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연은 탱탱볼 인간이다. 쥐면 말라고 들면 단단하다. 비비면 뻑뻑하지만 한없이 둥글다. 막 던지면 아무 방향으로나 다시 튀어 오른다. 모서리에 맞아도 패이거나 쪼개지지 않는다. 먼지가 쉽게 묻지만, 성질은 바뀌지 않는다. 외압에 저항하지 않고 날아간다. 그 끝에 뾰족한 모서리가 있더라도 어차피 잠깐 아프고 말 테니까. 그러나 다시 튀어 오를 땐 그 위치를 아무도 오른다. 그래서 종착지는 가끔 누군가의 눈탱이가 되곤 한다. 고의성 없는 사고뭉치 탱탱볼 이주연은 때려놓고 태연하게 바닥으로 떨어진다. 화풀이로 짓밟는데도 잠깐 밟히다가 말 테니까.
톨톨톨톨.
힘없이 굴러가는 이주연은 이재현이 집어 든다. 왼쪽 눈탱이에 시퍼런 멍자국 단 채로. 너냐? 꼬깔콘 인간 이재현은 서럽다. 맞은 눈탱이 보다도 뾰족한 각을 가진 자신이 각도 없이 동그란 이주연에게 얻어맞은 현실이 더 아프다. 한 줄 사과도 없이 눈동자만 굴리는 이주연의 태도에 이재현은 그만 울컥한다. 이주연은 이재현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다. 어느 한 사람의 손에 갇히는 삶은 싫다. 모서리에 꼭 맞아 엉엉 울게 되더라도 허공을 힘껏 날아오르고 싶다.
이재현은 이주연을 던지고 싶다. 이주연이라는 탱탱볼을 던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벙하게 서 있다가 탱탱볼에 맞은 사람 말고 탱탱볼을 마음껏 던진 권한을 가지고 싶다. 그런데 이 탱탱볼은 장난감 주제에 자주성이 높아서 한번 던지면 이용권이 끝난다. 소유권은 지금처럼 맞은 누군가에게 넘어간다. 뭐 이런 장난감이 다 있어. 이재현은 이주연이 가지고 싶다. 정확히는 제 아래에 두고 싶다. 어디 아무 모서리에나 맞아서 우는 건 싫고 제 손톱에 찔려서 눈물 찔끔 흘리는 건 좋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몹쓸 지배욕.
이재현은 이주연을 제 가방 속에 넣으려다가 떨어뜨린다. 탈출할 틈을 보던 이주연은 이때다 싶은지 열심히 굴러간다. 굴러 굴러간다. 첨각이 없으니 멈추질 않는다.
통통통통.
이재현은 이주연의 뒤를 쫓아 달음박질한다. 시계 토끼를 쫓는 앨리스가 된 것처럼 이주연만 보고 달린다. 조금 먼 세상에 사는 이주연. 확실한 목표만 좇는 이주연. 뒤를 돌아봐 주지 않는 이주연. 곁을 내어주지 않는 이주연. 다수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이주연. 그리하여 절대로 이재현을 허락하지 않는 이주연.
군필과 새내기가 캠퍼스 술래잡기를 한다. 비싼 등록금 받아먹은 학교 부지가 빌어먹게 커서 다행이지 이 장면을 동기가 봤다면 이재현은 다음날부터 어린놈을 밝힌다는 루머에 휩싸였을 거다. 아주 틀린 소린 아니지만. 예술대 앞 편의점에서 학교의 절반을 가로질러 이공대 앞 호수까지 달린 이주연은 결국 벤치 위로 엎어지듯 앉는다. 그 앞에 도착한 이재현은 무릎 짚으며 턱 끝까지 찬 숨 쌕쌕 몰아쉰다.
" 너… 왜 하, 체력이 좋냐…. "
" 절 따라온… 서, 선배는… 뭔데요…. 하아…. "
" 끈기. 하…. "
" 저도… 한 끈기 하, 하… 는데…. "
그래, 할 것 같다. 이재현은 숨을 내쉴 때마다 공중으로 핏방울이 함께 솟구치는 기분을 느낀다. 틈틈이 헬스 했으니 따라왔지 아니었으면 교육대 돌고래 동상 앞에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 너 일부러 나 피했지? "
" 아뇨…. "
" 아닌데 이렇게 찾기가 힘들어? "
이재현은 지금 억울하다. 뾰족각 타고 태어났다고 널 찌른 적이 있니, 내 약점 잡았다고 널 괴롭힌 적이 있니. 태생이 우월해서 어디를 가든 피곤할 정도로 주목받는 인생 산 이재현은 까마득한 새내기 후배의 무관심이 서운해서 밤잠까지 뒤척인다. 자길 보란 듯 피하는 행태에 새벽이 되면 화가 났다가 달이 기울어가면 차츰 두려워진다. 모두가 우월하고 고매하다고 부러워하는 태생이 밤잠 설치는 이재현에게는 우매하게 느껴진다. 그깟 지배욕이 뭐라고 사람 하날 이렇게 못살게 구는가. 이주연이 아니더라도 이재현이 가지지 못한 사람은 널렸다. 그러나 가지고자 했는데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거다. 가지고 싶어도 영영 가지지 못하는 것이 생길까 봐. 이재현은 평생 가져본 적도, 가져볼 거라고 상상한 적도 없는 걱정이다. 내가 가지고 싶다는데 네가 왜 피해? 네가 뭔데? 이재현은 제 안에서 점점 커지는 공포의 부피감에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간다.
" 너 나 왜 피해? "
" ... 고파져서요. "
" 뭐라고? 잘 안 들려. "
한 걸음 다가가면 두 발 도망간다. 노래 가사가 아니라 이재현과 이주연의 현실이다. 바람 소리에도 묻히는 가는 목소리에 이재현이 상체라도 숙이면 이주연의 몸은 뒤로 빠진다. 이주연은 대화가 달갑지 않은 듯 고개를 돌려버린다. 이만큼 따라와 겨우 시작된 대화가 벌써 종료되기 직전이다. 이재현은 조바심이 난다. 그러나 바쁜 만큼 돌아가라고 하던가. 일평생 아주 성급하게 살아온 이재현은 이주연 앞에선 그의 템포에 맞춰 걷게 된다. 이재현은 자신을 바꾸는 이주연이 불쾌해서라도 반드시 제 손안에 터지기 직전까지 꽉 쥐고 싶다.
" 선배랑 있으면… 져서요. "
이번에는 중간 내용이 잘렸다. 이재현은 당장이라도 손목 비틀어 꺾어 대답 종용하고 싶은 충동을 꾹꾹 짓누르며 이주연을 기다린다. 미꾸라지같이 도망 다니는 후배님 잡기 위해 목에 핏대 서도록 뛰었으면서 정작 바로 눈앞에서 맴도는 물고기엔 손 하나 까딱 못한다.
이재현은 이주연이 어렵다. 실은 두렵다. 이렇게 도망치는 이주연이 마음을 바꿔 우뚝 서버리면 쫓아오던 이재현은 이주연의 뒤통수에 그대로 헤딩하는 수밖에 없어서. 이재현은 자신을 둘러싼 관계에 있어 주도권을 쥐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다. 그 상대가 비록 7학기 내내 접점 없이 살다가 4학년 막 학기 체험형 인턴 참가신청을 까먹은 이재현이 어쩔 수 없이 수강하게 된 교양 강의 OT에서 딱 한 번 만난 타과 후배라 할지라도. 이재현은 한 번 제 울타리에 들어온 사람에 대해선 항상 제 발아래에 두어야 직성이 풀렸다. 정확히는 이재현이 그런 게 아니라 이재현의 본능이 그랬다.
이재현은 이주연을 온전히 가지고 싶다. 이재현 옆에 있는 이주연. 이재현을 좇는 이주연. 앞선 이재현만 바라보는 이주연. 곁을 내어주는 이주연. 이재현만 원하는 이주연. 그리하여 절대 이재현 외 다른 사람을 허락하지 않는 이주연.
