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명. 올랜도 프로젝트. 타겟은 고위험군 센티넬로, 정부의 선제적인 리스크 관리를 목적으로 한 센터넬 제어칩 이식 대상임. 또한 익명의 제보에 따라 반란군과의 내통 혐의에 대해 극비리 수사 중임. TF 작전이 끝나는 대로 타겟을 생포하여 서울로 이송할 것. 단, 반란군과 내통하고 있는 명백한 정황이 발견된다면 그 즉시 사살할 것.
태양신, 어쩌면 청순한 야차라고 했다.
탄성 자아내는 아름다운 외모에 홀렸다간 눈 깜짝할 사이에 뒤져있기 십상이란 뜻이다. 에스 뒤로 플러스를 사정없이 달고 있는 상급 센티넬 이재현에게 따라붙은 명명이다. 규모 큰 프로젝트에는 항상 이재현이 있다.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반란군 제압하는 걸 꼭 장난처럼 굴어댔던가. 그게 영 배알이 꼴려 이재현 흠집 내기에 열성적으로 굴어봐야 겨우 구질구질한 소문 따위로 절대적인 사실을 뒤엎을 수는 없는 일이다. 만 서른도 안 된 놈이 해외지부 지부장 직급 먹어도 군말 못 한 이유가 따로 없단 소리다. 지저분한 뒷소문 따위에 개의치 않는다. 내가 잘난 걸 나더러 어쩌라고…. 흡사 우는 소리를 내며 아름다운 낯짝으로 빙글빙글 웃어대는 것이 전부다.
그 웃음이 꼭 거북한 주연에겐 이재현이란 존재가 퍽 귀찮다.
-“주연. 언제 끝나? 같이 저녁 먹자.”
씨발…. 공중에 섰던 주연이 땅에 처박히듯 착지한다. 연이어 이어지는 매서운 총격 소리. 그 틈을 비집고 귓고막을 때리는 해맑은 목소리에 얼이 빠진다. 이내 바람 가르는 총성이 터지고, 단말마의 비명에 찰나 고요해진다. 건물 뒤편에 숨어있던 이들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에 곁에 선 요원들의 움직임도 다급해진다. 더 추격할까요? 소총을 쥐고 선 요원이 주연의 의사를 살핀다. 육안으로 확인된 반란군의 인원은 많지 않았으나, 더 이상의 무리한 추격은 의미 없다. 오늘 역시 최근 있었던 간헐적인 도발성 공격의 일환이다. 주연은 손짓한다. 철수.
-“씨발이라니. 형 또 서운해지려고 그래.”
“무전으로 헛소리하지 않습니다.”
-“티본스테이크 먹으러 가자.”
후식은 와플 아이스크림이야. 차라리 면전에 대고 욕을 갈기는 게 낫지 않나 싶다. 현장에서 날고 기던 지부장이란 놈이 요원 모두에게 들리는 무전인 걸 모를 리가 없다. 대놓고 저 엿먹이겠다는 심보가 아니고서야. 하지만 이런 나날이 낯설던가. 개무시하면 그만이다.
-“또 무시하냐? 저녁도 싫고, 가이딩도 싫고. 그럼 나랑은 뭘 하는데?”
하지만 헛소리도 정도껏 해야하는 법이라. 진짜 이 미친새끼가……. 일순간 손발이 차갑게 식는다. 다 무전 꺼. 단호한 외침과 함께 귀에 꽂고 있던 통신기를 바닥에 내던졌다. 이럴 땐 수직 체계 다 개무시하고 정말로 주먹을 갈기고 싶어진다. 폭주의 순간이 눈앞에 당도한다. 다만 제 정신줄 단도리 치게 되는 건 결국 또 이재현이다. 주연은 참기로 한다. 이재현 때문에 폭주해봐야 이재현과 섹스할 빌미나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가.
어느덧 해가 지고 있다. 도시 전반이 씨뻘건 노을에 잡아먹혔다. 즐비한 고층 빌딩, 거대한 호수와 빽빽한 잔디. 그 틈틈이. 제 인생 사방에 침투한 이재현 같다.
별 거 없이, 엿 같단 뜻이다.
태양의 도시라는 플로리다. 그 중남부 내륙 도시인 올랜도에는 해외지부 센터가 있다. 일면 휴양지라 불리는 곳이다. 복지 그 자체라 불리는 올랜도 센터는 매년 지원 의사 내보이는 요원들은 많다만 막상 티오가 나지 않는 게 유일한 문제점이었다. 그리고 찬 바람 불기 시작하는 초겨울 12월, 주연은 느닷없이 환상과 꿈의 센터인 플로리다 지부로 발령을 받게 된다. 갑작스러운 단기 파견이었다. 그 통보 받는 순간에, 주연은 꼭 사형선고 받는 것처럼 꼭 암담한 얼굴을 못 숨겼다. 왜 저런 꼴을 하나 의문하다가도, 불쑥 플로리다 지부장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면 짧은 탄성과 함께 일순간 수긍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 센터장이 이재현? 사이 개판 났다던 그 둘?
“뭘 또 그렇게 야려. 귀엽게.”
남들 찬사 늘어놓는 예쁜 외모 따윈 어느 순간부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주연에겐 살의 참기가 꽤 어렵다. 이름 석 자 박힌 잘난 명패 앞에 박아두고 널찍한 책상 앞에 앉아 하는 짓이라곤 시시껄렁한 농담 따먹기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잔뜩 화가 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주연을 발견하기 무섭게 그제야 지루한 일상 끝내줄 흥미로운 장난감 찾아낸 것처럼 키득키득 웃어댄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세기의 센티넬 소리 들으며 현장을 누볐는지 의문하게 될 만큼.
