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취이모(勿取以貌).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이재현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남자놈들이 우글우글 모여서 이성이든 동성이든 누군가를 평가하고 앉았을 때 제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상종도 하지 않는 그런 상남자 중의 상남자. 그런 일련의 행동을 취해도 전혀 열등감 덩어리로 보이지 않는 남자란 말이다.
그런데... 무려 그 '이재현'을 한 입으로 두말하는 하남자로 만드는 남성이 등장했으니. 그건 바로 '이주연'이라는 한학년 후배이올시다.
넓디 넓은 대학 캠퍼스 내에는 학과 불문 재현선배! 재현아! 인사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술자리가 있을 때마다 그 체육과 이재현있잖아. 누군가에게 1회 이상 꼭 언급되는 게 한국대학교 체육교육과 이재현이다. 성격 좋아, 얼굴 잘생겼어, 게다가 넓은 씀씀이까지. 신입생 때는 동기와 선배들 울리던 1학년이 이제는 신입생들이 눈 반짝이며 쳐다보는 선배님이 되셨다. 그렇다고 이재현은 절대 우쭐하지 않는다. 어장 치지도 않고 자기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을 기만하지도 않는다. 그냥... 타고나기를 사람이 바글바글했고 그 모든 이들을 허허 웃으며 다스릴 성정까지 갖춘 거다. 갑자기 이재현의 왕으로서의 기질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인맥이 많은 만큼 재현의 정보 레이더망은 여기저기 뻗쳐있었고 올해 복학한 누군가에 대해 알아내는 것 쯤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쉽다는 건데. 아니 글쎄 이주연이 말이야.
대체 이주연이 누군데?
이주연은 이번에 복학한 체육교육과 3학년 남학생이다. 누구는 화석이라 하고 누구는 군대 다녀와서 비슷할 거라 하고.. 요상하게 정확한 정보 없이 뜬구름 잡는 소문만 가득한 녀석이다. 뭐 일학년 때 겁 없이 씨씨했다가 군대런 한 녀석이거나 진짜 친구 없는 놈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보통의 이재현이라면 이렇게 생각하고 넘겼을 거다. 딱히 마주칠 일이 없긴 하지만 어쩌다 만나면 그냥 어 안녕~ 호탕하게 인사하고 넘어갔을 거다. 절대 모든 이에 정보를 손에 쥐고 있어야 속이 편안해지는 독재자 스타일이 아닌데.
이재현은 이주연을 보면... 짜증이 났다.
강의 시간에 조용히 들어와 조용히 강의를 듣고 조용히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걔를 볼 때마다 재현은 항상 같은 생각을 했다. 와 이재현 인성 미쳤네.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던 재현은 묘한 한 문장으로 정리된 제 마음에 절망한다. 나 싸이코패스인가? 인성 검사 해야 하는 거 아냐? 임용 절차에 인적성 검사 있을 텐데 떨어지는 거 아니냐고. 왜 가만히 있는 애한테 지랄이지 이재현? 맨날 지들끼리 숙덕거리는 놈들에게 했던 말로 자신을 꾸짖어봤자 해결될 리가 만무하다.
그럼 걔를 봤을 때, 언제, 짜증이 나는지 한 번 정리해보자. 한참 동안 머리 쥐어뜯다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펜을 잡아드는 모습을 보고 열강 중이신 교수님은 ‘재현이 녀석 한참 저러더니 드디어 해결책을 찾았구나.’ 기특해했다. 아뇨 교수님 걔 지금 저기 구석에 앉은 남자애 이름 노트에 적고 있는데요... 가자미눈을 뜨고 이주연을 관찰하던 이재현이 혹여나 누가볼까 쥐똥만 한 크기로 글자를 써 내려간다.
이주연?
1. 표정이 마음에 안 듦.
2. 눈이 마음에 안 듦.
3. 무섭게 생김. 키가 커서?
시바. 걍 일진 놀이하는 고딩이 싸이월드 미니홈피에다가 공개 저격 글 올린 거 아냐? 이재현은 다시 절망한다.
[주의]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이주연. 24살.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에서 자란 광주 이씨의 자랑(주연의 가족들에게)이자 집안의 장남이다. 어린 시절부터 체육을 좋아했고, 어. 또... 남자도 좋아했다. (?) 조금 이상한 이유가 껴있지만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체육교육과에 입학했으나. 인생의 첫사랑이자 첫 남자이자 개쓰레기이자 가스라이팅의 장인이었던 전 남자친구와의 이별로 2학년 때 예정에 없던 군대로 런(역시 이재현의 빅데이터는 정확했다). 누구랑 같이 있기만 해도 '아무튼 걔도 남자잖아. 걔도 사람이잖아'라며 발작 버튼 눌리던 전 애인 덕분에 여자 동기 1명을 제외하고 1, 2학년을 친구 없이 자발적 아싸로 지낸 이주연은 단톡 만들 때 하나둘셋넷.. 어 잠시만 한 명 없는 애 누구야? 에서 '한 명 없는 애'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재현이 이주연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한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주연은 날 때부터 게이였다. 물론 태어나자마자 응애 전 게이예요. 하고 성 정체성을 깨달은 건 아니지만 아주 어린 시절부터 주연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 사람들은 전부 다 남자였다. 짝꿍이었던 민석이(남자), 항상 웃으면서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교생 선생님(남자), 옆집에 살아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던 승호(남자)... 나는 남자를 좋아하는 걸까? 정체성에 혼란 올 타이밍도 없이 너무 뚜렷하게 한 방향만 가리키고 있어서 주연은 별 고난 없이 본인이 게이인걸 받아들였다. 문제는 자기가 게이인 거 받아들이는 거랑 진짜 남자랑 사귀는 거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거다.
