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을 모르는 척 하는 게 더 어려울까,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는 게 어려울까. 재현은 기꺼이 아는 것을 모르는 척 하는 게 더 어렵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시험기간의 도서관은 조용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평균 5시간 내외로 잔 예민할 대로 예민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주연은 거기서 3분 째 아노락을 부스럭거리면서 가방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중이었다. 그럴 때마다 날카로운 눈빛들이 여러 개 날아가 박혔지만 주연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보였다. 다만 주연은 도서관을 나갈 때도 찍어야 하는 도서관 카드가 없어져 난감한 상태였다.
재현은 입술 사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와중에도 소리가 나지 않게 하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재현은 주연의 도서관 카드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기꺼이 알려줄 수 없는 이유가 있어서 그렇지.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려 애를 썼지만 하도 허둥지둥하고 있어 그러기도 쉽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아주 오래 전 주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의 주연은 도서관 책장 사이에 몸을 숨긴 채였다. 바깥으로는 최루탄이 날아다니고 비명소리가 들렸다. 도서관 입구는 책상을 겹겹이 쌓아 막아두긴 했지만 언제 뚫려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긴 했다.
주연은 책장 사이를 서성거리는 재현의 팔을 잡아 제 옆에 주저앉혔다. 스친 눈빛이 잔뜩 젖어 있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주연은 정문 앞에서 친구를 잃었다. 친구에게 달려가려다가 사람들에게 떠밀려 건물 안으로 들어오게 된 거였다. 뺨에 미처 마르지 못한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주연은 재현의 팔에서 흐르는 피를 발견하고는 입을 틀어막느라 젖은 흰 티셔츠를 펼쳤다. <지금> 이라는 동아리 이름이 왼쪽 가슴팍에 박힌 티셔츠였다. 주연은 그걸 툭툭 털고는 이내 재현의 팔에 둘둘 감았다.
"이름이 뭐에요?"
소란이 조금 잦아들었다. 내내 눈을 감고 책에 뒤통수를 기대고 있던 주연이 물었다. 재현은 그 순간에도 아주 먼 옛날의 주연을 떠올렸다. 그 때의 주연은 이름을 묻는 대신 제 이름을 먼저 얘기했었는데.
"재현."
"재현?"
"....."
"예쁜 이름이다. 재현하다라는 건 다시 나타나다라는 뜻이잖아요."
주연이 웃었다. 여전히 눈물을 주렁주렁 매달고도 잘도 웃었다. 재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연의 다음 말을 예상했다.
제 이름은 주연이에요.
"제 이름은 주연이에요."
주인공이라는 뜻이에요.
"주인공이라는 뜻이에요."
한 치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내 사랑스러운 인간.
재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연이 쌓아놓은 전공 책 표지 위로 [저기 조용히 좀 하세요] 라는, 글자만 봐도 신경질적인 포스트잇이 붙은 직후였다. 주연의 자리로 다가가자 주연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죄송합니다, 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이번에도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재현은 주연이 소득 없이 뒤적거리고 있는 가방으로 손을 넣어 가장 안 쪽 깊은 주머니에서 도서관 카드를 꺼냈다. 그제야 주연이 재현과 눈을 마주쳤다.
놀람과 당황함, 찾았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그 눈빛에 깃든 의미를 재현은 알았다.
또 형이네요.
멜로불패
사랑의 신이 누구인지 아는가? 에로스라고 대답한 당신, 그리스 로마 신화 중독입니다. 그 쪽 말고 이 쪽 땅에도 사랑의 신은 존재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 사랑, 이라는 단어조차 없었을 때부터 있었던 신이었다. 사랑의 신의 이름은 현재였다. 현재는 동시에 지금, 이라는 뜻을 가지기도 했다. 이 세상 만물을 만들어낸 최초의 신이 왜 사랑과 현재를 같은 이름으로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몇 번의 원치 않는 전쟁에 휘말렸다가 기어이 패배하고 만 현재는 인간 세상으로 내려가는 벌을 받았다. 그것은 모두 승리의 신이 인간을 너무 사랑해서 내린 형벌이었다. 사랑의 신인 현재가 인간 세상에 있어야 그 곳에도 사랑이 피어난다고 믿었다. 현재는 몇 번이고 인간 세상에 내려갔다. 인간들이 년도를 기록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대부분의 순간에 현재는 있었다.
물론 겉모습이 늙지 않기 때문에 주기는 짧았다. 2~3년의 주기로 내려갔다가 올라와 텀을 두고 다시 내려간다. 원래는 몇 년 지나지 않아 내려가도 아주 상관이 없었는데 인간들이 기록을 하고 거기다가 사진기라는 물건을 발명해낸 이후부터는 자주 등장할 수 없었다. (현재는 대통령이 되려던 계획도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이주연과의 최초의 기억은 1924년 경성의 어느 술집에서였다.