물론 주연도 센터에서 모르는 이 없다는 이재현을 대단히 흠모한 적 있다. 당연한 수순이다. 센티넬의 동경 대상이야 잘난 센티넬 밖엔 더 없다. 현장에서 물러나 센터 내 요직으로 들어앉는다는 소식에 꼭 제 일처럼 아쉬워한 요원들이 꽤 많았다던가. 이재현이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라는 게 그렇다. 한창 활발히 현장을 뛰고 있는 현직 요원들조차 이재현 발끝에도 못 미친다는 의견이 중론이다. 매사 유유자적한 태도로 격 없이 지내다가도 타고난 능력치 즐기며 현장 누빌 땐 범접하기 어려운 게 이재현 자질이고.
“죽고 싶어요?”
그러니까 지금의 주연은, 언젠가 자신의 시야를 통째로 뒤흔들었던 어느 날의 태양 같은 건 이제 모르겠다.
“주연이 손에 죽으면 호상이지.“
단지 미친개라면 또 모를까.
“무전으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어요.”
“난 주연이가 이렇게 진지하게 화낼 때가 좋더라.”
이런 일방적인 대화는 일상이 됐다. 저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는 재현과 대화할 때면 매번 상식적인 소통을 포기하게 된다만, 결국 말려드는 건 이주연이라면 수시로 선을 넘는 이재현 때문이다. 두 눈을 마구 반짝이면서. 그럴 때마다 주연의 기분은 뒤지게 더러워진다. 단지 맹수의 놀잇감 신세로 전락한 꼴이다. 그러니 쉬이 화내지 않는 이주연도 이재현의 앞이라면 시도 때도 없이 이를 악물게 되는 것이다. 재현은 그런 주연의 반응을 여태 기다렸다는 듯이 집요히 기색을 살핀다. 너 지금 내 말에 반응했어?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가이딩 얘기할 때마다 이렇게 과민반응을 하는데 어떻게 참아.“
그리고는 순식간에 입 닥치게 만드는 재주를 부린다.
무전으로 장난질 치는 거야 단지 기분 더러운 수준으로 끝낼 수 있다. 이재현은 왜 그 좆같은 장난을 다수의 눈과 귀가 알게 하는가, 의문하고 미친개한테 물렸다며 욕지거리 한번 씹어주면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가 짐승 같은 섹스를 하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너한테 가이딩을 해줄 수 있는 센티넬이라, 마침 네가 가이딩이 필요한 센티넬이라. 그래서 해주겠다니까 네가 싫다며.”
“……."
“거절당한 건 난데 왜 네가 수치스러워하냐? 진짜 억울하다.”
재현의 말마디에 숨통이 조여오는 순간이 있다. 눈이 핑 돌아버리는 찰나.
“…….”
“뭐냐. 나 지금 죽이려구?“
재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연의 발끝이 지면에 맞닿는다. 그제야 이재현 말마디에 분노한 이주연의 발이 허공에 찰나 떠있던 걸 알았다. 재현은 그냥 웃었다. 꽉 틀어쥔 주먹을 보고도 그냥.
“막말을 하면 병신처럼 입 꾹 다물지 말고 지랄을 좀 해. 맘 아프니까.”
나는 항상 네가 걱정돼. 편히 의자에 앉아 다리 꼰 채 싱글벙글 웃으며 소속 요원 걱정하는 센터장 흉내를 낸다. 개소리. 세상에 저 병신 취급하는 건 이재현밖에 없다. 주연은 별다른 대응 없이 방을 나선다. 주연은 항상 생각한다. 제가 사는 나날의 매 순간 과제는 재현을 향한 살의를 참는 것이라고.
역린이다. 센티넬 이주연에게 가이딩이라는 건.
너같이 능력 타고난 센티넬이 어딨냐. 그런데 가이드가 없잖아.
한편 센터의 기대주가 되었다가도, 또 한편 난제가 됐다. 이주연이 여태 참전한 전투에 있어서 단 한 번이라도 실망스러웠던 적이 있던가. 온갖 다양한 능력 가진 센티넬로 가득한 중앙센터 소속 요원 중에서도 공중에서 똑바로 설 줄 아는 센티넬은 주연이 유일했다. 제 의지대로 기류를 조종해 상공을 날고 자유로이 몸을 쓸 줄 알았다. 전에 없던 유별난 능력이다.
하지만 상성 맞는 가이드가 단 하나도 없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무슨 짓을 해도 적합한 가이드를 못 찾았다. 센터에 등록된 가이드 중에 이주연이랑 키스 내지는 섹스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손을 잡고 맨살을 맞대고 혀를 섞고 끝내 박고 박혀도 가이딩 수치가 오르질 않았다. 아랫도리가 얼얼해도 가이드 찾는 일은 그만하고 싶단 말은 끝내 못했다. 전투에 나서지 못하는 센티넬은 곧 죽어도 싫어서. 가이드 찾는 일은 잠시 멈추자는 의료진을 굳이 설득해 맨몸으로 새로운 가이드를 받았다. 잘 안될 줄 알고있었어요. 참담한 마음 추스르기도 전에 꼭 개의치 않는 체를 했다. 박살난 자존심은 그렇게 챙겼다.