주연은 이상하게 순종적인 면이 있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에게라면 더더욱.
전애인은 대학 입학하기 전, 알바하던 곳에서 만난 동갑내기 남자애였다. 걔가 먼저 고백했고, 주연도 어느 정도 호감을 가지고 있던 터라 사귀게 됐다. 그렇게 이주연의 첫 연애가 시작됐고 인생을 조지게 된다(?). 받을 때까지 전화하기. 집 앞에 찾아와서 깽판 부리기. 주변의 모든 연락에 딴지걸기. 다른 사람들이랑 만나면 울고불고 난리 치기(심지어 조별과제 때문이었다) 등등... 개진상 짓을 하도 많이 해서 나열하기도 힘들 지경이다. 물론 주연은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걔가 하는 행동들이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났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그 모든 행동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왔다고 생각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아닐 거다. 아마도.
아무튼 그게 사랑이든 뭐든 결론적으로 이주연이 꽃 같은 20대 초반을 집착 병 말기 끝판왕에게 씹어 먹혔다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혼자 학식 냠냠 먹고 있는 지금 이 상황 또한.
이주연은 이재현을 알고 있다. 이주연이 아싸긴 하지만 세상과 단절된 사람은 아니었기에 한국대학교의 유명 인사 이재현을 모를 수는 없었다. 일단 그 선배가 강의실에 들어오기만 하면 여기저기서 선배, 형, 오빠, 재현아. 온갖 호칭들이 그를 반겼고, 조용히 학식을 먹고 있을 때면 테이블 이곳저곳에서 이재현 석 자가 계속해서 들려왔으니까.
이주연은 현재 자신의 처지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성실히 공부하다가 졸업해서 내 미래를 찾아가야지. 정도로 생각하고 학교를 다니고 있다. 고로 이재현의 인싸력이 부럽지는 않았으나... 좀 신기하긴 했다. 저 선배한테는 무슨 자력 같은 게 있나? 사람을 끌어들이는 그런...?
주연은 오랜만에 만난 유일한 대학 동기... 최지아와 뜨끈한 국밥을 후루룩 떠먹고 있었다. 하 진짜 팀장 죽여버려. 몇가닥 없는 머리카락 걍 다 불태워 버릴까? 응? 주연아. 지아는 휴학 없이 스트레이트로 대학을 졸업해 지금은 어엿한 사회인이다. 사회인이 되면 다들 이렇게 공격적으로 변하는 걸까? 아니면 사회가 사람들을 공격적으로 만드는 걸까? 혼자 심오한 고민에 빠져있던 주연의 머릿속에 문득 이재현 석 자가 깜빡. 떠오른다.
“지아야 너 이재현이라는 선배 알아?”
“엉? 이재현? 어떻게 몰라. 그 선배는 왜? 너한테 사귀재?”
..국밥 먹다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참고로 지아는 주연이 게이라는 사실과 개쓰레기전남친과의 연애 내력까지 알고 있는 유일무이한 친구였다. 하긴 그 선배 여친들 장난 아니었지. 얼굴이 돼서 그런지 엄청난 미인들만 쏙쏙 골라서 사귀던데... 지아가 접시에 놓인 깍두기를 집어 아그작 아그작 씹어먹으며 답했다.
“그렇게 유명한가?”
“유명하다 못해 아주 연예인이지. 얼굴 잘생겼어 성격 좋아 선배 후배 동기 가릴 거 없이 다 잘해준다던데. 나도 같은 교양 들을 때 몇 번 얘기해봤는데 사람을 되게 잘 챙겨주더라고. 걍 원래 성격이 그런 듯”
주연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그리고 지아에게서 나온 이재현이라는 사람의 타이틀을 조합해본다. #핸섬 #다정 #쾌남 #호탕... 결과는 이러하다. 이쯤 되니 주연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오른다. 음...
“이건 그냥 내 생각인데”
“뭔데?”
“이재현 선배. 날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같아”
“너를? 왜?”
“글쎄. 이유는 나도 잘...”
***
이재현은 나름 티를 안 낸다고 애썼겠지만 그 노력들이 무색하게도 이주연은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어쩌다 마주치게 될 때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 표정이라든가, 아주 우연하게 나누었던 대화들(대화라기에도 민망할정도로 짧게 몇마디만 오갔다)을 상기해보면 주연이 그런 결과를 도출해낸 게 마냥 피해망상적인 건 아니었다.