주연은 그 곳에서 연극을 했다. 주로 일제에 저항하는 내용들이었지만 단속이 심해진 이후부터는 그냥 유행하는 신파에 관련된 극을 주로 했다. 주연은 특별히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기 보단, 자신이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민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주연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무대에 오르면 그런 고민이 조금은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재현이 6일을 연속으로 그 술집에서 연극을 보는 걸 알아차린 주연은 돈을 받지 않고 재현에게 술을 한 잔 권했다.
"저는 주연이에요."
"....."
"주인공이라는 뜻이에요."
재현은 제 이름을 얘기해야 하는 순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저도 모르게 재현, 이라고 대답했다. 어쩐지 원래의 이름을 들키는 것이 부끄러웠다.
"재현이요?"
"....네."
"예쁜 이름이에요."
"....."
"재현은 다시 나타나다라는 뜻이라는 거 알고 계세요?"
다시 나타나다. 재현은 그 문장을 입 안으로 굴렸다. 재현에게 더없이 잘 어울리는 이름이 아닐 수 없었다. 몇 번이고 다시 나타나서 지금을 사는 사람. 재현에게 내려진 벌을 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그게 맞았다. 한 달 후 재현은 주연이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1987년 서울. 이주연을 마주쳤다.
2023년의 주연은 재현의 옆에서 얌전히 걷고 있다. 가방을 앞으로 돌려 멘 채였다. 어쩐지 불퉁한 표정은 설명을 요구하는 것 같았지만, 재현은 모르는 척 할 생각이었다. 재현이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살아가면서 하나 다짐한 게 있다면 인간들의 일에 끼어들지 않는 거다. 그런 다짐을 하게 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1924년, 주연이 일본 순사에게 희롱 당하는 어린 여종원을 대신해서 싸우다가 잡혀갈 위기에 처하자 옷 안 쪽 깊숙한 곳에 숨겨둔 약을 먹고 자결한 걸 알게 된 뒤 재현은 그 일본 순사를 찾아내 죽였다. 재현이 인간 세상에서 저지른 가장 나쁜 일이었다. (물론 재현은 별로 나쁘다고 생각 안 했고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
더 이상은 끼어들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지금은 예전처럼 주연이 죽을까봐 걱정도 안 된다. 그런데 자꾸 이런 작은 일에 간섭하게 된다. 이게 별로 좋지 않을 거라는 걸 재현도 알았다. 인간들이 생각보다 훨씬 더 발전해서 이제는 슬슬 이렇게 인간 세상에 내려오는 짓도 그만해야 한다는 것 역시도.
어느 순간부터는 벌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됐다. 그게 다 이주연 때문이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뭐를?"
재현이 먼저 설명해주지 않자 결국 참지 못한 주연이 입을 열었다. 재현은 모르는 척 괜히 되묻는다. 도서관에서 나오는 내내 사실 재현은 어떻게 변명해야 하는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다른 때는 빠릿빠릿하게 돌아가는 머리가 꼭 주연의 앞에서는 돌처럼 굳어버린다.
단지 주연의 습관을 알고 있었던 것뿐이다. 뭐든 가장 깊은 곳에 숨기는 버릇 같은 거. 주연이 가지고 다니는 가방은 저거 하나니까 가장 깊숙한 곳에 있으려니 했다. 여기서 말하는 습관은 2023년의 이주연의 습관뿐만이 아니라 1924년의 주연의 습관, 1987년의 주연의 습관을 모두 합친 거였다. 하지만 재현은 그렇게 사실대로 말할 수 없다. 안 그래도 주연은 슬슬 재현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으니까.
"그냥 찍은 거야. 그러게 누가 도서관에서 그렇게 시끄럽게 하래?"
"진짜 이상해요."
"고맙다."
몇 걸음 앞서 걷던 재현이 멈춰 서서 주연을 돌아본다. 저도 모르게 짜증스러운 말투가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그걸 왜 그렇게 깊은 곳에 숨겨?"
"...네?"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그렇게 쳐 박아 두냐고. 그냥 앞주머니에 넣으면 되잖아."
성질내놓고 미안한지 쭈뼛거린다. 재현은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는 주연을 등지고 다시 앞서 걷기 시작했다.
이주연과 도서관에 함께 숨어있었던 날, 데모가 끝났는지 주변이 고요해지자 주연은 친구들을 찾으러 가야겠다고 했다. 아마 경찰서에 잡혀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러다 너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말에 주연은 어깨를 으쓱했다. 입구를 막은 책상을 내리는 주연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 재현은 다급하게 덧붙였다.
"티셔츠는 언제 돌려줘요?"