수치가 떨어질수록 감각은 정도 없이 기민해지고 동시에 가이딩은 갈급해진다. 통상적인 매칭 효율이 80% 내외 수준이라면 주연은 그 절반 수준에 가까운 가이드를 설득해 자진해 다리를 벌렸다. 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대부분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고 나면 미약한 두통만이 남는다.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합리화할 즈음,
주연은 센터에 새롭게 등록한 가이드 한 명을 만나게 된다. 매칭률 55%. 절반을 넘어섰으니 이 정도도 충분했다. 제법 거구의 상대를 염려하는 시선도 있었으나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바닥 뚫고 지하까지 떨어지던 제 삶을 구출해낸 구원자다. 짓궂은 데가 있는 놈의 요구에 맨정신으로는 절대 못 할 체위도 기꺼이 수용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형은 자존심도 없어요?’
제 속을 살살 긁으려 들어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너 오기 전까진 매일 다른 사람이랑 잤는데….’
‘뭐야, 형 걸레에요?’
그러다 정도 모르고 개소리 지껄이면 한 손으로 가볍게 목 한번 조르면 그만이었다. 형 저 이재현 팀장님한테 집합 당했어요. 눈치 빠른 이재현이 신입 군기 잡는다는 명목으로 뒤지게 굴릴 것도 알았고. 어쨌든 살만했단 뜻이다. 현장에 나가 무리해도 큰 걱정이 없었다. 안정감이었다. 완벽하진 않아도 가이드라는 게 있다는 사실이 퍽 든든했고. 작전에 나가 체력 고갈 직전까지 구르다 와 모든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지는 순간에도 숨 트일 구석이 있다는 게 또 좋았다. 다들 이렇게 살고 있던 거였어? 커다란 몸뚱이를 하고도 꼭 대형견 노릇 하는 것도 나름 귀여운 구석이 있었고. 그러니 주연에게 꽤 괜찮은 삶이 도래한 것이다.
쉬이 웃지 않던 주연의 안면에 웃음기가 만연해졌다. 주연은 재현 앞에서 꼭 그렇게 웃었다. 정상궤도 안에 들어선 자신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하지만 주연은 또 다시 가이드를 잃는다. 그 대형견이 반란군 소속 스파이라고 했다. 팀장이었던 이재현은 그걸 알고 있었다고. 그러나, 이주연 맘 놓고 제 세상인 듯 이리저리 뛰어노는 게 간만에 숨통 트여 보여서 지켜만 보고 있었다고. 이재현 시말서 쓰는 동안 이주연은 제 숨통 붙여준 가이드를 제 손으로 처리했다. 팀장 이재현의 강경한 명령이었다.
감정 배제한 채로 수시로 살을 맞댔던, 그러나 크게 의지하고 있던 숨통을 제 손으로 끊어냈다. 시뻘건 피 토하며 찬바닥을 굴렀던가. 눈물 질질 흘리며 망연히 지켜보기만 했다. 확인사살의 마지막 총성. 그즈음. 최초이자 마지막 폭주를 경험하게 된다. 이성이 저당 잡히고 초월 그 어느 힘을 본능에 지배당하는 것. 공중에 솟아올라 불특정 무언가를 파괴하는 일에 여념이 없게 되는 불현듯의 연속. 그 끝에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원망은 재현에게로 꽂힌다. 건조한 두 눈으로 끊임없이 노려봤다. 내가 여태 의지한 게 빌어먹을 반란군이라 처치해야 하는 건 알겠어요. 근데 왜 그 사람 보내는 게 나여야 해요. 도망치는 뒤통수를 내 두 눈으로 찾아내고, 끝내 내 손으로 처치하고. 일순간 난 악마 새끼가 돼서 정신이 나가고. 내 중심을 잡아주던 사람이 피를 낭자하게 흘리며 싸늘히 죽어가는 걸 봤어요. 내 손으로 그를 죽였어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목구멍이 턱하니 막혔다. 혀끝에 원망 한마디 못 올렸다. 가까스로 내뱉은 말은 겨우 한마디다.
‘저 이제 가이드 없어요…….’
주연의 삶은 그를 만나기 이전으로 되돌아간다.
가이딩 수치가 바닥에 치달았을 때가 되어야 안면 없는 가이드들을 전전하며 가까스로 맨살을 맞대는 나날. 생존을 위한 구걸이다. 이따금 끔찍한 통증 안고 버텼다. 때마다 눈을 뜨고 감아도 영영 잊히질 않는 현장에 살았다. 저를 살리고자 눈앞에 나타나, 끝내 제 손에 죽어야 했던 그의 인영을 지우지 못하면서.
이건 일종의 죄책감이다. 절대 지워지지 않는 선명한 기억들. 재현은 잊으라고만 했다. 그는 반란군 스파이일 뿐이고, 네게 적합한 가이드 역시 아니었다고. 죄책감 따위 가질 필요 없다고. 언젠간 그가 먼저 주연을 죽였을 거라고 했다. 주연은 그러지 못하겠다고 했다. 되려 재현을 탓했다. 재현은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잊으라고 종용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내 삶이 얼마나 괴로운지 모르면서. 지리멸렬한 삶을 어떻게 겨우 이어오고 있는지 모르면서. 난 자주 불면증에 시달리고, 이따금 악몽에 잠을 찢겨요. 눈을 감아도 고통 속에 죽어가는 그의 얼굴이 떠올라서. 몸을 뒤틀며 피를 토하는 현장이 눈에 막혀서.