모두에게 사랑받을 필요가 있나? 굳이... 주연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래도 영문 모를 미움을 받는다는 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대놓고 드러나는 감정이 아니라 그냥, 이주연만 느낄 수 있는 그 미묘한 감정의 주파수가 조금 신경 쓰였다. 이유 없이 좋은 사람이 있듯이 이유 없이 싫은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저 형에게 나는 그런 사람인 거겠지? 혹시 이유가 있으면 이야기 해주면 좋겠다. 아까부터 자신에게 쏟아지는 재현의 시선을 느끼며(이재현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거라 생각했겠지만) 생각한다.
원래도 나서거나 눈에 띄는 행동을 비선호하는 이주연은 이재현이 가까이 오면 오퍼시티 100 인간이 된다. 예를 들어... 어쩌다보니 이리저리 휩쓸려 과 회식에 참석하게 됐는데, 어쩌다 보니 옆자리에 이재현이 앉아있는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말이다. 일부러 잘 안 보이는 구석자리로 숨어들어 소주잔에 맑은 물 따라 홍차 마시듯이 홀짝이고 있었는데 대체 왜 여기에. 앞서 말했듯이 재현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재현이 있는 곳에는 모든 이의 이목이 집중된다. 무슨 말이냐면 이주연이 소주잔에 몰래 물 따라 마시고 있던 걸 딱 걸려버렸다는 거다.
“너! 딱 걸렸어”
“앟”
“이 친구 안 되겠네. 야야 재현아 옆에 있는 후배님 참교육 좀 해드리자~”
머뭇거리던 주연이 물이 차 있는 잔을 비우고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아 후배님 이러시면 안되죠. 큰 잔 들어, 큰 잔! 이미 얼큰하게 취해있는지 엄청난 성량으로 외치는 선배의 말에 주연은 또 소주잔을 내려놓고 자기 앞에 놓여져 있는 맥주잔을 얌전히 들어 보인다. 그냥 하하하 웃고 있던 재현의 표정이 미묘해진다. 얼큰 선배의 성화에 주연의 잔에는 엄청난 양의 소주가 찰랑찰랑 담긴다. 이거 홀짝이면 안 되는 거지? 아무리 사회생활 안 해본 주연이라도 그 정도는 알았다. 살면서 이런 양의 소주를 한 번에 넣어본 적이 없는데 될까? 고민하던 주연은 원샷! 원샷! 외치는 소리에 입술을 달싹거린다. 원샤앗...? 이주연은 빼는 법이 없다. 자신있다기 보다는 요령을 몰랐다.
“아이, 건배도 안 하고 마시면 안되지 후배님”
“..아”
“자자 다 같이 건배~ 모여모여”
재현의 말에 알콜 가득한 잔이 주연의 간을 망가트리는 시간이 아주 조금 유예됐다. 사방팔방에서 다양한 브랜드사의 이름이 적힌 잔들이 모여들었다. 건배하면서 흘린 알코올들이 테이블에 있는 안주 사이로 섞여들어 간다. 모른 척 흘릴 생각도 못 했다. 모두들 고개 뒤로 꺾고 벌컥벌컥 들이키는 모습을 보고 주연도 입술에 잔을 가져다 댔다.
“줘”
씁쓸한 알코올이 주연의 입술에 살짝 노크하던 그때 속삭이는 음성과 함께 잔이 멀어진다. 재현이 자신의 잔을 주연의 손에 쥐여주고는 검지를 입술에 댔다. 쉿.
“아 미치겠네~ 거기 둘 아직도 안 마셨어?”
“하이고 성격도 급하셔라. 지금 마셔요 마셔”
자자 먹자 먹어. 방금까지 주연의 손에 들려있던 소주가 가득 담긴 잔은 이재현의 손에, 이재현이 몰래 한가득 물을 따라놓은 잔은 이주연 손에, 그리고 이내 다른 두 액체는 각기 다른 두 사람의 목구멍을 타고 꿀꺽꿀꺽 넘어간다. 아 후배님~ 술 잘 마시네!! 얼큰(하게취한)선배가 박수를 치며 좋아한다. 이주연은 졸지에 물 한 컵 원샷하고 박수받는 사람이 됐다. 흘깃 옆을 쳐다보니 잔뜩 구겨진 미간이 보인다. 어흐으. 재현이 턱을 타고 흘러내린 술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이주연과 이재현의 시선이 맞닿는다. 잠깐. 아주 잠깐.
그리고 이내 재현의 고개가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주연도 다시 자신의 손에 쥐어진 술잔으로 눈을 돌렸다. 뽀득뽀득 매끈한 잔을 엄지손가락으로 괜히 비비적거린다.
이런건가. 다정하다는 게.
