 어플도 뭣도 하나 없는데. 이재현은 그게 이상하면서도 왠지 무서웠다. 이주연이 이재희 폰 기록을 지웠을 리는 없고. 그럼 이재희가 이랬다는 건데. 씨발 무슨 곧 죽을 걸 예감한 사람처럼 이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다급하게 최근 통화 기록을 들어가 보니 이재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전화번호 열한 자리만 연달아 수도 없이 찍혀 있었다. 심지어 저장조차 되어있지 않은 낯선, 그러나 당연한 듯 빈번하게 자리를 채우고 있는 번호들의 나열.
오전 열두 시 오십삼 분. 오후 세 시 칠 분. 저녁 여덟 시 이십 분. 전화 건 시간도 받은 시간도 다채로웠다, 아주.
“아.”
전화번호 같은 건 휴대폰 메모리에 저장하지 않아도 당연히 외우고 있는 종류의 정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라는 말 나한테만 적용되는 건 아니었지. 재현은 그제서야 알아챘다. 이 번호 주인 이재희한텐 가족이었구나. 전화번호부에서 이름 검색해 통화 버튼 찍는 게 아니라, 그냥 습관적으로 키패드에 열한 자리 입력하게 될 정도로. 기꺼이 그 수고로움을 감내할 정도로 가족이었구나.
이주연이 이재희한테 그 정도로 가까웠구나.
“아오, 씨발…….”
이재현은 발 디딜 틈 없어진 것 같은 감각을 느낀다. 이재희의 가족으로서도, 이주연의 무엇으로서도 함께할 수 없다는 소외감에 눈을 깜빡거렸다. 그건 생각보다 더 더러운 감각이었다. 순식간에 내장이 발밑으로 떨어지는 기분. 천천히 발목에 뭔가 감싸지는 기분. 좆같아 못 해 먹겠길래 마지막으로 앨범을 눌렀다. 이주연이랑 뽀뽀하는 사진이라도 있으면 그걸 빌미로 고인 뒷담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이천이십삼년 십일월…… 오늘이 며칠이야?”
“오 일이요.”
“오 일, 이재희는 모오든 재산을 이주연에게 상속할 것을 약속합니다.”
“이주연이 증인입니다. …… 누나, 이런 말 왜 시키는 거예요?”
“그냥.”
“누나, 죽지 마요.”
“어. 내 노트북이랑 휴대폰이랑, 책이랑 방에 있는 거 너 다 가져.”
“그러니까, 가지기 싫다니까요……. 빼빼로 데이에 뭐 받고 싶은지 말하다 말고 무슨…….”
“주연아. 있잖아.”
“네.”
“금붕어도 가져.”
“아, 누나…… 근데 이거 녹음도 안 하,”
몇 초 되지도 않는 영상은 거기에서 끝이었다. 테이블에 엎어 놓기라도 한 건지 새카만 화면에서 목소리만 흘러 나오다, 이내 밝아져 재희의 얼굴이 잠시 비치더니, 그대로 끝나 버린다. 걍 그렇게. 재현은 테이저건을 맞은 사람처럼 우뚝 멈춰서 현관을 바라보았다.
이 영상의 존재를 주연은 알까? 모를 수도 있었다. 재희가 몰래 녹음한 것처럼 보이니까. 아니. 당연히 알 수도 있다. 모든 영상과 사진이 정리되어 갤러리에 딱 하나 남은 영상을, 이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으며, 비밀번호를 알고 있을 게 분명한 이주연이 열어 보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어느 쪽이든 확실한 건.
이주연이 자길 속였다는 사실이다.
야 이 개새끼야 밥솥 내 거라며 씨발…….
다 니 거였잖아 저 빌어처먹을 금붕어들까지
소파에서 튕겨나오듯 일어선 재현은 그대로 마루를 쿵쿵거리며 걸어가 커다란 수조 앞으로 걸어갔다. 금붕어 세 마리가 헤엄치고 있었다. 비슷하게 생긴 붉은 금붕어 둘과, 흰 꼬리가 예쁘장한 다른 금붕어 하나. 그렇게 셋이. 그 모습을 보고 재현은 참을 수 없는 무언가가 목구멍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이재현은 어항에 그대로 휴대폰을 처박았다. 첨벙 소리와 함께 금붕어들이 혼비백산했다.