이재현이랑 가이딩은 곧 죽어도 싫다. 이재현 의도대로 움직이는 건 유일한 가이드를 제 손으로 죽인 일로 족하다. 모든 것이 이재현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인생에 철저한 방해물이 될 것이다.
‘뭐야, 형 걸레에요?’
눈을 질끈 감는다.
증오가 삶의 원동력인 지금. 이주연, 여전히 시궁창에 있다.
간밤에 불면증에 시달렸다. 깨질듯한 편두통은 덤이다. 약 몇개 뜯어 때려먹어도 도저히 진정할 줄 모르는 두통에 앞으로 한 발 내딛기도 힘든 지경이 됐다. 무거운 몸 겨우 일으켜 충혈된 두 눈을 하고 센터로 발길을 옮긴다. 이곳엔 이미 크리스마스가 당도했다. 테이블 위엔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놓여있다. 내일이 크리스마스란다. 센터에서 모든 요원에게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돌렸다고. 캐롤 흥얼거리며 인사하는 사람들 안면이 상기되어 있다. 12월 1일, 플로리다 지부 첫 출근길에 센터 프론트 앞에서 봤던 커다란 트리보며 조만간 크리스마스 오겠단 자각은 했다만 어쩐지 시간이 생각보다 더 쏜살같이 흘러갔다.
다시 말하면 지난 3주간 가이딩 없이 버텨왔단 뜻이 된다. 간밤의 불면증이나 멈출 줄 모르는 두통이 모두 다 이해되는 대목이고.
“주연, 메리 크리스마스.”
그래서 지금 당장 저 잘난 낯짝 상대할 기운은 더더욱 없다.
주연의 방문 빼꼼히 열고 내뱉는 인사가 제법 명랑하다. 이 상황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차라리 당장 혀라도 깨물어 뒤지는 게 나을 지경이다.
“케이크 잘 받았어?”
너 주려고 센터에 다 돌렸다. 너만 주면 안 받을 거잖아. 차라리 모르는 게 더 나았을 에피소드까지 곁들인다. 이재현이 이주연 별나게 챙기려 드는 게 한두 번인가. 이주연 플로리다 발령받기 무섭게 이재현이 센터에 케이크 돌림. 이미 바다 건너 서울까지 소문은 다 퍼져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케이크, 이주연이 이재현 면상에 내던졌단다. 어쩌면 헛소문도 함께 따라붙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주연은 재현을 못 본 체 입 꾹 닫고 지나치려 들지만, 이내 손목을 붙들리는 것으로 외면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콱 틀어잡힌 손목에서 찌릿한 전율이 사방에 뻗친다. 씨발. 절로 튀어나오는 욕지기는 못참았다. 가이딩 시도하는 이재현이 또 더없이 개 같아져서.
“너 지금 동태눈깔 됐다. 그래도 싫다고?”
대번에 손목부터 빼고 본다. 반사적으로 주연의 몸이 휘청한다. 정신 다잡고 습관처럼 재현의 말은 개무시로 대응한다. 하지만 이런 개무시가 역시나 익숙한 재현은 주연을 쉬이 보낸 적이 없고 기어이 통신기를 들어,
“이 시간부로 TF팀 이주연 팀장의 가이딩 수치가 정상범주로 돌아오기 전까지 센터 내 크리스마스와 연말은 없습니다. 지친 동료를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가이딩 수치 정상화를 기원합시다.”
센터 내 전관방송을 통해 기함에 찰 소리를 잘도 지껄인다. 건물 내 재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하고 주연의 낯빛은 사색이 된다. 끝내 재현의 멱살을 틀어쥐는 하극상을 범할 만큼.
“돌았어요?”
“목숨줄 저당 잡히면서까지 가이딩 피하는 게 나 때문이야?”
“그건 또 무슨 개소리인데요.”
“넌 데려온 가이드가 따로 없고, 우리 센터에서 가이드를 받아야하는데. 그게 나일까봐 겁먹은 거잖아.”
“…….”
“그런데 그런 말도 있지.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순간, 시야는 암전된다. 사방의 조명이 죄다 꺼졌다. 주연이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있는 총을 집어들었다. 소란스러운 문밖과 달리 방 안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하다. 주연이 재빠르게 탄환을 장전하려 들기 무섭게 발에 손목을 채이고 총을 빼앗겼다. 이런 민첩함이라면 상대는 뻔하다. 주연이 지면에서 발을 떼기 무섭게 발목이 붙들렸다. 손바닥 닿은 대로 찌릿한 감각이 퍼지고 내리 주연을 괴롭히고 있던 두통이 미미해진다. 더 이상 허공에 뜨지 못하는 몸은 추락한다. 순식간에 팔을 제압당하고, 엎어진 주연의 등 뒤로 묵직한 무게감이 인다. 이내 손끝이 목덜미를 스치는 감각에 몸을 떨었다.
“씨발, 장난 그만 해요.”
말 한마디에 여태 꺼져있던 조명에 불이 들어온다. 재현은 퍽 진지한 눈으로 주연의 목덜미를 응시했다.
“칩 이식 아직 안 했네?”
“가이드 없는 센티넬이 어떻게 고위험군 센티넬이 됩니까.”
“잘됐네. 정부 개노릇은 너도 싫잖아.”