***
따사롭다 못해 따가운 햇살이 이재현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자취방 구할 때 이 집 남향이라 좋다는 얘기를 듣긴 했는데 해가 또 너무 기가 막히게 잘 들어서 알람이 필요 없을 지경이다. 물론 1교시일 때는 해가 안 떠서 괜찮지만... 음? 잠시만. 방금까지 새소리 짹짹 평화로운 모닝 재즈 바이브를 배경음악 삼던 자취방 내부가 순식간에 싸늘해진다. 마카롱 처럼 불어난 두 눈덩이를 손등으로 부비던 재현이 희번뜩 눈을 떴다. 왜 이렇게 개운하지? 오늘 9시 수업인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니까 오늘이 월요일이고, 월요일에는 9시 수업이 있는 날이고, 그 수업은 전필이고, 이미 지각 결석을 일삼아서 조만간 F 뜨게 생긴 그 강의인데, 지금 9시 45분이라는 거냐? 5초 만에 생각 정리를 끝마치고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침대를 빠져나왔다. 씻는 건 사치다. 입고 있던 후드집업 차림 그대로 모자와 마스크만 챙겨 들고 문밖으로 직행했다.
자취방이 왜 자취방이겠는가. 학교랑 가까우니까 자취방이지. 그렇다고 이미 뛰어 넘겨버린 45분을 돌릴 수는 없었다. 지각으로 이미 1점 까였고.. 나머지 2점을 사수하려면 10시 안에 무조건 강의실 입성해야 한다는 생각만을 머리에 가득 품고 재현은 달렸다. 재현이 지나갈 때마다 나뭇잎들이 살랑살랑 손 인사를 해준다. 응재현아너좆됐어♥ 하며...
그렇게 자신의 체력을 남용해 미친 듯이 달리던 이재현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 본관 건물을 보며 환하게 미소 지음과 동시에 나자빠졌다. 우당탕쿵탕 요란 법석한 소리와 함께 집업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 에어팟 볼펜 기타 등등 이게 대체 왜? 스러운 물건까지 다 튀어나와 땅바닥을 굴러다닌다. 물론 이재현은 신검 민첩성 탑티어 답게(관계없다) 바로 벌떡 일어났지만 문제는 이재현 갑빠에 그대로 슝 날아간 상대방이다. 머릿속에는 순간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열렬히 강의 중이실 교수님을 만나는 곳 백 미터 전, 모른 척 사과하고 튈까♪ 인간된 도리로 피해배상 딜을 해야할까♬
“괜찮으세요?”
F 학점의 갈래에서 인간 된 도리를 내려놓을 뻔한 재현은 간신히 이성을 붙잡고 아직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앓는 소리를 내며 얹어지는 손이 왕 컸다. 똥줄 타서 죽을 것 같은 와중에도 일단 냅다 뛰다 몸통 박치기 한 사람은 이재현 본인이라서 친절한 미소를 은은하게 유지하며 큼직한 손을 맞잡았다. 그런데, 이주연...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주연이?”
“..앟. 안녕하세요”
마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같은 모습을 하고 인사를 하게 된 이재현과 이주연의 시선이 허공에서 퉁 맞닿는다. 어딜 잘못 부딪혔는지 미간이 구깃해져 있었다. 안 그래도 어사인데 더 어사 되는 거 아닌지. 이재현의 빅데이터 안에 이주연이라는 사람은 속해있지 않아서 어떤 반응일지 예상도 되지 않았다. 그냥 말 없이 일어나서 갈 거 같기도 하고.
“죄송한데 일어나는 거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어? 아아, 어어 그래”
일으켜주려다가 입력 오류가 나서 남의 손 잡고 멍때리던 이재현은 이주연의 굉장히 공손한 음성에 파드득 놀라 반대쪽 손도 내밀었다. 그럼 '감사합니다.' 하고 조심스럽게 일어난 이주연이 선배님 눈알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시나 봐요^^ 라고 다시 한번 공손하게 이야기를 해오는 게 아니라. 눈을 접어서 사르르 웃어 보인다. 사르르... 사르르... 사람 웃는 모습을 보고 사르르 라는 표현을 해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 근데 진짜 사르르?
“어디 가시던 중이셨죠? 저 괜찮으니까 가보세요”
“아, 아 진짜 미안하다 주연아. 늦어서 뛰어가다가...”
“괜찮아요”
그렇게 말한 주연이 또 한 번 웃어 보인다. 사르르... 방금까지 ‘10시 도착’만 입력되어 있던 머리에 갑자기 어떤 솜사탕 같은 단어가 끼어들어 재현의 사고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멍때리던 재현은 제 주머니를 더듬더듬 거리며 핸드폰을 찾다가 이내 바닥에 처참히 엎어져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주연에게 손을 내민다. 그럼 방금까지 휘어져 있던 눈이 조금 커진다. '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모양새였다.
“번호 좀”
“번호요?”
“혹시 다쳤을지도 모르잖아. 내가 지금 완전 지각이라 이따가 연락할게”
진짜 괜찮은데... 주연이 들리지도 않을 법한 사운드로 대답하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얘는 무슨 폰에 잠금도 안 걸어놓냐. 같은 아이폰 사용자로서 능숙하게 전화 앱으로 들어가 토독토독 번호를 입력해 손수 저장까지 했다. '이재현' 이름은 얘가 나중에 알아서 바꾸겠지.