***
<준비물>
부적 2장
물 35L
탄소 20kg
암모니아 4L
석회 1.5kg
…
…
유전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의 피
…… 라는 메모에 대해 대강의 설명을 들으며 재현은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낯을 고수했다. 자신의 피와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들을 제물로 사람을 불러내고 싶다는 이야기냐고 되묻자, 주연은 그게 아니라며 정정했다. 아뇨, 일종의 연금술인 거예요. 흑연으로 보석을 만들듯이 그쯤 되니 재현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이거 아주 미친 연놈들 아냐.
그러거나 말거나 주연은 울먹였다가, 헐떡였다가, 침잠하듯 처지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누나는 계속 보고 싶어했어요.”
“…….”
“가족을.”
“.......”
“되어 주고 싶었는데.”
그 비슷한 거라도……. 울음 섞인 고백에 재현은 편두통을 견디는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그걸 왜 네가…… 미친 건 이재희고 그건 죽었는데 이재희한테 미친 새끼한테 딱 걸리는 바람에 내가.
내가…….
잠깐이지만 일자리를 구해도 나가기 싫다고 느낀 내가 병신이다. 재현은 컴컴한 천장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내가 왜 병신이야.
병신은 이주연이지 씨발
개쩌는 회복탄력성으로 금세 정신 차리기는 했지만. 재현은 주연의 얼굴에 왕창 토하고 싶은 심정을 눌러 삼키며 악문 아래턱을 떨었다. 그리고 끝끝내 선언했다.
“지금 짐 싸서 나갈 거다.”
“형님 제발.”
“빨간 스티커 붙인 거 빼고 싹 가져갈 테니까 그런 줄 알아. 이 씨발 새끼. 소름 끼치는 새끼야. 네가 지금 무슨 말 한 건지 알지도 못하지? 미친 새끼야.”
“재희 누나가…….”
“이재희 핑계 대지 마, 씨발. 가고 없는 사람 들먹여서 얻다 쓰냐고.”
합판을 덧대 못 박아 버리듯 가로막는 말에 주연이 결국 입을 다문다. 눈물이 어룽진 눈가가 언젠가의 얼굴처럼 짓물러 있다. 그 얼굴에 재현은 명치가 눌린 것처럼 숨이 턱 막힌다.
“이재희가……”
“…….”
“살아 온다고.”
“네.”
“말 안 끝났어 씨발.”
“넵.”
“이재희가 살아 온다고 뭘 할 수 있는데, 네가.”
“그건…….”
“이재희는 자살한 거야. 자살한 애 살려내 봤자, 어? 야. 생각을 해 봐.”
걔가 마지막 순간에 그런 거 후회나 했겠냐? 네가 더 잘 알 거 아냐. 재현이 바람 빠지는 듯한 속삭임으로 중얼거렸다. 이재희가 후회나 했겠냐고. 죽어서 좋았겠지. 다 털고 떠나서 개꿀이었겠지 뭐가 더 있었겠어. 걔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하는 것 자체가 바보 짓이야. 마음에 병이 있는 사람이나 하는 짓이라고. 그러니까. 이건 다.
“다 산 사람 욕심이지.”
“욕심이요.”
“욕심이야, 그거.”
“욕심.”
“그래.”
“욕심…… 부리면 안 되나요?”
꽤 단호하게 말해 놓았던 재현의 입이 조금 벌어진다.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계란 귀신에 대고 협박을 해댄 듯한 기분에 재현은 허, 하고 한숨을 토해냈다. 욕심을 부리면 안 되냐고. 욕심을 부리면 안 되지. 왜냐면. 왜냐면.
“정신 차려……”
“…….”
“산 사람은 살아야지.”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런 말 없이도 재현은 살 수 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연이 깨부순다. 논리야 놀자도 못 되는 간단한 말로.
“욕심 부리면 안 돼요?”
“야.”
“죽을 것 같은데, 욕심을 부리면 안 돼요, 제가?”
“야, 좀.”
“보고 싶은 게 아니에요. 해 보고 싶은 거예요.”