재현이 맞는 소릴 해도 고개 한번 끄덕여줄 생각 없다. 재현을 밀어내려 몸을 틀어 눈을 마주보기 무섭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 순간에도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실실 쳐웃고 있는 꼴이 열 받는다. 이내 하얀 손이 주연의 눈을 틀어막고, 목덜미 위로 입술을 맞춘다. 차단된 시야로 감각이 보다 선연하게 뻗친다. 주연은 황급히 허리를 비틀었다. 재현은 벗어나려 발버둥을 치는 몸뚱이 위에 올라탄 채로 머래채를 잡아누르며 머리통을 고정한다. 대리석 맨바닥에 붙은 얼굴이 시리다. 주연은 이만 바득바득 갈아댔다. 꼼짝없이 붙들려 제압당한 채다. 이렇게 힘에 밀려 무기력했던 적은 또 처음이라 욕지거리 참기가 고단하다. 그걸 입밖으로 내뱉는 것조차 자존심 상할 정도로.
“난 센터장이고, 내 소속 요원들 상태 관리할 의무가 있고. 넌 국가의 자산이잖아.”
“꺼져요…. 내려오라고요.”
“네 상태가 지금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는데 이걸 그냥 놔두는 것도 직무유기 아니겠냐.”
바지 안으로 단정히 정리해둔 셔츠 밑단을 하얀 손이 파고든다. 유독 가는 허리춤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쓸어올린다. 이 씨발, 미친새끼…. 센티넬 능력을 배제하고도 단지 힘으로 이재현 이길 사람 없다는 말은 단지 헛소문이 아니라는 듯 힘에 억눌려 늘씬한 몸 아래에서 빠져나오기가 고단하다. 맨몸 지분거리는 손길 붙들고 제발 그만하라 애원하고 싶어진다. 어쩌면 더 만져달라고 사정하거나. 꾹 다문 잇새로 끙끙 앓는 소리 참는데만 주력했다. 파르르 떨리는 제 몸뚱이를 자각도 못 하고.
“쓰레기 될 뻔했다. 억지로 할 뻔.”
“개쓰레기짓인 거 알면 내려와요.”
“개쓰레기라고는 말 않았는데….”
나랑 하는 게 그렇게 싫으냐……. 억울한 듯 웅얼댄다. 이내 주연의 손목을 결박하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진다. 몸을 짓누르던 무게감이 사라지기 무섭게 주연은 재현의 발목을 잡아챈다. 일순간 휘청인 재현은 곧장 중심을 잡고 바로 선다. 그 와중에도 저 안 넘어졌단 걸 자랑이라도 하듯 웃어댄다. 그리고는 끝내 이주연 속 뒤집는 소리 내뱉는 것이다.
“근데 주연. 지금 네 볼 빨개.”
이럴 땐 진심으로 주먹을 갈기고 싶어진다.
쫓아내듯 재현을 내보낸 주연은 흐트러진 옷매무새 정리하던 중 다급한 무전을 하나 듣게 된다.
-“팀장님. 지금 센터 출입구 봉쇄됐습니다. 요원들 휴가 다 막혀서 복귀 준비 중이라는데요. 센터장님 지시랍니다.”
이 미친놈이…….
생김새와 다르게 한없이 순하다는 평가를 받는 반면, 주연은 주관이 확고해 자기고집이 있었다. 제 머리로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 있다면 제 결심 번복하는 법이 없었다. 하필 쉬이 지고 들어가는 법이 없는 이재현을 상사로 만나 설전 벌이는 일도 허다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의견 굽힌 쪽은 재현이다. 재현은 동생뻘에게 유달리 너그러웠고, 이주연이라면 유별났다.
그런데 이토록 결정적인 순간마다 이재현이 제 고집을 꺾지 않는다.
“초딩이에요?”
“웅. 유치한 방식 좋아해. 최고야.”
“다른 사람들 끌어들이는 건 선 넘었죠.”
“그건 그래. 근데 어쨌든 네 발로 왔잖아.”
재수없다. 영민한 머리로 미친짓을 잘도 한다. 기어이 주연 스스로 제 방에 찾아오게 만들어놓고 뻔뻔스러운 말마디로 끊임없이 도발한다. 도대체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된다. 죽어도 싫다는 가이딩을 끝끝내 종용하는 이유는 뭔가. 이젠 지긋지긋하다 느낄 지경이다.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너보다 계급이 위인 게 새삼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
“너 날 당장이라도 죽일 듯이 쳐다보고 있잖아.”
그랬겠지. 굳이 거울에 비추어보지 않아도 제 표정쯤이야 예상할 수 있다. 그래서 어쩌라고, 가 주연의 감상이다. 재현 역시 저 마음 먹은 일 곧 죽어도 고수할 기세다. 차라리 미안할 일 없어 다행인 일이다.
“형 진짜 못됐어요. 알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응. 알아.”
“그래서 난 형 죽이고 싶다는 생각만 해요.”
“그래. 그것도 알아.”
재현은 무언가 깊게 골몰한다. 말을 고르듯이 한참 입술을 달싹였다. 답지않게 진중한 얼굴을 하고.
“주연아. 나는 너 살릴 생각만 해.”
이 말이 진심이라는 걸 모르면 그건 병신이다.