이재현은 이주연을 제 아래에 두고 싶어 발버둥 칠 때마다 이주연이 제 위에 있다는 사실만을 직시한다. 탱탱볼 인간 이주연. 누구의 것도 아닌 이주연. 고의성 없이 나쁜 이주연.
" ...있으면 배고파져서요. "
세 번이나 같은 문장을 반복하면 목소리에 힘 줄 법도 하건만 이주연은 같은 톤으로 말한다. 그러면서 몸은 여전히 긴장 상태라서 이재현이 조금이라도 이상한 짓을 하면 그대로 달려나갈 준비를 한다. 세렝게티의 수사자면서 경계 태세만큼은 칼리하리의 미어캣이다.
" 그러니까 나랑 있으면 배고파져서, 그래서 날 피했다고? "
" 네. "
이재현은 이제 억울하고 어렵고 두렵다 못해 서럽다. 나 너한테 뭐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지은 적 있냐. 코끝이 괜히 시큰해진다.
" 그렇다고 대놓고 사람 피하는 건 좀 아니지 않냐? 난 너랑 좀 친해지고 싶은 거뿐인데. 내가 그렇게 싫어? "
이재현은 거절당하는 일에 익숙지 않다. 인스타에 사진 하나 올릴 때마다 느는 팔로워, 초등학교 때부터 셀 수 없이 받은 고백, 대학로에서 술만 마시면 당하는 번따, 연애 경험 당연히 다수. 이재현은 거절의 주체였다. 누군가 밤새 꾹꾹 눌러 쓴 고백 편지의 최종 결정권자였고 아슬아슬하게 날아오는 큐피드 화살의 점수를 판정하는 심판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 거듭될수록 이재현이 가진 첨각은 더욱 뾰족해진다.
" 죄송해요…. "
" 왜. "
" 진짜 죄송해요…. "
" 아니, 그니까 왜. "
꼬깔콘 이재현은 당연히 뾰족하다. 뾰족하게 태어나 남을 찔러본 적도 있다. 그건 언제까지나 철없는 시절 이야기고 군대까지 다녀온 이재현은 고의로 남을 찌르진 않는다. 만약 이재현에게 이주연이 고의성 없이 나쁜 것처럼 이주연에게 이재현이 그런 존재라면? 상상이 어렵진 않다. 이재현이 가진 뾰족이들은 고약한 장난을 좋아한다. 그런데 그런 이유라면 꼭 이주연의 입으로 들어야 한다. 거절당하는 것에 익숙지 않은 이재현 인생에 커다란 상처를 남기더라도 필히 이유는 들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선 자신이 아무리 원해도 가질 수 없는 대상의 존재를 이재현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다.
" ... 선배한테서 나는 냄새가 싫어요. "
울컥.
" 나 지금 냄새나? 안 나지 않냐? "
제 손목에 코를 박고 킁킁댄다. 아무리 자신의 체향은 잘 느끼지 못한다지만 싫다고 배척당할 만큼 특별한 냄새가 안 난다. 흡연자긴 하지만 오늘 담배는 못 피웠고, 자취방에 있는 향이라곤 섬유유연제와 섬유탈취제뿐. 제 몸에서 향이 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향수를 뿌려 본 적도 거의 없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향이? 이재현은 이유를 납득하지 못해 화가 날 지경이다.
" 네…. 보통은 못 맡, 악! "
억울한 이재현이 손목을 코 앞에 들이대자 놀란 이주연이 급하게 고개를 돌린다. 끔찍한 오물이라도 마주한 듯한 표정.
꼬깔콘 살인사건. 가해자 탱탱볼. 1심 무기징역 확정. 땅땅땅.
" 헉…. 진짜 진짜 죄송해요…. 너무 놀라서 그런 거예요…. 진짜 죄송해요…. "
충분히 반성하고 있지만 괘씸해서 정상 참작 불가.
" 됐어. 상처 다 받았어. 사과 안 해도 돼. "
" 진짜 죄송해요…. 선배가 싫은 건 아니고… 냄새만 싫어요. "
싫다는 말은 죽어도 철회 안 하는 고집 센 놈이다. 이재현은 그 와중에 자신이 싫은 건 아니란 소리에 귀 팔랑이는 자신이 좀 밉다.
" 너 배고파져서 싫다고 했지? "
" 네…. "
" 그럼 밥 먹을래? "
" 싫, "
꼬르륵. 이주연이 말 끝맺기도 전에 배가 먼저 대답한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이재현은 그 소리가 마치 이주연의 패배 선언 같이 들린다. 아니나 다를까 이주연은 승리자 이재현이 고대한 그대로의 패배자가 되어 민망한 낯을 붉힌다. 승기를 쥐면 쐐기를 박아야 한다. 이재현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이번에는 실수로 떨어뜨리지 않고 동글동글한 탱탱볼을 양손 오므려 꽉 붙들 작정이다.
" 가. "
이주연의 눈동자가 한 바퀴 도르륵 굴린다. 거절하기는 민망하고 승낙하기는 난처한 눈. 아랫입술 잘근잘근 짓씹으며 되지도 않은 잔머리 여기저기 굴려본 이주연은 삼백안 치뜨며 대뜸 이렇게 말한다.
" 가서 물만 마셔도 돼요? "
밥심 강한 토종 한국인으로 25년 산 이재현은 눈알이 뒤집힌다. 당연히 안되지.
" 강의실에 과자 나지 않아? "
" 무슨 과자? "
" 그… 꼬깔콘…. "
강의실 구석에서 동기 자리까지 두 자리 차지하고 있던 이재현은 의미 없이 쭉쭉 내리던 인스타 피드를 나온다. CC. 캠퍼스 커플 아니고, 알파와 오메가용 주기 관리 어플 중 가장 정확하다는 어플 싸이클이다. 전체 인구에 2%밖에 안 되는 특이체질이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커뮤니티는 있기 마련이다. 베타 중에서도 가족 중 알파나 오메가가 있다면 알 법한 어플. 접속하자마자 디데이부터 뜬다. D-2. 페로몬의 노예 생활이 시작되려면 이틀 남았다는 소리다.
그런데 어째서? 이재현은 엄지손톱은 잘근잘근 씹는다. 처음 발현한 시기 말고는 한 번도 불안정한 적이 없었던 이재현은 학교에서도 군대에서도 딱딱 맞아 떨어졌다. 흔하다는 억제제 잃어버림 이슈조차 이재현에게는 없다. 시작 하루 전에는 알림이 오는 어플이니까 굳이 먼저 신경 쓰지 않아도 사고 한번 없었다.
" 누가 먹었나 보지. "
" 먹었으면 환기 좀 하지…. "
" 근데 너 원래 음식 냄새에 예민해? "
" 아니……. "
어플을 다시 확인한다. D-2. 아직 이틀이나 남았다고 미친 페로몬아.
옆자리에 올려둔 가방 옆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다. 망했다. 평소에 쓰던 가방 빤다고 안 쓰는 가방 주워왔더니 당연히 억제제가 없다. 시민의식이 성숙한 21세기. 제2 성별로 대놓고 차별하거나 신분 만드는 일은 법적으로 금지되어있다. 사이클을 통제하는 약도 많고, 걔 중에는 부작용 없이 뛰어난 약효를 보이는 약도 있다. 아직 상용화 단계는 아니지만, 페로몬을 완전히 제거하는 수술도 있다. 대학생이 억제제도 제때 못 챙겨서 강의실에서 페로몬 줄줄 흘리는 사실이 들키면 에타에 수치스러운 에피소드로 박제될지도 모른다.