“진짜 미안해. 이 번호로 문자 남겨줘”
바닥에 떨어진 잡동사니들을 쓸어 담은 재현이 손을 휘저어 인사하고는 빠르게 사라졌다. 저 멀리 본관 건물로 들어서는 재현을 멍때리며 보던 주연은 선배도 형도 다른 어떤 수식어도 없이 ‘이재현’ 담백하게 이름 석 자만 담겨있는 핸드폰 화면을 바라본다. 연락을 남길 생각은 없었다. 뭐 교통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고 사람끼리 부딪힌 거고(물론 부딪힐때 굉장히 아프긴 했다만) 조금 뻐근한 발목을 빼면 이렇다 할 부상도 없었으니까... 굳이 이재현에게 책임을 안기고 싶지는 않았다.
한참을 서 있다 핸드폰을 다시 가방에 챙겨 넣던 이주연은 바닥에 떨어진 에어팟 한쪽을 발견했다. 백퍼센트 이재현 거라 모른 척도 못하고 조심히 주워들어 흙먼지를 탈탈 털어낸 주연이 한숨을 폭 내쉰다.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지고는 있어야겠지.
***
“와 재현아 핸드폰 무슨 일이냐?”
“형님 가슴 아프니까 말 걸지 마라”
“아까 짐승 소리 내면서 뛰어오더니 떨궜네”
재현이 산산조각난 제 핸드폰 화면을 슬픈 눈으로 바라본다. 아직 할부 남았는데.. 그냥 쓰자. 다짐했지만 가슴이 미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비록 화면의 반쪽이 금방이라도 기이한 현상이 일어날 법한 색으로 빛나고 있지만 나머지 반쪽은 비교적 멀쩡하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아야 하는 걸까. 그나저나 연락이 왔나. 눈을 가늘게 뜨고 무지갯빛 화면 사이에서 문자 앱을 힘겹게 찾아내 클릭한다. 일단 위쪽 화면은 멀쩡하니까 잘 보여야하는데.. 새로운 메시지는 없었다. 고장 난 거 아니지?
“준아 나한테 문자 한 통 보내봐”
“잠만”
‘재수강 축하한다’ 야이씨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랬지. 제 속도 모르고 동기 놈이 낄낄댄다. 걔는 좀 괜찮나? 아까 보니까 발목 좀 절던데. 소식 없는 이주연에 괜히 마음이 답답했다. 걍 내가 번호를 받아올 걸 그랬나. 밥이라도 한 끼 사줘야 할까? 다른 남자 후배 같았으면 냅다 찾아가서 왜 연락 안 줬냐 호통치면서 병원 데려가고 국밥 한 그릇 사줬을 텐데 이주연한테는 왜 이렇게 어려운 거냐. 일단 냅다 찾아가기에는 걔가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르고, 호통?도 안 나온다. 조심스러운 상대도 아닌데 말을 좀 아끼게 됐다. 싫어서? 라기 보다는 그냥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해야 할까. 걔도 이걸 알겠지? 그래서 연락 없는 건가.
겨우겨우 세이브한 강의 내내 이주연 생각만 하던 이재현은 공강 시간 때우러 동방으로 가는 중에 우연찮게 또 이주연 머리꼭지를 발견해버렸다. 아 모르것다! 그냥 만나면 괜찮냐고 물어봐야지. 넘긴 게 몇 분 전인데 이렇게 마주하다니. 등을 돌리고 있어서 그냥 지나가면 땡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재현은 동기들에게 먼저 가 있으라 손짓한 후 쭈그려 앉아있는 뒤통수에 다가갔다.
“뭐해”
이주연은 답이 없었다. 좀 작게 말했나? 싶어서 다시 부르려는데 걔 손에서 뭔가 꼬물거리는 게 보였다.
“고양이?”
“어.. 안녕하세요”
얘랑 한 대화의 팔할은 안녕하세요 일듯. 인사성이 바른 건지 아니면 인사만 하고 다른 대화를 안 해서 그런 건지. 재현이 슬금슬금 다가가 주연의 옆에 천천히 쪼그려 앉는다. 밥 주는 거야?
“아뇨. 오늘은 간식을 안 가져와서...”
“평소에도 줘?”
“가끔이요”
“글쿠나”
까악까악. 재현은 어색함에 미칠 것 같았다. 제 옆에서 왕 큰 손으로 고양이를 만지작 거리고 있는 이주연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지만 말이다. 참고로 이재현은 고양이를 별로 안 좋아한다. 싫어한다기보다는... 그냥 별로 관심이 없었다.
“고양이 좋아해?”
“잘 모르겠어요”
“간식 줄 정도면 좋아하는 거 아니야?”