“형은 진짜 못됐다고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술을 먹혔다. 벌어진 입술 새로 혀끝이 밀려들어 온다. 재현의 손이 가는 허리에 감기고 주연은 주먹만 틀어쥐었다. 맞닿은 혀가 끈덕지게 빨렸다. 주연은 무방비하다. 분명 도로 단정히 정리해둔 셔츠 밑단이 다시 어지럽혀지고 차가운 손끝이 살갗에 닿는다. 아흐, 씨…. 끝내 못 참은 욕지기를 굳이 육성으로 내뱉는다. 입술 떼어낼 생각 없는 이재현은 뜨거운 입안 헤집는 데 여념 없다. 이제껏 살아보겠다고 수십 명 입술을 물고 빨았다. 그러나 이렇게 손끝 저릿한 감각을 느껴본 적 있나. 무릎을 세워 아랫도리 자극하는 걸 못 떨쳐냈다. 쪽팔려 뒤지겠다. 먹구름 걷히듯 개운해지는 감각이 좋은 걸 부정 못 했다. 상쾌한 기분과 공존하는 저릿한 전율에 하릴없이 숨만 헐떡였다. 끝내 재현의 목덜미에 매달려 절박하게 젖은 혀끝을 갈구한다. 그러다 문득 재현은 단단한 팔로 주연의 몸을 끌어안았다. 으스러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힘껏.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로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그때, 주연은 조금 울고 싶어진다.
꼭 어리바리한 얼굴로 센터에 처음 입성하던 주연을 꼬맹이 취급하며 손잡고 이끌던 그 날부터, 이재현은 꼭 키다리 아저씨 노릇을 해댔다. 겨우 한 살 차이가 고작이면서. 때문에 재현이 꼭 제 인생의 기둥 같았던 나날이 있었다. 이재현 한 사람이 제 삶에서 사라진다면, 여태 힘겹게 구축해놓은 제 세상이 일순간 몽땅 쏟아져 내려 산산이 조각날 것만 같았다.
재현이 제 팀장이 아니어서 불가항력의 지시를 따를 필요가 없었다면. 그래서 재현을 힐난할 사건도 벌어지지 않았다면. 온갖 가이드 전전하며 동냥하지 않고 재현, 한 사람만을 기대며 전진할 수 있었을까. 살 맞대는 일이 어색하다는 이유로 마음에도 없는 욕지거리나 내뱉으면서, 그렇게 꼭 제 인생의 가이드인 양 굴면서. 영원을 약속하면서 동행하고 싶었던 때가 있었는데.
모르겠다.
‘이주연. 플로리다 지원 다녀와. TF팀 팀장은 네가 맡는다.’
기꺼이 작전을 쥐고 플로리다로 넘어왔던 이유만을 생각한다.
올랜도 프로젝트 타겟. 플로리다 지부 센터장 이재현.
그러나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 눈앞이 아득할 때가 있다.
소란이 의국까지 당도한 모양인지, 주연이 의국 출입문을 열기 무섭게 의료진 여럿이 아는 체를 하며 바투 붙어섰다. 대면하기 힘든 주연을 이끌어 진료를 시작하고, 이내 명료히 진단한다.
“센터에 처음 전입 왔을 때보다도 훨씬 안정적이네요. 가이딩 받고 오셨어요?”
센터 간 요원들의 생체정보를 공유하고 있으니 주연에게 가이딩을 한 그 상대가 누구인지 모를리 없다. 같은 센티넬을 상대로 가장 높은 가이딩 효율을 가지고 있는 센티넬은 이주연이 유일하고, 유사 가이딩 능력을 타고난 센티넬은 이재현밖에 없다.
귓전에 재현이 내뱉은 말이 이리저리 산만하게 맴돈다.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말마디가.
인정하면 쉬워. 너는 내가 필요해.
이건 진짜로 좀, 자존심 상한다.
전장에서 정신을 잃은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제 손으로 가이드를 처치해야 했던 폭주의 날. 까무룩 정신을 잃었던 주연은 장장 이틀이 지나고서야 눈을 떴다. 지긋지긋한 천장을 마주보고 제가 드러누워 있는 곳이 가이딩룸이라는 걸 알았을 때 주연은 덜컥 겁이 났다. 이상할 만치 몸이 개운했다. 여태 어떤 가이딩도 이런 산뜻함은 없었다. 말이 안 됐다. 폭주 이후에 가이딩을 받지 않는 이상 이런 안정적인 감각을 되찾는 경우는 전례가 없었다. 합리적인 추론은 이랬다.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 수많은 가이드가 왔다 갔나? 난 또 몽롱한 정신에 병신처럼 몸을 내줬나. 그러나 정도 없이 구겨지는 자존심 따위는 쉬이 잊었다. 불현듯 제 손으로 목숨줄 끊어낸 가이드가 떠오른 것이다. 죽었다. 내 손으로 그를 죽였기 때문에. 끝내 내가 그를 죽이고 만 것이다.
그때, 주연에게로 뜬금없는 이름 하나가 튄다.
‘이재현 어땠는지 아냐? 걔 그냥 반병신이었어.’
주연이 추락하던 순간. 다른 이가 먼저 손 쓸 틈도 없이 주연에게 달려간 이가 있다고 했다. 재현이었다. 그렇게 사색이 된 얼굴은 여태 본 적이 없다고. 유혈 낭자한 현장에서도 여유로움 잃지 않고 전장을 누비던 이재현이 그렇게 하얗게 질린 얼굴은 할 줄 몰랐다고. 다급한 발걸음으로 의국을 찾은 재현은 단지 살려달라고만 울부짖었다고 했다. 축 늘어진 몸뚱이를 힘껏 붙든 채로. 꼭 순정 상실한 소년처럼 목놓아 울면서.