아주 간단한 호소로…….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목울대 당겨 가까스로 떠막은 듯 높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주연이 말했다. 그의 손은 이제 재현의 팔 언저리를 애처롭게 붙든 채 떨리고 있었다.
“재희 누나가 알아낸 방법이니까, 저는요…… 해 보고 싶다구요.”
“…….”
“형은 집을 정리했잖아요.”
“그게 뭐.”
“각자의 방식에 협조하자는 거예요.”
“뭘.”
“추모, 애도…….”
“…….”
“슬퍼하기, 라든가요…….”
그 말에, 주연의 스웨터 멱살을 틀어쥔 재현의 손에 천천히 힘이 빠진다. 재현은 필사적으로 반박하지만 입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내가 슬퍼하고 있다고? 아닌데? 뭔 개소리야, 그런 적 없어. 들끓는 머릿속 덕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주연을 내려다 보는 재현의 낯에 대고, 주연이 속살거린다.
“재희 누나 때문에요, 형.”
“…….”
“세상에서 우리 둘만 존나 아프잖아요 진심…… 그러니까.”
끝까지.
한 번만 같이.
***
재현과 주연은 피로 찍힌 손바닥 자국이 가득한 거실 바닥을 수건으로 대강 닦아냈다. 그리고 주연이 몇십 분만에 완벽에 가깝게 그려낸 무언가—주연은 연성진이라고 말했다—위를 송곳으로 파내기 시작했다. 강화마루는 단단하고 딱딱했으나 흠집을 내고자 하면 못 낼 것도 없었다. 둘은 나란히 송곳을 쥐고 연성진을 세세하게 파냈다. 두 개의 송곳 끝들은 주연이 그려낸 삐침 하나까지 빠짐없이 긁어내려 무진 애를 썼다.
“야.”
“네?”
“나와.”
딴 거 하고 있어. 그러나 재현은 주연의 손에 감아 놓은 수건이 피로 푹 젖어드는 것을 보다 못해 주연의 손에서 송곳을 빼앗았다. 주연은 재현이 자신의 계획을 망치지는 않을까 조금 속끓는 모양새로 쭈뼛거리며 물러나 방에서 웬 박스를 가지고 나왔다. 그러나 주연의 염려와는 달리, 재현은 불그스름한 피가 틈새에 끼어 얼룩덜룩한 마루에 납작 엎드려선 세심하게 그려진 굵은 네임펜 자국 위를 차근차근 파 내려갈 뿐이었다. 재현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흰 셔츠를 입은 등짝에 역삼각형 모양으로 땀이 고여 젖어내려갔다. 축축한 정장 바지가 허벅지에 척척 감기는 데다 재현의 온 뺨과 목덜미가 축축해졌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주연은 어딘가 말없이 나갔다 들어오더니 깨진 어항보다 훨씬 큰 플라스틱 수조를 들고 와 무려 실린더로 리터수를 재 가며 물을 붓기 시작했다. 여며지지 않은 상처에서 피가 뚝뚝 흘러 수조에 한두 방울 떨어졌다. 재현은 알고도 못 본 척을 했다. 누군가의 피가 들어가야 한다면 주연의 것이 안 될 이유도 없었을 것 같았으니까.
연성진이 완성된 것은 새벽이 거의 다 갈 무렵에서였다.
재현은 길게 호흡하며 뻑뻑한 눈을 비볐다.
“야. 이제 어떻게 하면 된다고? 뭐, 주문이라도 외워?”
“…….”
“뭐 없어? 어떻게 해.”
“있죠.”
“어.”
“이 다음은 저도 잘 모르는데.”
“뭐 이 새끼야?”
야, 인마. 아냐. 넌 할 수 있어 이 자식아. 재현은 주연의 등을 턱턱 두들기며 성의 없이 격려했다. 그러나 자신을 슬쩍 돌아본 주연의 얼굴을 보고는 금세 낯빛을 바꾸었다.
“진짜 모르냐?”
“네.”
“안다매.”