“그런가요”
주연의 손가락이 턱을 슬슬 긁자 고양이가 코를 찡긋 거리며 얼굴을 부벼왔다. 그 모습에 일자로 다물려 있던 이주연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간다. 이번건 사르르 까진 아니고... 사ㄹㅡ.. 이런 느낌이네. 쭈그려 앉아 무릎에 턱을 괴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재현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닮았네.
“네?”
“어? 아니아니, 그나저나 발목은 괜찮아? 아까 좀 절지 않았나”
“아... 괜찮아요”
“병원 같이 가줄까?”
고양이를 쓰다듬던 주연의 손이 멈칫한다. 재현도 괜히 심장이 덜컥 했다. 원래 누구 다칠 때마다 자주 하는 단골 멘트인데 괜히 긴장됐다. 침을 삼키고 싶었는데 소리가 너무 크게 날 거 같아서 참았다.
“진짜 괜찮아요”
“그래. 나중에 아프면 진짜 말해. 번호 알잖아”
주연은 핸드폰 속에 저장되어 있을 이재현 이름을 떠올리며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이주연은 긴가민가하다. 진짜 연락을 하라는 걸까? 아니면 그냥 하는 말? 그럼 나 간다. 자리에서 일어난 재현이 잔뜩 구기고 있어 찌뿌둥해진 몸을 이리저리 풀며 말했다. 주연은 또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린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정의 내리는 이재현이 이주연에게는 조금 어려웠다.
***
“미쳤네 비 무슨 일이냐?”
건물 밖으로 나서려던 재현이 혼자 중얼거렸다. 사물함에 꽁 박아둔 우산이 있어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생쥐 꼴하고서 자취방 입성할 뻔... 접혀있는 우산을 펼치자 우산대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삐걱거렸다. 아무렴 어때. 비만 안 맞으면 됐지.
바람이 불 때마다 뒤집어질까 노심초사하며 바람의 방향과 세기에 따라 각도 조절하던 재현의 시야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검정 우산이 들어왔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텐데 우산이 놓인 곳이 며칠 전 이주연이 쭈그려 앉아 고양이 만지작 거리던 장소라는 게 번뜩 떠올라서 계속 눈길이 갔다.
아 미치겠네. 지금 그딴 데 신경 쓸 게 아니라 빨리 자취방으로 대피해야 하는데. 바닥에 놓인 의문의 검정 우산을 애써 무시하고 몇 발자국 걷던 이재현이 결국 다시 턴했다. 쭈그려 앉아 우산 안쪽을 살펴보니 날아가지 말라고 야무지게 돌로 눌러둔 손잡이와 동그랗고 반짝이는 호박빛 눈동자와 마주할 수 있었다. 설마 얘한테 우산 주고 간 건 아니겠지? 두 개라 하나 두고 간 건가?
이재현은 이주연을 잘 모르지만. 걔라면 왠지 자기가 쓰고 있던 우산을 고양이한테 씌워주고 비 맞으면서 가는 미련한 행동을 했을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와 감성 대박이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은 억수 같은 빗속에서 우산 없이 있는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래.. 이 날씨에 무슨”
물론 찾지는 못했다. 그래. 그런 미련 곰탱이 같은 행동을 했겠어? 아니 그 이전에 걔가 고양이 주고 간 걸 내가 뭐 어쩌겠냐... 급피로해진 재현이 다시 자취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 가자마자 뜨뜻한 물로 샤워 싹 하고 보송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에 누워서 유튜브 시청이나 해야겠다. 누구에게 받았는지도 기억 안 나는 우산은 이재현 덩치를 가려주기에 너무 작아서 자꾸만 양쪽 어깨가 젖어 들어갔다. 물론 비가 세로가 아닌 가로로 내리는 이유도 있었지만. 신발과 양말은 질척질척 해진지 오래다. 이렇게 된 거 그냥 뛰어야겠다 마음 먹은 순간 신호가 딱 걸려서 재현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갑자기 내리는 비라 그런지 우산 없이 이리저리 달리는 사람들이 눈에 많이 보였다. 나도 저들 중 한명이 될뻔했지... 이재현 눈이 도르륵 굴러간다. 와 저 사람은 가방에 백퍼 노트북 들어있네. 가방을 품에 꼬옥 안고 달리는 학생을 보며 생각했다. 반대쪽으로 도르륵. 그 옆에 사람은 편의점에서 급하게 구입했는지 이미 쫄딱 젖은 상태로 주섬주섬 우산을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또 저 사람은...
이재현은 지금 이주연을 찾고 있었다. 대체 왜? 그건 이재현도 의문이다. 본인도 이유를 알고 싶었다. 이미 양쪽 어깨가 홀떡 젖은 지금, 남 생각할 처지가 아닌데 자꾸 떠올랐다. 고양이를 만지던 왕 큰 손이라든가, 사르르 웃는 미소라든가, '안녕하세요'하고 물감 번지듯이 들려오는 목소리라든가, 그런 것들이.
“어...”
“너지”
“..네?”