마땅한 가이드가 없는 주연의 상황에 전전긍긍하던 사이,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에 센터가 들썩인다. 이재현이 이주연을 데리고 센터로 복귀하던 중 맞닿은 살결, 고작 그 접촉에 센티넬 간의 가이딩이 됐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이주연이 겪어온 수많은 가이딩 수치보다 훨씬 웃도는 수준이었다. 끝내 이재현 순정이 결국 기행을 내보였다고 했다. 그 소리에 주연은 코웃음 쳤다.
의국 소속 박사는 센티넬이 센티넬을 가이딩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서 연구하고자 했지만 결국 없던 일이 됐다. 주연이 재현의 가이딩을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이다.
‘단지 살결을 맞대는 것 이상의 가이딩을 받을 수 있게 된다면 일상적으로 겪는 통증은 아예 남일이 될 수 있는데도요.’
주연은 끝내 거절했다. 그 또렷해진 정신으로 다만 생각했다. 이주연 손에 비참히 죽어야만 했던 동료, 걸레 소리 들을 만치 가이딩을 위해 헤매는 삶. 그리고 그것을 지시한 이재현. 잔인하고 명확한 사실 앞에서 주연은 차라리 재현을 탓하기로 한 것이다.
“저녁 먹어요.”
어쩌면 잘된 일이다.
“티본스테이크든, 와플 아이스크림이든. 먹자고요.”
제 인생 구렁텅이에 도로 쑤셔놓은 이재현을 제 손으로 정리할 수 있다니. 이 작전에 이주연만한 적임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2023년의 마지막 날에 주연은 저녁 식사를 초대받는다. 저녁 제안은 주연이 먼저 했다. 재현은 기꺼이 승낙했다. 재현은 제가 머무는 숙소에서 직접 스테이크를 구워주겠다며 주연을 초대했다. 주연은 레드와인 한 병을 챙겼다. 그 시절 이따금 즐겨 먹었던 와인이다. 현관문을 열어준 재현은 와인을 들고 서있는 주연을 보자마자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주연아. 그거 나도 사놨잖아. 다 큰 성인을 앞에 두고 꼭 어린애 보듯 화사한 얼굴로. 주연은 무심한 얼굴로 코트 주머니 안을 만지작거렸다. 재현에게 착용시킬 구속구가 있었다. 센터로부터 전달받은 것이다. 전면전으로 대적하기엔 무리가 있으니 재현이 방심한 순간 신속하게 처리해야 한다. 재현은 주연의 방문이 그저 기쁘다고만 했다.
“예전엔 곧잘 이렇게 음식도 해 먹었는데. 너 요리하는 거 좋아했잖아.”
“이젠 안 해요, 그런 거.”
“네 몸은 네가 챙겨야지. 잠도 못 자는 거 같은데.”
진심 그득히 묻은 다정에 주연은 체할 것 같았다. 쉬이 잊지 못하는 처참하고 잔혹한 현장. 그리고 간헐적인 자살충동. 쏟을 눈물이 모자라 다 울지도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내려놓았던가.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의국에 나타나, 죽지 않을 정도로만 가이딩을 하고 떠난다. 그런 이주연 포기한 사람이 여럿이다. 그런데 재현은 주연을 걱정한다. 언제나 한결같이. 절벽에서 떠밀리던 순간 등 뒤엔 분명히 재현이 있었던 것만 같은데.
“올랜도는 와보니까 어때. 디즈니월드 관심 있어? 같이 갈래?”
“제가 왜 센터장님이랑 갑니까.”
“나랑 가자. 맛집 많이 알아. 사진도 찍고. 그렇게 나랑 놀아.”
주연은 속없이 미래 계획이나 세우고 있는 재현을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했다. 내일이면 재현은 주연의 손에 포박되어 서울로 이송되고 있을 것이다. 목에는 구속구를 찬 채로. 디즈니월드나 맛집 같은 건 한순간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계획대로라면 이재현은 다신 플로리다 땅을 못 밟는다. 그렇게 이재현을 향한 이주연의 복수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것이고. 꼭 그렇게 될 것이다.
“난 우리가 잘 지냈으면 해.”
“…….”
“우리 좋았잖아.”
재현의 말을 부정할 수 있나. 이재현 하면 이주연. 이주연하면 이재현이 곧장 따라붙는 때가 있었다. 그러니 이재현은 이주연에게 흉터 같은 거다. 아무리 애를 써도 영영 지워지지 않을 상처. 볼 때마다 관성처럼 꼬리 물고 떠오르는 기억 탓에 기분 엿같아지지만, 결국 자신의 한 부분이 된 것.
누구보다 미워하기 싫었다. 이재현 증오하게 된 사실이 괴로울 만큼. 그게 너무 분해서 눈물 찔찔 흘린 나날도 있다. 차라리 온 세상 비난받는 나쁜 놈이라 저 역시 그를 힐난해도 무리 없었으면 좋겠다고 바란 적도 있다. 이재현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게 하필 이주연이라.
“기억 안 나요.”