“그게요. 연성은 연성진에 힘을 순환시켜서 물체를 이해하고 분해한 다음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저는 이 물…… 질…… 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재희 누나가 사 놓은 일반화학 책이라도 지금 들고 올,”
“닥쳐 씹덕 새끼야. 이해 분해 그딴 거 모르겠고 이재희가 미친년처럼 좋아했다던 그 애니에서는 어떻게 했는지나 말해.”
“…… 연성진 앞에 앉아요, 일단.”
이렇게? 주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재현은 냅다 양 무릎을 털퍽 꿇고 앉았다. 주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옆에 조심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다음은. 재현이 짧게 재촉했다. 주연은 마른침을 삼키고, 작게 헛기침을 했다가,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리고 천천히 옆을 바라보았다. 주연의 머리칼이 기울어져 그의 눈썹께를 간질였다.
주연의 시선 끝에는 재현이 있었다.
동그라미와 직선이 여러 줄 겹쳐진 연성진 한가운데, 물과 암모니아와 몇 개의 못, 정제 소금 더미, 그리고 잿가루가 된 유골이 옹기종기 모여 붙어 있는 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이재현이 거기에 있었다. 그 어깨를 되는대로 구부린 채, 송곳으로 깎아낸 그림 한가운데에서 언젠가 정말 사람이 솟아날 것을 간절히 믿는 사람처럼 진지하고 애닳는 낯으로 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주연이 줄곧 봐온 것처럼 매너리즘에 흠뻑 젖은, 모난 구석이 아주 닳아 버려 자신의 쌍둥이가 죽는 정도로는 눈 하나 깜빡도 않는 남자가.
벼락같이 마음을 바꾸기라도 한 것처럼.
전에 없이 간절하고 절실한 얼굴을 한 채로.
주연의 옆에.
주연은 손을 뻗어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와 있는 한 손을 잡았다. 움찔하는 기색이 있었지만 그는 거부하지 않았다. 주연은 천천히 그의 손을 잡아 올리고는, 그 끝이 뭉뚝하게 닳아버린 송곳으로 재현의 엄지와 검지 사이를 쿡 찔렀다. 재현은 삼킬 비명도 없이 눈가를 찌푸렸을 뿐이다.
찢어져 피가 배어나오는 손바닥을 주연은 잠시 엄지로 문질러 쥐다가, 송곳 자국으로 그려진 거대한 그림의 한 켠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손등 옆에 자신의 손등을 가까이 붙여 놓았다. 새끼손가락을 얽을 수도 있을 것처럼 가까이.
“두 손 다 붙여요. …… 반응이 일어나면 푸른 불꽃이 튄대요. 눈 감으시고요.”
명료한 지시에 재현은 천천히 다른 손을 연성진 한켠에 얹었다. 양 무릎과 두 손을 내려놓은 재현은 눈을 감았다. 새벽은 고요했다. 도시에서는 흔한 오토바이 배기음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감긴 눈 앞에서 무언가 푸르고 밝은 빛이 비추는 것이 느껴졌다. 어떤. 반응과 같은. 불꽃과도 같은 빛이 재현의 눈꺼풀 위를 찌르고 있었다.
재현은 문득 이 말도 안 되는 짓이 진짜일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졌다. 가슴이 세차게 뛰어 이를 악물었다. 손끝에 닿은 송곳 흠집들과, 찢긴 살의 감각이 천천히 무뎌졌다. 진짜 되는 건지도 몰라. 인체 연성인지 뭔지. 그러면. 그러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이재희가 진짜 돌아오면. 후회하지 않도록 난. 말해야 해.
도망쳐서 미안하다고.
믿을지 모르겠지만 내 마지막 가족인 너를 내 자신보다 아꼈다고.
나도 사실은 엄마 아빠가 정말 많이 보고 싶었다고.
같이 울어 주지 못해서 미안했다고.
사랑한다고…….
“재희야…….”
울먹임이 토해지듯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재현은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다 결국 느릿느릿 고개를 숙였다. 천천히 떨어진 머리통은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처박혔다. 재현은 덩치를 옹송그린 채 어깨를 마구 들먹이며 호흡을 삼켰다. 꼴깍이는 소리와 함께 눈물이 목 뒤로 넘어간다. 채 못 삼킨 침과 눈물이 줄줄 떨어져 마루를 적셨다. 헐떡이며 부짖는 소리가 웅웅거리며 거실을 울렸다. 한참을 우는 와중에도 재현은 감히 눈을 뜨지 못했다. 재희가 정말로 거기 있을까봐. 자신의 머리 앞에 피에 젖은 맨발을 딛고 서 있을까봐. 그러면 어떤 얼굴로, 어떤 표정으로 그녀를 봐야 할지 정말이지 알 수가 없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나 치사한 년아. 씨발 예고도 없이 혼자 튀냐…….”