이재현은 벌써부터 식은땀이 나는 것처럼 차가운 손은 볼에 대본다. 손이 차가워 열감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 다행히 몸에 변화는 없다. 다음은 제 손목에 코를 박는다. 향이 느껴지나? 이재현은 잠깐 절망한다.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리 본인 체향에는 무디다고 하지만 주기가 가까워 새는 향을 저 멀리 있는 사람도 맡는데 자신은 못 맡는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제 후각이나 저 사람의 후각 둘 중 하나는 크게 잘못된 거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건대 높은 확률로 잘못은 이재현 쪽에 있다. 머리가 하얘진다.
이재현, 25세, 남성.
제2 성별 알파, 페로몬 옥수수. 아니, 고깔콘.
몇 대에 걸쳐 베타와 섞이면서도 결국 알파로 태어난 아버지 혈육답게 이재현은 우성 알파로 발현했다. 놀랍지 않았다. 그러나 페로몬이 옥수수 향인 건 놀라웠다. 대대손손 깔끔한 우드 계열 페로몬을 가진 집안이었다. 과일 향은 흔하지만, 알파보단 오메가에게 더 많았다. 물론 옥수수는 과일도 아니었다. 베타이신 어머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옥수수 향으로 오메가를 유혹할 수 있긴 하느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됐다. 이재현의 첫 오메가는 팝콘 같아서 좋다고 했다. 두 번째 오메가는 콘칩 같다고 했다. 군대 가기 직전에 사귄 오메가는 콘수프 같다고 했다. 저마다 아는 옥수수를 대입했다. 이재현이라는 사람이 가진 다른 매력이 그 우스운 페로몬까지도 사랑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페로몬을 맡을 줄도 모르는 베타들도 이재현을 좋아했다.
모두가 좋아하는 이재현. 원하는 건 모두 가질 수 있는 이재현. 가지고 싶은 걸 가지지 못한 적이 없었던 이재현. 그리하여 본능에 새겨진 지배욕을 항상 충족하며 살아온 최상위 포식자 이재현.
그러나 덕지덕지 붙는 수식어가 무색할 만큼 러트 일보 직전인 이재현은 혼이 쏙 빠져있다.
지금 있는 교양관에서 제일 가까운 편의점도 건물 세 개는 지나야 했다. 비싼 등록금 걷어서 땅을 사니까 학교가 무식하게 컸다. 그래도 아직 몸이 달아오르기 전이니 편의점에 도착할 수 있을 거다. 기껏 일찍 온 강의는 지각하겠지만 OT니까 상관없으려나. 이재현은 카드지갑과 핸드폰을 챙겨 들고 벌떡 일어서다가 하마터면 도로 앉을 뻔한다. 이재현을 막고 우뚝 선 어떤 남성 때문에.
" 어우, 씨… 놀라라. "
" 저… 그…. "
" 저 좀 바빠서요. 죄송합니다. "
" 아, 그게, 아니구요…. "
눈높이가 딱 맞는다. 잘생겼네. 이재현은 담백하지만 확실한 감상평을 내놓는다. 대학교 내에 잘생긴 남성은 연영과에 서식한다. 면접 봐서 연기 그럭저럭하는 애 중 최대한 예쁘고 잘생겨 이름 날릴 수 있을 것 같은 애들 뽑는 학교니까 당연히 평균 얼굴이 좋다. 그러나 이주연에 대한 첫인상은 연영과라는 착각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발음이 사탕이라도 문 것처럼 우물우물대서 도무지 대본을 잘 읽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 필요하신 것 같아서요…. "
덩치에 맞지 않게 소심하게 내민 손에는 두 개의 억제제 통이 보인다. 오메가용 하나. 알파용 하나. 이 통이 이렇게 작았나? 이재현은 억제제 한 번, 얼굴 한 번, 다시 억제제 한 번 보고 집어 든다. 고마워요. 정신없이 감사를 표하고 주머니에 억제제 두 개를 쑤셔 넣는다. 강의실을 나서 정수기 앞에 서는 순간 찝찝한 감각을 되짚는다.
근데 나 알판데 오메가용 억제제는 왜 주지?
이재현은 의문이 생기면 바로바로 해답을 찾아야 하는 성격이다. 제대로 답을 찾지 못하면 심할 땐 속이 답답해서 밤잠을 설친다.
OT 기간이라 강의는 20분 만에 끝났다. 이재현은 혹시나 남자가 먼저 나갈까 봐 재빨리 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같이 가자는 동기의 말도 생까고 문으로 나가려는 학생들 무리도 거스른다. 다행히 이주연은 강의가 끝나고서야 느릿하게 가방을 챙기는 타입이었다. 느긋하게 짐을 싸던 동그란 머리통이 별안간 휙 돌았다. 눈이 마주친다. 잘생겼네. 이번에도 같은 감상이다. 한 줄 더 추가하자면 연예인 안 하면 좀 아까울 만큼. 이건 이재현 본인이 많이 들은 말 중 하나다.
분명 눈이 맞았는데 이주연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말없이 가방만 챙긴다.
" 저기요. 혹시 시간 있어요? 감사 인사를 깜빡한 것 같아서. "
" 아…. 방금 들었으니까 괜찮아요. "
거절당했다. 말하는 상대 쳐다보지도 않고. 바쁘면 그럴 수 있지 하고 넘기기엔 시간의 유무와 상관없이 대화 자체를 거절당한 것 같아 찝찝하다. 이재현은 이대로 물러나고 싶지 않아진다.
" 3시간짜리 강의 20분 만에 끝났는데도 많이 바빠요? 그럼 전화번호 교환하고 갈까요? "
" 아뇨. "
단순명료한 맺음. 어느 문장을 부정한 건지 뜻은 애매하지만, 대화를 원치 않는 것만은 확실한 목소리였다. 그 태도가 이재현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 이거 그쪽 거예요? "
사용하지 않은 오메가용 억제제를 내민다. 그제야 이주연은 고개를 든다. 감상하듯 짧게 훑는 시선을 숨길 줄도 모르는 눈빛이 순진하게 느껴진다.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주연에 대한 이재현의 세 번째 감상이다. 순진함이 어울리지 않는 얼굴.
" 알파시구나…. "
오메가용 억제제를 주머니에 집어넣은 이주연은 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눈높이가 비슷하니 마주 보기가 수월하다. 이재현은 이주연을 조금 더 뜯어본다.
광대가 도드라지는 편이 아닌데 움푹 팬 볼에 진 음영이 전체적인 얼굴형을 각지게 조형한다. 눈꺼풀 게슴츠레 떴는데도 아래쪽 흰자위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꿰뚫는 듯 오싹한 시선이다. 지금 얘도 나 관찰하고 있는 거 아니야? 새카만 동공이 닿는 자리마다 그을음이 남을 것 같다. 퍽 잘나게 태어나 재수 없는 이마에 '오만' 두 글자가 박혀 있는 것 같다. 그럴수록 이재현은 오기가 생긴다. 잘난 거로 치면 꿀릴 게 없어서. 하릴없는 기 싸움 끝에 이주연이 먼저 고개를 숙인다.
" 그럼 안녕히 가세요. "
안녕히 가세요?
이재현은 순간 허무해진다. 뻔한 남성들의 허세에 맞춰 첫 만남에 서열 정리라도 하자는 줄 알고 맞춰줬더니 결론도 없이 보내버린다고? 게다가 인사하는 이주연은 웃고 있었다. 상대를 깔보는 웃음도 떠보는 웃음도 아니었다. 동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을 완전히 접은 웃음. 냉동고 속 아이스크림, 스키장의 인공 눈, 초등학교 운동장에 세운 눈사람 전부 다 녹일 것 같은 그런 웃음.
" 자, 잠깐만요. 저 이야기 아직 안 끝났어요. "
" 저는 끝났어요. "
" 그쪽은 그냥 시작할 이야기도 없지 않으세요? "
" 그쵸. "
맥락조차 없는 철옹성에 이재현은 가슴에 돌 눌러놓은 듯 답답해진다. 이주연은 눈동자가 돌돌돌 돌아간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뜨고 싶은 눈이다. 재수 없다는 감상평을 도무지 속내를 모르겠다고 정정한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사람이건 저를 좋아하게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해 온 25년의 세월이 무색할 만큼 이재현은 자신감을 잃는다.