그러나 선을 그어본다. 재현의 말마디에 떠오르는 수많은 추억을 부정해보려는 방어기제 같은 거다. 다 구운 스테이크를 주연의 앞에 내려놓은 재현이 멈춰섰다. 가만 주연을 내려다보며 또다시,
“너는 나를 너무 모르더라. 모르는 척 하는 건지. 난 정말 네 걱정만 하는데.”
“그런 사람이 저한테 그럴 순 없어요.”
“내가 뭘 했는데.”
“…….”
“아직도 그 가이드 죽이라고 한 말이 미워죽겠나 보네.”
목구멍에 자갈이 낀 것같이 까끌까끌하다. 도저히 말 한마디가 나오질 않았다. 주연은 여전히 악몽 속을 거닐고 있는데, 재현은 계속 아니라고만 한다. 그럼 그 잔인한 기억을 선사한 이는 누구인가. 재현의 입에서 그의 이야기가 나오는 걸 못 참겠다. 자신의 매일을 의지하고 있던 안정적인 나날이 순식간에 산산이 조각난 그 날. 급기야 제 손으로 모든 것을 정리해야 했던 그 날의 일을 무심히 내뱉는 재현을.
“닥쳐요.”
“너 여리잖아. 특히 동정심 많은 게 문제고.”
“…….”
“넌 영리한 놈인데 그 가이드를 끝끝내 동정하면 네가 위험한 걸 몰라, 왜.”
재현은 그저 동정심이란 말로 일축한다. 무시하면 그만인데, 그게 또 안되는 날이 있다. 병신같이 잘만 입 다물고 지내다가도, 어쩐지 끝도 없이 기어오르고 싶은 날.
“굳이 죽일 필요는 없었어요. 그게 나일 필요도 없었고.”
“정부는 그렇게 생각 안 해. 반란군이랑 긴밀한 관계였던 이주연 정도겠지. 가만히 둘 리가 없었어.”
“적당히 타협할 수 있었어요.”
“반란군 첩자였어. 그런데도 과해?“
이게 문제다. 지난 행적 일시에 지워버리고 반란군 꼬리표 하나 달랑 매단 채로 그의 얼굴도 이름도 벅벅 지워버리는 것. 유달리 재현만 그랬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사람 취급을 했다. 이런 잔인함도 순정이라 할 수 있나. 주연은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위선 떨지 말고 관심 꺼요.”
“못해. 너한테 관심 끄는 게 됐으면 진작 손 놓고 너 죽을 날 받아놓고 있었어.”
“내가 그걸 바란다는 생각은 안하고요?”
재현은 전에 없던 살벌한 눈을 뜨고 있었다. 이재현은 이주연이라면 끝도 없이 너그러워지는 주제에, 또 이주연이라면 못 참는다.
“넌 살려달라는 말을 그렇게 해.”
또 주연을 간파하고 있다는 듯이 굴고,
“매번 넌 스스로 극한으로 몰아놓고 죽기 직전에 날 찾아와서 널 살려달라고 해.”
“…….”
“이것 봐. 날 그렇게 죽이겠다고 하면서 막상 아무것도 안 하잖아, 너는.”
끝내 속을 꿰뚫고,
“올랜도 프로젝트. 모두 네가 나한테 달려들 거라고 했을 때, 난 네가 실패할 줄 알고 있었어.”
재현이 분명 알고 있지 못했어야 할 작전명을 혀끝에 올린다.
순간 목덜미에 닿는 차가운 금속성을 느낀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암전된 시야를 깨닫는 것은 그 이후다.
주연은 암흑 속에서 긴 팔을 뻗어 재현의 팔뚝을 붙들어 잡아챘다. 이내 팔이 꺾이고 다시 재현에게 제압당한다. 벗어나려 해도 쉽게 붕 뜨던 몸뚱이는 제 마음대로 제어가 되질 않는다. 발목에 묵직한 추를 달고 있는 것처럼 발바닥이 바닥에 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제 목에 감겨 센티넬 능력을 제어하고 있는 구속구 때문이다. 어찌할 도리도 없이 손 놓고 당했다는 뜻이다. 주연은 마지막 발악처럼 몸을 비틀었다. 있는 힘껏 주연을 틀어쥐고 있는 재현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육탄전이라면 재현을 이길 사람이 없었다. 재현 역시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힘을 통제당한 자신의 상황을 알면서도. 그러니 이건 절대 이길 수 없는 게임이다.
“내가 그랬지. 난 네가 걱정된다고.”
굳이 널 나한테 보낸 이유를 넌 아직도 모르지. 나한테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너뿐이라면, 널 제압할 수 있는 상대는 나밖에 없고. 그러니까 목표물은 내가 아니라 너란 거야. 사실 상관없겠지. 넌 그냥 날 보러 온 거잖아. 그래서 이렇게 손 쓸 틈도 없이 넌 당하고. 맥없이 풀린 동공으로 날 응시하고. 차라리 자유로운 듯.
“나는 널 어디로든 떠나보내지 않아.”
그리고 밝아진 시야 앞에서, 눈부시고 아름다운 얼굴로 선언하는 것이다.
너의 삶은 다만 내 것이라고.
주연은 문득 온몸에서 힘을 뺐다. 이상한 일이다. 목에 감긴 묵직한 구속구는 분명 저를 속박하고 있는데, 여태 저를 괴롭히던 두통은 완전히 사라졌음을 느낀다. 밀려오는 안도감에 견딜 수가 없어졌다. 결박된 손목, 제 몸뚱이를 짓누르는 무게감. 그리고 맞닿은 살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