걔가 지겨웠던 만큼 걔가 그리워서.
재현의 지난한 통곡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주연은 한 마디 말이 없었다. 그러나 재현은 그가 자리를 지켰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손 옆에 손날을 붙이고 있는 다른 손의 체온이 분명히 존재했으니까. 그가 몸을 무너뜨리고 오열하는 동안에도 꿋꿋하게 일정한 템포의 날숨을 쉬었으니까. 비록 그 호흡에 물기가 어리었을지언정. 재현의 옆에 남아서.
재현은 비틀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벌벌 떨리는 눈꺼풀을 천천히 들었을 때. 거기엔 여전히 수조와 암모니아와 소금더미와 못 몇 개와 이재희였던 잿가루가 있었다. 재희는 거기에 없었다.
아.
재현은 문득 거실 한 켠으로 고개를 돌린다. 날이 밝고 있었다. 저 멀리 빌딩들의 머리꼭지를 타고 올라올 태양이 하늘을 푸르게 밝히며 올라오는 것. 재현의 눈꺼풀을 찌르던 푸른 빛은 그저 여명이었다.
“안 됐어요. 죄송해요.”
주연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재현의 귓가에 와 닿았다. 재현은 엉망진창으로 젖은 얼굴을 하고 주연을 바라본다. 여명을 등지고 재현을 바라보는 남자를. 남자가 말한다.
“망했죠. 괜히 마루를 다 긁어 놔서…….”
이사도 못 가고. 큰일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주연의 눈에는 글썽임이 가득하다. 슬픔이 넘실거리는 음성으로 그가 몇 마디를 덧붙인다.
“접시랑 설탕이랑 소금 다 형 가지세요.”
“야.”
“네.”
“왜 안 됐는지 나 사실 알아.”
“왜요?”
“나 이재희랑 친남매 아니거든.”
전에는, 그러니까. 그 뭐냐. 네가 내 머리카락 가지려고 존나 지랄했을 때. 하하. 씨발 이재희랑 내가 피 섞인 남매 아니라는 거 네가 알면 걍 꺼지라고 할까 봐.
너 내가 걔랑 닮았다며. 사실 걔는 누구도 닮은 적이 없거든. 나도, 우리 엄마도, 아빠도, 너도, 걍…… 아무도 안 닮았는데. 그거 들키면, 네가 걍 나 쫓아낼 것 같아서.
재현이 횡설수설하는 와중에도 주연은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주연이 죽 찢긴 눈매를 느리게 내렸다가 올릴 때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주연의 표정은 전에 없이 담담했다. 얼핏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도, 애틋한 것처럼도 보였다. 재현은 알 수 있었다. 주연의 표정과 재희의 표정은 닮았으니까. 사랑했던 만큼. 보인다.
아. 재희야. 네가 나한테 남긴 유일한 거 말이야, 이제 알겠다. 내가 너한테 상속 받은 건.
이내 재현의 맨발이 마룻바닥에 쓸리는 소리를 낸다. 아주 쉬어버려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로 재현은 입을 열였다. 전에 없이 부끄럽고 겸연쩍고 싱거운 투로.
“야.”
“네.”
“주연아.”
“…… 네.”
“나 오늘 자고 가도 되냐.”
“음.”
“너무 피곤해서 그래 내가…….”
“그렇게 하실래요?”
“응.”
그렇게 할래.
자고 갈래.
그리고 문득 그 음성에, 몸짓에, 말투에, 목덜미에 스치는 새해의 아침 바람과 이제야 욱신거리기 시작하는 손바닥, 밥그릇에 담긴 세 마리의 금붕어, 밀려오는 피로와 안도감, 그리고 해방감, 자유로움, 에, 재현을, 주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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