" 아니, 그… 저가 알파인 거 몰랐어요? 구분될 텐데. "
" 어…. 음…. 어떻게 말해야 할지…. "
" 그냥 다 말해봐요. "
" 아…. 그게 실은 오늘 강의실 들어오는데 여길 잘 못 찾았거든요. 이 건물은 처음이라…. 그래서 같이 수강하는 동아리 친구한테 연락해서…. "
" 잠깐만. 이건 너무 갔는데. 그냥 짧게 말해줄래요? "
" 그러니까…. 전 베타예요. "
" 와…. 미안한데 좀 더 길게요. "
" 베탄데…. 그니까 그… 꼬깔콘? 그 냄새만 나요. "
팝콘, 콘칩, 콘수프 그다음은 꼬깔콘. 꼬깔콘. 향은 하난데 음식을 왤케 많아.
돌연변이나 희귀성별에 관한 사례는 종종 있다. 알파와 오메가를 동시에 타고나서 러트와 히트싸이클을 동시에 겪는 미국의 한 회사원 이야기는 책으로도 나왔다. 페로몬을 맡을 수 있지만, 생리적인 영향은 받지 않는 베타는 놀랍지만 불가능한 사례는 아니다. 게다가 이 남자는 거짓말을 퍽 못한다.
" 그럼 저 속이 좀 안 좋아서 먼저 갈게요. "
이름도 모르는 사이에도 거짓을 간파할 수 있을 정도니까.
스쳐 가는 이주연에게서는 우드 계열의 향이 느껴진다. 이재현은 공격성 없이 은은한 우드 향이 낯설다. 같은 알파인 아버지의 페로몬은 어쩔 수 없이 날이 서 있다.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러트 시기에 내뿜는 페로몬은 직선과 직선이 맞닿은 가시 같다. 짐승도 수컷끼리 합사시키면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라더라. 집안의 유일한 베타인 어머니가 하는 우스갯소리에도 이재현은 잠깐 짐승이 된 것 같은 불쾌감을 느낀다. 페로몬이란 뭘까. 향이란 뭘까. 사랑하는 가족에게선 역했던 향이 처음 마주한 타인에게선 이렇게 상쾌한데. 이재현의 페로몬도 아닌 흔한 브랜드 향수에 매료된다.
베타잡이 알파 집안도 결국 본능 같은 거다. 베타에게 끌릴 줄 알았으면 부모님 연애사 물어볼 걸 그랬다.
꼬르륵.
" 속 안 좋은 게 아니라 배고픈 거 같은데. "
이주연은 미간을 찌푸린다. 돌아오는 시선은 원망이 한 바가지다. 이재현은 일방적인 미움을 받으면서도 괜히 웃음이 샌다.
" 점심 먹을래요? "
아니, 먹으러 가요. 사줄게. 거절은 거절. 이재현은 거절당하기 전에 철옹성의 팔을 잡고 밖으로 이끈다. 무거울 줄 알았던 이주연은 의외로 순순히 딸려와 나란히 걸어가는 모양새로 걷는다. 표정은 교수님과의 일대일 면담 불려가는 학생이면서 몸은 반항이 없다. 토라진 표정으로 순순히 걸어오는 이주연. 거봐. 너도 나 거절 못 해. 이재현은 지금껏 자신이 가졌던 것들 사이에 이주연을 끼워 넣는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남성이지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으니까.
거봐.
너도 나 거절 못 해.
자신만만했던 이재현은 이주연의 철옹성 앞에서 통곡한다. 이주연은 이재현의 생각보다 이재현을 기피한다. 정확히는 이재현의 페로몬을.
경영학과 18학번 이재현은 실은 군대에 다녀오기 전까진 경제학과 18학번이었다. 원서를 집어넣을 때 잘못 넣는 바람에 경제학과로 입학한 뒤에 경영학과로 전과했다. 술자리에서 써먹기 좋은 에피소드라 계속 말했더니 이젠 모르는 사람이 없다. 덕분에 이재현은 경제학과와 경영학과를 아우르는 경상대의 자랑거리가 됐다. 이재현이 경영학과인 이유는 별거 없다.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을 거라서. 지배욕이 남다른 알파들은 크든 작든 개인 사업을 하는 경우가 흔했다. 이재현의 아버지도 작은 규모의 하청업 사장이었다. 이재현은 아주 어릴 적부터 그 자리가 제 것처럼 느껴졌다. 그 직업이 유달리 탐나거나 큰 꿈에 부풀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졸업을 앞둔 이재현은 이제 와 한순간도 현실적이지 않은 꿈을 가져본 적 없는 자신을 돌아본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후회 없는 선택이다.
반면 모델학과 23학번 이주연은 논밭 사이에 흐르는 은하수를 바라보면 자랐어도 밀라노 두오모 광장에서 런웨이 하는 꿈을 꾼다. 입시부터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어와도 막상 졸업 후 진짜 모델이 되는 사람은 극소수인 학과다. 작은 쇼핑몰 모델을 하다가 쇼핑몰 CEO가 된 선배, 해외 패션 잡지사에 취직해 부장을 단 선배, 모델에서 포토그래퍼로 전향한 선배. 이 다양한 사례를 뚫고 해외 유명 브랜드와 작업한 진짜 모델은 졸업생 중에서도 손에 꼽힌다. 이주연은 그 손에 꼽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주연은 난 놈이다. 난 놈인데 죽어라 노력도 하는 놈이다. 저학년 때 모델 경험을 쌓으면 난 놈이라 불렀는데 이주연은 입학 전부터 화보를 찍었다. 패션에 관심 있는 모델학과 애들은 다 알았다. 이재현은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몰랐다.
어영부영하게 된 첫 번째 식사 메뉴는 서브웨이였다. 이주연은 고기도 소스도 없는 야채와 빵만 든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옆에선 이재현은 채소 절반은 빼달라고 요청한 후였다. 채식주의자냐고 물었더니 이주연은 고개를 저으며 체중 조절해야 해서요, 그랬다. 코트를 걸쳐도 핏 딱 떨어지게 잡힌 골격이 신기했는데 벗으니 얇은 니트가 몸에 착 붙어 얇은 허리가 도드라졌다. 저 정도면 조절할 체중이 있나? 이주연의 특수성을 모르는 이재현은 의아했다.
" 뭐, 연예인이라도 할 거예요? "
" 저… 모델이에요. 화보도 찍었는데. "
" 그걸 저가 알아야 해요? "
나쁘게 말할 의도는 아니고 모델 쪽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 적시였는데 이주연은 알아서 꼬릴 내렸다.
" 아뇨…. 더 열심히 할게요…. "
아니, 내리다 못해 작은 땅굴 파고 고개라도 묻은 것처럼 그 후로 샌드위치에 얼굴을 박았다. 손톱만큼 베어 문 양배추에도 패어있던 얼굴 거죽이 볼록 솟았다. 원래 느린지 아니면 주눅이 들어 깨작거리는지 이주연의 샌드위치는 사라지는 속도가 느렸다. 이재현은 이주연의 오기를 한 풀 꺾은 것 같아 좋았다.
경영학과 18학번 이재현. 모델학과 23학번 이주연. 이주연은 자기소개를 총 세 번 했다. 처음 한 번. 발음이 너무 안으로 말려서 못 들은 이재현의 요청으로 다시 한번. 그다음엔 학번을 듣고 놀란 이재현이 네? 라고 한 걸 재요청으로 받아들인 이주연이 좀 더 단단한 목소리로 또 한 번.
예상보다 어렸다. 이재현은 머쓱해진 제 목덜미를 쓱쓱 문질렀다.