“고양이한테 우산 준 사람”
결국 찾았다. 이주연은 버스정류장 근처에 있는 상가 건물 앞에 쭈그려 앉아 주섬주섬 가방 안에 물건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난데없이 앞에 나타나 고양이 어쩌고 하는 재현을 올려다보는 눈이 동그랬다. 항상 긴 앞머리에 가려져 언뜻 보이던 두 눈은 쭉 찢어져 있어 사람을 째려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까 동그랗고 큰 눈이었다.
“학교 안에 있는 고양이한테 누가 우산을 주고 갔더라고”
“아”
“근데 보자마자 주연이 너일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 제가 준 거 맞아요. 비까지 맞으면 더 추우니까”
“그래서 찾아다녔어”
“네?”
“네가 방금 말했잖아. 같은 이유로 계속 찾고 있었다고”
주연은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재현에 꽤나 당황한 눈치였다.
“집 여기서 가까워?”
“버스 타고 금방이에요”
“그러고 버스 타기 좀 그렇잖아”
“갑자기 내리는 거 보니까 소나기 같아서 여기서 좀 기다렸다가 가려고요”
“내 자취방은 여기서 가까운데”
“...”
“옷 빌려줄게.”
그니까 선배가 왜요? 주연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려댄다. 아, 저... 진짜 괜찮아요. 이주연이 이재현에게 자주 하는 말 리스트를 수정해야 할 듯 싶었다. 1. 안녕하세요, 2. (그냥도 아니고) 진짜 괜찮아요< NEW! 이재현도 지금 좀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불편하다는 티를 이렇게 내는데 굳이 굳이 집에 데려갈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없다. 아 그러냐ㅋㅋ 그럼 감기 조심하고~ 이 형님은 추워서 먼저 집에 간다! 하고 퇴장할 타이밍인데 입이 주인 맘도 모르고 지 멋대로 나불거린다. 너 그러다 감기 걸린다니까. 체교과 가오가 있지 감기 걸려서 골골 거리면 안되지ㅋㅋ(전혀 상관없지만)
그리하여... 오바 조금 많이 보태서 어깨 태평양만한 남성 둘이 꼬옥 달라붙어 코딱지 만한 우산을 나란히 쓰고 걸어가는 이 장면이 연출되어버린 거다. 앞뒤로 붙어가는 게 비를 덜 맞는 최고의 방법이지만 인권 유지 면에서 최하점을 받아 탈락. 주연아 많이 좁니? 아니에욯. 너 지금 어깨가 바깥쪽으로 나가 있는데. 그건 선배도 마찬가지... 좁은 우산 아래서 오순도순 대화 꽃을 피우며 결국 이재현 자취방에 도달했다.
남의 집에 물 뚝뚝 떨어트리며 들어갈 수는 없어서 엉거주춤 있자 이재현이 후다닥 수건을 가져와 머리에 덮어준다. 보일러 틀어둘게 화장실 가서 바로 씻어. 너 입술이 퍼래. 몸에서 떨어지는 물 때문에 웅덩이 지고 있는 현관은 이주연 눈에만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욕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 멍하니 서 있으니 밖에서 “옷 문 앞에 둔다!” 우렁찬 소리가 들려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지? 이재현... 정말 뭐지?
***
“좀 어때? 으슬으슬하진 않지?”
“네. 보일러 너무 빵빵한 거 아니에요? 바닥 엄청 뜨거워요”
“원래 좀 지져야 감기 안 걸려”
저 다음으로 욕실에 들어간 이재현이 드디어 씻고 나왔다. 그동안 좌식 의자에 부동자세로 앉아 멍때리던 주연에게 훅하고 이재현 향기가 끼쳐왔다. 그러고 보니 지금 자신은 이재현 속에 파묻혀있었다. 이재현이 쓰던 샴푸와 바디워시, 이재현 옷, 이재현 집. 주연은 문득 재현이 자신에게 베푸는 다정이 조금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주연에게도, 이재현에게도.
“선배는 되게 다정하신 거 같아요”
“으어?”
재현은 똥 멍청이 같은 소리를 내고 큼큼 헛기침을 했다. 너무 가오 떨어지는 소리를 냈네.
“선배 얘기는 제가 묻지 않아도 듣게 돼요. 그중에 가장 많이 들은 말이 그거예요”
“어?.. 그르냐. 내가 원래 오지랖이 넓어서 남 챙겨주는 거 좋아해. 하하하”
“저는 선배하고 이야기할 일이 많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되게 다정한 사람이구나 하고”
이쯤되니 재현은 약간 죽고 싶어졌다. 티비도 안 켜둬서 정적만 맴도는 거실에 자신의 칭찬만 둥실둥실 떠다닌다. 잘생겼다는 칭찬이라면 능청스럽게 넘어갈 수 있는데 이런 건... 면역이 없었다.
“선배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뭔데?”
“발목은 진짜 괜찮아요. 사실 부딪혔을 때는 조금 아팠는데 금방 괜찮아지더라고요”
“다행이네”
“예전에 소주 대신 마셔주신 것도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걸 뭘, 아이. 그런 건 고맙다고 안 해도 돼”
“그리고 오늘도요.”