" 나… 말 놓는다? "
" 네. "
이재현이 식사를 끝내고도 이주연은 한참을 더 먹었다. 느렸다. 생각해 보니 강의실에서 가방 정리할 때도 느렸다. 말도 느렸다. 그건 이재현이 낯설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휴지로 입가 닦는 손길도 느렸다. 빠릿빠릿하게 생겨선 느렸다. 느리게 날아오는 공은 잡기 쉽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재현은 한없이 여유로웠다.
" 우리 헤어지기 전에 번호 교환할래? "
" 앟, 안돼요. "
이번에는 아뇨가 아니라 안돼요, 라고 했다. 안돼요, 라고.
안돼요, 란 말은 앞글자 하나만 빼면 뜻이 완전히 바뀌었다. 아니요가 네로 변하는 것보다 안돼요가 돼요로 변하는 과정이 훨씬 쉽게 느껴졌다. 단호한 거절이지만 어쩐지 거절 같지 않은 거절. 이재현은 변화를 기회로 인식했다.
" 그럼 나도 됐어. 근데 내가 아무리 싫다고 수강취소는 하지 마라? "
이주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웃고 있었다. 눈꼬리가 위로 휘도록 예쁘게 웃고 있었다. 이재현은 비제로를 받은 강의의 기말고사 작문 문제를 떠올린다.
문제1. 지난 10년간 지구온난화가 가속화된 이유를 인류 문명의 발전과 관련지어 서술하시오.
ㄴ 이주연이 웃음으로 빙하를 다 녹여서.
" 너 이주연 알아? "
" 유교과요? "
" 아니 모델과. "
" 그쪽은 잘 모르는데. 왜요? "
" 그냥 어디로 튀었나 하고. "
" 설마 사기당했어요? 요새 사칭해서 돈 뜯는 꽃뱀 많다던데. 조심해요. "
" 으… 응…. 아닐걸? 꽃뱀은 보통 날 좋아하지 않나? 아무튼 나 가볼게. "
후배의 인사를 받으며 동아리방을 나온 이재현은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뱃갑을 쥔다. 담뱃갑을 열자 텅 빈 속내가 주인을 농락한다. 어젯밤에 핀 게 마지막이었다고? 이재현은 허무함에 짜증이 올라온다. 분명 이주연은 느린 공 아니었나? 그럼 잡기 쉬워야 했는데 야구장 너머로 사라진 홈런볼처럼 종적을 감췄다.
차라리 꽃뱀이었으면 좋겠다. 얌전히 사기당해준단 소린 아니지만. 얼굴이라도 보게.
이주연은 수강을 취소했다. 그 사실을 안 날 이재현은 배신감에 속이 꼬여 좋아하는 치킨도 못 먹었다. 취소하지 말란 말에 대답을 안 했으니까 따지면 이주연은 약속을 어긴 게 아니었다. 그래도 이재현은 당연히 이주연이 제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그랬으니까. 이재현이 작정하고 당기면 정신 못 차리고 끌려왔으니까. 그러나 이주연은, 분명 이재현이 작정하고 당긴 이주연은, 끌려오지 않다 못해 통통 튀어 사라졌다. 증발했다.
도대체 어디 숨었냐.
넓은 캠퍼스에 타과 사람은 우연히 마주할 수 있는 장소는 드물었다. 이재현은 2주 동안 새내기 때나 들락거린 학식당과 모 기업 장학사업에서 지원받아 지은 도서관과 극악의 알바라고 불리는 교내 유명 커피 프랜차이즈를 번갈아 돌아다녔지만, 이주연의 코트 자락조차 볼 수 없었다. 모델학과 학부생이니 예술대 근처도 서성였다. 그래도 차마 예술대에 쳐들어가진 못했다. 첫 번째 이유는 자존심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거기에도 없으면 정말 어디서 찾아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이재현의 최후의 보루를 등지고서 예술대 바로 옆 편의점에 매일 출석 도장을 찍었다.
" 담배 하나요. "
" 어떤 담배요? "
" 저기 저거. "
" 에쎄 체인지요? "
" 그거 말고 저거. "
" 아까 이거라고 했잖아요. "
" 저가요? 아닌데. "
알바생은 일주일 째 출석 도장 찍으면서 진상부리는 이 손님이 짜증 났다. 어느 날은 과자봉지를 각 맞춰 세우지 않았다고 화내고, 어느 날은 바나나 우유의 로고를 제각각 돌려놨다가 화냈다. 그러더니 오늘은 다짜고짜 50가지 넘는 담배 중 자기가 피는 담배 맞추기 놀이를 시전했다. 그래도 교내라고 시급보다 200원 더 주는 알바 좋다고 잡았더니 이런 진상이 꼬였다. 화의 임계점을 넘어선 알바생이 진상한텐 담배 안 판다고 소리 지르기 직전 도어벨이 울렸다.
딸랑.
" 너 커피 마신다고 했지? "
" 어… 꼬깔콘…. "
" 커피면 아메리, 엥? 웬 과자? "
머리 위에 먹구름을 매단 채로 엄한 곳에 화풀이 중이던 진상 of 진상 이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우드 향에 고개를 돌렸다.
어?
" 손님한테는 이제 담배 안 파니까 그냥 가세요. "
" ... 담배 이제 필요 없어요. "
방금 찾았거든요. 줄담배 피우게 하는 원인.
집 나간 탱탱볼이 굴러 굴러 다시 돌아왔다. 눈이 딱 마주쳐버린 이주연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더니 뛰쳐나갔다. 놓치기 싫은 이재현은 그 뒤를 쫓았다. 난데없는 캠퍼스 술래잡기의 서막이었다.
꿈이 뚜렷한 이주연은 독했다. 간간이 잡히는 모델 일을 하면서 학부 생활을 하고 거기에 학과 동아리도 했다. 교수님과의 술자리도 나갔고, 이미 취업한 고학번 선배도 만났다. 보통 사람보다 하루를 두 배는 바쁘게 썼다. 행동은 보통 사람보다 두 배로 굼떴으면서.
악착같이 사는 이주연은 하루를 꼬박 굶고도 수업과 일과 과제를 모두 해낼 수 있는 체력이 됐다. 그래서 7대 죄악 중 식욕을 가장 혐오스럽게 취급했다. 지방은 죄악이다. 안나 윈투어의 영향을 받은 이주연의 담당 교수가 그랬다. 그 교수를 따라 입학한 이주연은 사리 분별없이 받아들였다. 죄악이다.
이주연은 하루 두 끼는 샐러드만 먹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 옆자리 차지한 이재현은 키위 드레싱을 세 바퀴 둘렀다. 이주연은 드레싱 없이도 오물오물 잘 씹었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사자탈에 갇힌 토끼 같고 신기했던 이재현도 일주일을 풀만 먹으려니 힘들었다.
" 넌 이게 맛있냐? "
" 네. "
" 사실 맛없지? "
" ... 아뇨. "
아니긴 뭐가 아닌데. 이재현은 이제 이주연의 아뇨에 담긴 각기 다른 의미를 알 것 같다. 방금 건 스스로를 세뇌하려는 아뇨. 맛없지만 먹어야 하니까. 이재현은 한숨 쉬며 기계적으로 포크질을 한다. 그 모습 본 이주연의 눈에 짧게나마 안타까움이 지나간다.
" 먹기 싫으면 그만 오세요. "
" 누가 싫대? "
" 저는 싫어요, 선배랑 먹는 거. "
이재현은 오늘 처음 솔직해진 사람처럼 말하는 이주연이 어이없다. 저 싫다는 말을 하루에도 수십 번 듣고도 따라다닌 이재현이다. 이젠 탱탱볼에 아무리 맞아도 피멍 생기지 않을 만큼 맷집이 강해졌다.
" 어쩌냐. 난 이제 나 싫어하는 너도 좋은데. "
" 보통 상대방 의사는 고려 안 하는 타입이세요? "
" 응. 내가 좋아하면 결국엔 다들 좋아해서. "
재수 없단 소리 많이 듣겠닿…. 전에는 안 들렸던 작은 소리가 이제는 들린다. 이재현은 어느새 싹싹 긁어먹은 빈 그릇 옆 포크를 탕 내려놓는다.
" 너만 나 안 좋아해. "
" 전 꼬깔콘 냄새나는 남자 딱 질색이라. "
" 근데 너 처음보단 도망 안 간다? "
엏…. 여지를 줄 듯 말 듯 의미심장하게 고갤 까닥이며 웃은 이주연은 방울토마토 반쪽을 집어넣고 또 열심히 씹는다.
" 이젠 괜찮은 거 아냐? "
방울토마토로 채운 볼록한 볼은 샐러드만 본다. 무시.
" 여전히 싫어? "
샐러드 사이에 숨어 있던 베이컨 한 줄을 이재현의 샐러드 볼에 옮겨준다. 또 무시.
확 페로몬 풀어버릴까 보다. 이재현은 베이컨을 포크로 꽉 내리찍으며 인상을 구긴다. 사람 속 꼬아놓은 이주연은 태연하게 말한다.
" 얼굴 펴요. 주름져요. "
" 너 사람 좀 그만 무시해. "
" 선배가 자꾸 무시하고 싶은 말만 하시니까 그렇죠. "
" 너 성격 왜 그래? "
" 뭐…. 이러면 좀… 제가 싫어지실까 하고. "
베이컨인지 고무인지 모르겠다. 풀대가리 속 유일한 고기를 씹으면 천상의 맛을 느껴야 하는데 풀대가리보다 퍽퍽하다. 결국 이재현은 씹다 만 베이컨은 도로 뱉는다. 이주연은 포크질하느라 숙였던 고개를 들지 않고 눈만 빼꼼히 올려 이재현을 본다.
" 오늘은 베이컨 안 먹어요? "
쌓인 게 많았던 이재현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낸다. 받은 만큼 돌려주기.
" 싫어졌어요? "
저 질문의 주어는 베이컨일까, 이주연일까.
이주연은 더 말 걸지 않고 샐러드를 마저 씹는다. 다른 테이블의 말소리만 들리는 정적의 45초. 애 하나 손에 쥐는 게 왜 이렇게나 어렵지. 당장이라도 그 질문의 주어가 뭐냐고 묻고 싶은 걸 참으려니 혀가 근질근질거린다. 무시가 체질에 맞지 않은 이재현은 벌써 가슴이 답답하다. 이 어린 나이에 심정지가 오면 그 이유는 이주연 때문이다.
꼬깔콘 살인사건 2심 재판 시작.
포크 내려놓은 이주연의 입에서 자기변호가 튀어나온다.
" 선배, 저는… 배고파지는 게 싫어요. 식욕 도는 게 싫어요. 안 먹어야 하는데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게 싫어요. 스스로 절제가 안 되는 게 싫어요. 그런데 선배는 정말 맛있는 향이 나거든요. 솔직히 선배가 뒤에서 몰래 다가와도 저는 그게 느껴지는데요. 그냥 선배가 즐거워 보이니까 참는 거예요. 근데 진짜 많이 배가 고픈 날엔 선배가 다가오는 향만 느껴져도 너무 먹고 싶어서 그럴 때마다 통제가 안 되는 제가 싫어져요. "
혀가 많이 통통한가 싶을 만큼 뭉친 발음이 어디 가고 저 억울하다는 말은 또박또박 잘한다.
이재현은 구구절절 늘어지는 문장 자체 필터로 반쯤 흘려듣는다.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이재현은 이주연을 이재현은 이주연도 그렇게 단순하게 이해하고 싶다. 이재현은 이주연을 가지고 싶다. 꽉 쥐고 싶다. 온전히 지배해서 제 아래에 두고 싶다. 저만 보고 사랑하게 만들고 싶다. 이주연에게는 그런 단순한 마음이 있을까? 이재현은 싫어하는 이주연. 이재현의 페로몬을 싫어하는 이주연. 이재현이 자신을 싫어하길 바라는 이주연. 그러면서 진짜 싫어하면 갑자기 솔직해지는 이주연.
이주연의 공격에 익숙해진 것과 기분이 상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 그래서 결론이 뭔데? "
나쁘게 말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꼬깔콘의 끝은 원래 뾰족하다. 그렇게 태어났다.
찔린 이주연만 억울해져서 고갤 돌린다. 새까만 눈동자 옆 테이블로 통통통 튀어간다. 이재현은 속이 탄다. 이대로 또 놓치면 이번에는 캠퍼스 한 바퀴를 뛰어다녀야 할 것 같다. 다급해진 이재현은 손 뻗어 이주연의 볼 톡톡 두드린다. 집중 좀 하지? 이주연의 시선이 이재현을 향한다. 특별히 치뜨지 않아도 드러나는 삼백안이 곧 낮게 깔린다. 이주연은 입술을 잘근잘근 물다가 울대를 크게 한번 움직인다. 손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겹쳤다 말았다 한다. 달달 떠는 다리 따라 테이블이 약하게 움직인다. 주의 기울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소란들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이재현은 그 반응을 안다. 정확히는 자신 앞에서 그렇게 반응하던 사람들이 그다음에 무슨 말을 했는지.
" 그러니까 전 그냥 선배가 싫은 거예요. "
이 반응은 확실히 아니다. 탱탱볼이 또다시 탈출시도를 한다. 이재현은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것 같다.
" 주연아, 난 먹어도 살 안 쪄. 그래도 참아? "
이주연은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웃고 있다. 눈꼬리가 위로 휘도록 예쁘게 웃고 있다.
이재현은 기시감에 핏기가 가신다. 속에 소화되지 않은 무기질이 들어차 생명력을 갉아먹는 것 같다. 이 공, 과연 누군가의 손에 한 번이라도 온전히 소유된 적이 있었던 게 맞을까? 이재현 인생 처음으로 자신과 똑같은 크기의 사탕을 삼키려니 녹기 전에 기도를 막아 누른다.
2심도 무기징역. 선처 없음.
이주연은 한 손으로 제 턱 잡아 괴고 가늘게 뜨는 눈을 더 가늘게 뜬다. 그리곤 대뜸 통보한다.
" 선배, 저 다음 주부터 진짜 중요한 작업 들어가요. "
대뜸 터무니없는 소리도 한다.
" 저 잠깐만 싫어하고 계시다가 끝나고 제가 연락드릴 때 다시 좋아해 주시면 안 돼요? "
전보다 훨씬 짧은 문장이건만 이재현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저 머리통 속엔 대체 어떤 경험과 지식이 쌓였길래 이러지? 머리 벅벅 긁으며 생각해봐도 이건 들어주는 쪽이 절대 호구다. 그냥 호구도 아니고 절대 호구.
" 주연아, 진짜 미안한데. "
" 네. "
" 혹시 낮술 했니? "
" 아뇨…. "
이재현은 이주연은 온전히 쥐려 할수록 이주연에게 잡히는 꼴이 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주연이라는 공을 온전히 쥘 수 있을까? 아무에게도 양보하지 않고 혼자만 가질 수 없을까? 베타는 어떻게 꼬셔야 하나요, 아버지. 이주연에게선 언제나 우드 향이 난다. 이재현이 사랑하는 가족의 향이면서 동시에 아무도 공격하지 않는 향. 이주연이 우드 향수를 쓰는 탓에 이재현은 이주연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이재현은 이주연을 오후 수업 강의실에 넣어주면서 그래 너가 말한 대로 하자, 하고 돌아선다.
4학년 막 학기 동기들의 취업 축하 파티가 줄을 이뤘다. 아버지 회사에 입사가 거의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인 이재현은 첫 빠따로 쐈다. 경조사비는 받은 만큼 줘야 하고 낸 만큼 돌려받아야 한다. 쓴 돈이 아까웠던 이재현 참된 경영학도로서 기회비용 관계를 깡그리 무시하고 부르는 술자리마다 아득바득 발을 걸쳤다. 술 몇 잔 기울이는 척 한 뒤 안주를 축냈다. 처음에는 안주 킬러라고 욕먹어도 금세 술이 오른 사람들은 기억을 못 했다.