“별말씀을”
“또... 선배 오른쪽 에어팟... 저한테 있어요. 훔친 건 아니고 저번에 떨어트리고 가셨는데 줄 타이밍을 못 찾아서 계속 가지고 있었어요”
“와 이건 대박인데? 나 그거 엄청 찾아다녔거든”
“마지막 말이 제일 하고 싶었던 말이에요”
농담처럼 뱉어진 주연의 한마디에 재현이 호탕하게 웃어 보인다. 얘랑 단 둘이 있으면 묘하게 몸이 근질근질하고 좌불안석 불편하고... 그런 느낌이 지금도 드는데. 전에는 역시 어색해서 그런가? 싶었던 느낌이 뭐랄까.
“선배가 저를 별로 안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언제는 째려보다가 언제는 챙겨주고. 평소에는 말도 안 걸면서 어쩌다 얘기하게 되면 주연아 하면서 친근하게 부르고. 저는 이런 게 조금 혼란스러웠어요. 다른 사람 시선을 의식하는 건가? 하고”
생각해보면,
“근데 선배는 원래 그런 사람이더라고요. 가식이 아니라 진짜로 다정한 사람”
“주연아”
“선배 저 게이예요”
주연이 제 옆에 앉은 재현과 눈을 마주했다. 이주연 인생 최초의 자발적 커밍아웃이었다.
“금사빠도 아니고, 조금만 잘 해준다고 좋다고 따라다니지도 않아요. 생긴 것만 보고 좋아하지도 않고... 이 말을 하는 이유가 제가 선배를 좋아해서 그런 것도 아니에요”
“제가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선배가 보여주는 다정은 저한테 너무 위험해요. 계속 이러면...”
좋아하게 될 거 같아요.
덜마른 머리에서 흘러나온 물방울이 턱을 타고 내려오다 이내 뚝 하고 떨어졌다. 이제 둘 사이에는 주방에 딸린 작은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이 맴돈다.
이재현이 아웃팅 따위를 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만약 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조금 충동적이긴 했지만 이주연은 언젠가 결국 이재현에게 말하게 됐을 거다. 지금 재현이 어떤 종류의 혐오감을 보인다면 물론 상처받을거다. 하지만 시간이 더 흘렀을 때, 이주연이 세운 가설이 사실이 됐을 때,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거 같아서. 이제 도망갈 군대도 없는데 그때 받을 상처는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뱉어버렸다. 재현은 조금 멍한 표정이었다. 당황스럽겠지. 자기는 그저 친절을 베풀었을 뿐인데 커밍아웃이 돌아왔으니.
“죄송해요. 당황스러우실 거 알아요”
“잠깐, 잠깐만”
주연이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흠뻑 젖은 옷도, 가방도, 그리고 아직 상황 파악 중인 이재현도 아직 제대로 정리된 게 하나도 없었지만 여기 더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눈물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대신 심장이 너무 덜그럭거렸다.
“옷은 정말 감사해요. 제가 꼭 세탁해서 돌려드릴게요”
“주연아 내 얘기 좀 들어줄래”
“...”
자취방이 넓어봤자 얼마나 넓겠는가. 거실 바닥에 앉아있던 이주연은 금방 현관에 도달했지만 제 손목을 잡아 오는 이재현에 너무 쉽게 멈춰 세워졌다. 무식하게 힘을 쓴 것도 아닌데 발목에 족쇄라도 채워진 것처럼 뚝 하고.
“다행이다”
“뭐가요?”
“네가 게이라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이야”
“...선배 게이예요?”
“아니. 난 지금까지 남자랑 사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근데 지금 무슨...”
“내 말이. 나도 지금 내가 뭐라는지 잘 모르겠거든? 하나 확실한 건 네가 이대로 나가는 건 싫다는 거야.”
놔주세요. 볼품없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내뱉어진 음성과는 다르게 이재현 손에 붙잡힌 손목은 미동조차 않는다. 이재현이 먼저 놔줬으면 했다. 그럼 바로 빠져나올 수 있을 거 같은데.
“아까 네가 한 말 다 맞아. 변명 안 할게. 나도 계속해서 그 이유를 찾고 있었거든. 네가 계속 신경 쓰이는 이유”
“그래서요”
“아직도 모르겠어. 머리가 너무 복잡해”
“선배 저 아까 한 말 진심이에요. 장난으로 말한 거 아니에요”
“나도 알아. 네가 이런 장난칠 애 아니라는 거”
방금까지 온기에 따뜻하던 발이 비에 흠뻑 젖은 신발에 구겨 넣어져 축축해졌다. 지금 젖어있는 건 발뿐인데 어쩐지 머리도 마음도 점점 무거워진다.
“이것만 들어줘. 나는 네가 싫지 않아, 게이인 것도 상관없어, ...네가 날 좋아해도 괜찮을 것 같아”
자리에 주저앉아버리고 싶을 만큼.
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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