오늘도 역시 이재현은 열심히 건배사 외치며 소주 들이붓는 동기들 옆에서 삼겹살만 야무지게 구웠다. 취업 축하를 빌미로 근황 노가리 토크 쇼가 시작됐다. 대상은 주로 자리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 걔 뭐해? "
" 결혼하고 휴학했잖아. "
" 임신했다던데. "
" 벌써? "
" 아니, 결혼 전부터. "
"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 "
뒷담화 분위기로 슬슬 흘러가자 고기 열심히 자르던 이재현이 한마디 거든다.
" 근데 여기 1인분 양 줄었지? "
" 왜? "
" 예전에는 5인분 먹으면 배가 찼는데 요즘은 7인분을 먹어도 배고파. "
" 응 그거 너 뱃속에 기생충 꼬인 거. "
" 나 지금 심각해. 혼자 10인분 먹게 생겼다고. "
" 재현아, 혹시 애정결핍이냐? "
" 에이, 쟤가? "
" 야, 술이나 마시자. "
한 명이 잔을 들면 나머지도 잔 들어 부딪힌다. 먹고 죽어! 아니 니네가 새내기도 아니고 뭘 먹고 죽어. 이재현은 시니컬하게 부딪힌 건배주를 빠르게 쓰레기통에 버려 증거를 인멸한다.
재현아, 혹시 애정결핍이냐?
이주연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은 지 2주가 꽉 찼다. 오늘이 넘어가면 내일부턴 3주 차 돌입이다. 너가 말한 대로 하자고 하기 전에 일이 언제 끝나는지 물어봤어야 했다. 아무 기약 없는 대기 시간이 하루하루 거듭될수록 이재현의 불안과 초조는 배로 불어났다. 이주연이 자신이 피해서 완전히 사라졌던 2주보다 이번 2주가 훨씬 힘들었다. 이재현은 음식으로 스트레스 푸는 타입이 아닌데도 위장이 기름진 음식을 자꾸 재촉했다. 허기진다. 이재현은 고기 집게로 두 점을 한꺼번에 집어 제 입에 넣으면서도 식욕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분위기 무르익고 목청은 높아지고 예의는 점점 사라져 갈 무렵 옆 테이블에선 소주병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란에 놀란 건 정신 멀쩡한 이재현과 알바생 밖에 없다. 여전히 웃고 떠드는 동기들을 두고 이재헌은 외투를 챙겨 일어난다. 아수라장 탈출은 맨정신 순이다.
" 어디가? "
" 담배. "
신기하게 이 한 단어면 아무리 빡빡한 술자리도 외출이 쉬웠다.
" 같이 가. "
" 어, 어, 넌 술이나 마셔. "
고깃집을 나와 모퉁이 돌아선 이재현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는다. 오늘은 다행히 담배가 남아있다. 얼마 전 개업한 술집 이름이 박힌 라이터 부싯돌은 세 번 만에 할 일을 했다. 담배는 궁상맞은 짓이라고 생각하는 이재현이지만 오늘따라 외투 속으로 침범하는 찬바람에 더욱 서러워진다. 같이 가자는 애 끌고 나올 걸 그랬나. 그러나 아무나는 싫다. 걔가 필요하다. 이재현이 싫다던 걔. 이재현의 페로몬이 싫다던 걔. 이재현에게 식욕 도는 게 싫다던 걔. 언제 연락할지도 알려주지 않아서 무작정 기다리게 만든 걔.
" 걸을 수 있어요? 택시 앞에 온대요. "
걔. 이주연.
대학가 술집거리에 골목은 고작 해봤자 일방통행이 가능한 일차선이다. 배달 오토바이 한 대 부릉 지나가면 소음이 길가에 고스란히 울린다. 저쪽 골목에서 취객들이 싸운다. 가게마다 빼곡히 앉은 손님들이 왁자지껄 떠든다. 이 어지러운 골목에서 맞은편에 지나가는 솜사탕 발성 목소리를 듣는 일도 칵테일파티 효과의 일종인가? 이주연은 제 키보다 큰 남성을 부축하며 골목 돌아 사라진다.
뛰어가서 잡을까? 아니면 여기로 돌아오길 기다릴까? 걔가 여기로 다시 돌아오긴 하는 게 맞나? 이재현은 막 피우기 시작한 연초를 들고 망설인다. 담배 한 대에 225원인 시대. 다 피지 못한 담배와 술 취한 남자와 함께 있는 이주연. 공짜 밥 양껏 먹고 나왔는데 허기가 진다. 바닥에 떨어진 장초를 꾹 눌러 밟고 외투에 두 손 꽂은 채 이주연이 사라진 방향으로 걷는다. 다행히 이주연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자신보다 큰 남자를 부축한 채로.
이재현한테 연락할 시간은 없고 다른 사람 만날 시간은 있는 괘씸한 이주연.
이재현은 고작 술 한 잔 마셨을 뿐인데 취기가 도는 것처럼 조용히 끓어오른다. 어깨에 둘러놓은 남자의 손이 미끄러져 옆구리에 닿자 이주연은 멀리서도 눈에 띄게 경직된다. 저 자식이 덩치도 크고 나이도 이주연보다 많아 보이는데 뭘 저렇게 인사불성으로 처마시냐. 이 골목에서 실시간으로 인사불성이 되어갈 고학번 동기들까지 묶어 욕한 이재현은 버리고 온 담배가 그립다. 그냥 물고 올걸. 속이 뻑뻑하다. 이주연으로 채우고 싶었는데 기름 가득한 돼지고기로 채웠더니 배탈 난 것 같다. 남자의 손이 움직이더니 흉부 쪽으로 기어간다. 이주연이 고개를 떨구는 바람에 표정이 가려진다. 속에 채운 돼지기름 내가 역하게 느껴진다. 이주연은 손 겹쳐 잡고 멈춘다. 그대로 떼어내거나 밀어낼 줄 알았는데 겹친 채로 얼굴 마주하고 웃는다. 웃어? 이주연이 사라진 2주, 이주연을 기다린 2주보다 여기서 이주연을 마주한 2분이 더 큰 고비다.
억울하고 어렵고 두렵고 서럽게 해도 괜찮다. 근데 외롭게 하면 어떡하지. 이제 이재현은 이주연은 한 번이라도 제대로 제 손 위에 올라온 적은 있었는지 생각한다. 쥐었다는 감각이 느껴진 모든 순간이 착각 같다. 외롭다. 허기가 진다. 이재현은 이주연을 먹고 싶다. 온전히 삼켜서 가지고 싶다.
택시에 남자를 넣어준 이주연은 택시가 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근처 골목으로 사라진다. 이번에도 이재현은 그 뒤를 따라가야 할지 이대로 집으로 가야 할지 망설인다. 먼저 연락하겠다고 한 이주연은 이대로는 자신에게 영영 연락할 일이 없을 것 같다. 아쉽지도 않은 것 같다. 근데 너 나 먹고 싶은 눈으로 보지 않았냐. 그게 내 착각이니, 주연아. 착각은 억울하고 속내는 어렵다. 실패는 두렵고 거절은 서럽다. 남을 이겨 먹는 일에 익숙한 이재현은 거듭된 패배에 회복력을 조금 잃는다. 그래도 무슨 일이든 결론은 내야 하는 성격이라 결국엔 이주연을 따라간다. 시계 토끼를 따라간 앨리스는 굴속으로 떨어진다.
이주연은 벽에 기댄 채 흰 막대를 물고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골목으로 인기척이 느껴지자 사탕을 쪽 빼고 웃는다. 작게 뜨고 다니는 눈이 더 작아졌다.
" 전혀 안 놀란다? "
" 선배 냄새나는데 왜 안 오시나 했어요. "
알고 있었다. 이주연은. 자신이 지나간 골목부터 남성을 택시에 넣은 도로까지 이재현이 줄곧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재현은 순간 울컥 감정이 치민다. 화를 내야 좋을지 눈물을 흘려야 좋을지 모르겠다. 오늘따라 양자 일택이 쉽지 않다.
" 일 끝났어? "
" 네, 오늘 마지막 회식 같은 거 했어요. "
" 근데 왜 연락 안 해? "
" 오늘 끝났으니까 내일 하려고 했죠. "
또박또박 오는 말대꾸에 파고들 허점이 없어서 이재현은 점점 초라해진다. 아까 일까지 들먹이며 질투하는 건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옹졸해지는 것 같아서 겨우 참는다.
" 선배, 혹시 그… 저 싫으세요?
" 응, 너가 연락 안 해서 아직 싫어하고 있는 중. "
" 아. "
이주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핸드폰을 본다. 곧 이재현의 카톡 음이 울린다.
주연
[일 끝났어요.] 22:21
이재현이 내용을 확인하고 헛웃으며 핸드폰을 내린다. 이주연은 속도 모르고 당당히 웃는다.
" 다시 좋아해 주세요. "
아무래도 이주연은 이재현을 천하의 호구로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지금껏 이재현의 눈탱이를 때렸던 공격들이 모두 고의인 것 같다. 이주연은 손에 쥐고 싶었던 이재현은 사실 이주연의 손에 쥐여 있었던 것 같다. 이재현은 마음 조각을 난자당한다. 그래도 포기가 안 돼서 어쩔 수 없이 모난다. 꼬깔콘은 원래 그렇다.
" 그럼 좋아하니까 하나만 묻자. "
" 네. "
" 아까 걔 친해? "
" 구속하는 편이에요? "
" 어. 5중 잠금장치한 지하실에 감금하는 편. "
" 그건 좀. "
" 질문에 대답만 해. "
이재현은 제 옹졸함에 입술을 짓씹는다. 자존심 때문에 묻고 싶지 않았지만 궁금한 건 또 바로바로 해소해야 했다.
이주연은 앟, 하고 말갛게 웃는다. 순수하지 않지만 순진하게.
" 아까 윤수 형이 저 만질 때 있잖아요. 그때도 선배 냄새가 계속 나서 선배가 저 만지는 것 같이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상상하니까 기분 좋았어요. "
이재현은 목에서 쇠 맛이 느껴질 정도로 가혹한 허기를 느낀다. 이재현만 보면 배고프다 앓았던 이주연도 이만큼 허기졌을까? 그래서 피하고 싶었던 걸까? 입안에 고이는 침을 목 뒤로 넘기느라 움직일 울대를 이주연도 볼까? 저를 보며 입맛 다신 이주연도 장이 꼬일 만큼 아팠을까? 당장이라고 여린 살 오독오독 삼키고 싶은 충동을 고작 맛없는 샐러드 우겨 넣어가며 참았을까?
이재현은 이주연의 머리끝부터 살살 녹여 온전히 자신의 속에 집어넣고 싶다. 부셔야만 한다면 기꺼이 그래서라도.
" 자, 자, 잠깐만요…. 선배… 갑자기 향이 너무 진해졌는데…. "
베타와 달리 알파와 오메가는 감정이 격해지면 자연스럽게 페로몬이 샌다. 같은 성별이라면 상쇄되고 다른 성별이라면 강한 시너지로 얽히는 페로몬. 그러나 그걸 느낄 수 있는 변종 베타 이주연은 가진 페로몬이 없어 어느 쪽도 하지 못하고 이재현의 페로몬 속에 꼼짝없이 갇힌다. 이주연은 아득한 허기로 가득 찬 지옥도에 빠진다. 정신에서 이성이 서서히 멀어진다.
이재현은 이주연 옆에 팔을 집고 양다릴 넓게 벌려 가둔다. 페로몬은 이미 이주연을 흠뻑 적시는 중이다.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갈무리를 못 한다. 그토록 손에 넣고 싶었던 것에 닿을 수 있게 된 알파의 지배욕은 이성을 초월한다.
" 상상하니까 기분 좋았다며. "
이주연을 배고프게 만드는 향.
" 그래도 선배는 알파고 전 베탄데…. "
" 난 괜찮아. 요즘 억제제 효과 좋아. "
"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
" 그럼? "
이주연의 시선이 밖으로 나돈다. 눈썹이 위로 휘었다가 다시 돌아온다. 거북함, 두려움, 서러움, 비참함. 이재현은 감정 룰렛을 돌린다. 이주연을 어느 칸에 집어넣어야 해독할 수 있을까. 이재현은 어려운 이주연을 한순간이라도 해석하고 싶다. 어떻게 해야 손에 쥐어볼 수 있는지. 쥐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지.
그러나 어느 칸이든 이재현의 상식 아래 이주연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자유롭게 튀어 오르는 탱탱볼이라서.
" ... 저 무서워요. "
이재현은 이주연이 두려웠다. 이주연과의 관계에서는 도통 주도권을 꿰차지 못해서. 이재현은 자신을 둘러싼 관계에 있어 주도권을 쥐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었다. 반드시 하나를 포기해야 했다. 사랑과 삶. 지배와 종속. 본능과 마음. 이재현은 자신의 카드 성이 미처 통제하지 못한 탱탱볼에 맞아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꿈을 자주 꿨다.
그러나 이주연을 두려워하면서도 이재현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이주연이 이재현을 두려워할 수도 있을 거란 사실을.
" 뒤 뚫리는 거…. "
앙큼하게 혼자서만 진도 뺐다는 사실도.
이재현은 여전히 이주연을 이해할 수 없다. 이재현의 상식에서 이해하기에 이주연은 너무 다른 사람이다. 이재현은 꼬깔콘이고, 이주연은 탱탱볼이니까. 둘은 공통점이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서로에게 허기를 느낀다. 서로의 존재가 외로움의 웅덩이를 만든다. 이재현은 제 뱃속에서 시계 소리가 들리는 착각에 빠진다. 이주연이 제 앞에 서면 그랬던 것처럼. 너는 이런 허기를 참았던 거구나. 이재현과 이주연의 유일한 공통점이다.
" 그럼 안 무서운 것부터 해. "
이재현이 입술 사이에 엄지를 올리자 머뭇거리던 이주연은 손끝을 살그머니 문다. 오케이 사인으로 알아들은 이재현은 머릴 살살 쓰다듬는다. 눈치 보며 옆 위아래 조용히 데굴데굴 눈이 굴러간다. 살짝 나온 붉은 혀로 이재현 손끝 할짝댄 이주연은 다음 행동을 얌전히 기다린다. 무섭다는 말과 달리 순종과 기대가 섞인 눈망울이 적절한 장소를 찾지 못해 자꾸 구른다. 멈추고 싶다. 손 위에 올려두고 싶다. 이재현은 잇새로 들어간 손가락에 힘줘 하악 벌린다. 긴장하는 시선이 이재현에게 닿는다. 얕은 숨이 매끈한 손가죽을 스친다. 이재현은 무심코 튀어나올 뻔한 뾰족한 첨각 꽉 잡는다. 이재현 무서운 이주연은 조심히 다루지 않으면 언제든 튀어 나갈지 모르는 탱탱볼이다. 눈꺼풀을 쓸어 감기고 뺨을 살살 쓰다듬자 고개가 손 쪽으로 기운다. 사람 손을 타게 된 길고양이 같다. 허리에 손 올리자 이주연의 말랑한 몸이 딱딱히 굳힌다. 예민하네. 마른 몸에 볼록 도드라진 늑골까지 슥 훑어내리자 폐가 한껏 부풀어 숨이 밭아진다.
이재현의 손길을 멋대로 상상했다는 이주연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역시 모르겠다. 이재현은 이주연의 입에서 안돼요 혹은 잠깐만요가 나오기 전에 현재의 허기를 채우기로 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