재현은 제 팔에 둘러진 티셔츠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마지막 책상까지 내리고 쇠사슬을 푼 주연이 재현을 휙 돌아본다.
"여기 지하 1층이 동아리 방이에요. 언제 한번 놀러오세요."
거기가 학생 운동 집합소라는 거 알았더라면 거기에 발도 들이지 않았을 거다. 학생 운동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재현은 소속이 없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경찰서에서 조회를 했다가 재현이 이상하다는 걸 알게 되면 골치 아파질 일이었다. 영화 속에 나오는 신마냥 손가락 딱 부딪치면 눈앞에서 사라지고 그럴 수 있다면야 모르겠지만.
야심찬 계획과는 다르게 책상을 다 내린 후에도 주연은 도서관을 나갈 수 없었다. 도서관 열쇠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바지 주머니를 다 뒤지고 입고 있던 점퍼 주머니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기에 도서관은 6층이었다. 벽을 타는 기술 같은 게 둘에게 있을 리 없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도서관 안으로 어둠이 깔렸다. 불을 켜면 누군가 와서 문을 열어주겠지만 대신 집이 아닌 경찰서로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둘은 어둠 속에 있는 걸 택했다. 시야가 차단되자 후각이 예민해진 건지 이 때까지는 최루탄 연기 때문에 가려졌던 활자들의 냄새가 강해졌다.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닐까요?"
주연은 재현의 다친 팔이 떠오른 듯 불쑥 물었다. 제목이 보이지 않는 책 하나를 베고 바닥에 누워있던 재현이 천천히 눈을 떴다. 주연은 재현의 머리맡에 무릎을 모은 채 앉아있었다. 괜찮아요. 재현이 말했다. 주연이 어디 좀 봐요, 하면서 손을 뻗었다. 재현은 제 팔을 내어주는 대신 그 손을 꾹 잡았다.
"....."
"....."
"자꾸 떨길래."
주연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주연은 무서워하고 있었다. 죽은 친구를 떠올리면서, 그 친구가 아니라 제가 될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이 모든 공포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그 때에도 그랬다. 주연은 알지 못하는 어떤 순간에. 술잔을 건네는 주연의 손이 너무 떨려서 재현은 저도 모르게 그 손가락 위로 제 손가락을 겹쳤다. 어두운 조명이 주연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어냈다. 떨길래. 그 세 글자에 주연은 알 수 없는 표정을 했다.
다음 막이 오르고 새로운 배우들이 무대를 채웠다. 재현과 주연은 오래도록 손을 잡고 있었다. 그게 마지막일 줄은 둘 다 몰랐다. 재현조차도.
"자꾸 생각이 나서요."
"....."
"그 장면이.."
붉은 피가 <지금> 이 박힌 흰 티셔츠 위를 물들이고 각목같이 뻣뻣해진 몸이 제 몸 위로 기우는 그 순간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재생됐다. 주연은 손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다른 친구가 주연의 몸을 당겼다. 주연은 친구를 두고 가지 않으려 버텼지만 반대쪽으로 뛰어가는 사람들에게 떠밀렸다. 도서관이 있는 건물로 들어서며 뒤를 돌아봤을 때 쓰러진 친구의 모습은 군인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주연은 제가 그 곳에 대신 누워있는 상상을 했다.
"다른 걸 생각해요."
"어떤 걸요?"
손가락끼리 얽혀들었다. 가까이 붙은 주연에게서 불 냄새가 났다. 활자들의 냄새를 가리고도 남을만한 향이었다. 재현은 다시 감았던 눈을 떴다.
"노란 조명이 있었고요."
"....."
"사람들은 술을 마셨어요."
"......"
"무대를 가리는 천은 새빨간 색이었는데 움직일 때마다 먼지가 튀었어요."
"....."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고 공연을 했지만 누구도 신나지 않았어요."
"....."
"그 곳은 아주 시끄러웠지만 동시에 고요했어요."
"....."
"거기 우리가 있었거든요."
마지막 말은 하지 말 걸. 무심결에 튀어나온 '우리' 라는 단어에 재현은 놀라서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주연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재현은 눈동자를 살짝 굴려 머리맡의 주연을 올려다본다. 주연은 한 쪽 손을 재현에게 내어준 채, 무릎 위에 얹은 반대쪽 손 등 위에 턱을 올린 채였다. 눈이 마주지차 계속 하라는 듯 주연이 눈짓했다.
"이름을 물었어요."
"....."
"작은 탁자와 벽 사이에는 거미줄이 있었어요."
"......"
"술잔은 귀퉁이가 조금 깨져있었고 의자는 수평이 안 맞아 자꾸 삐걱거렸고."
"....."
주연의 몸이 툭 책장 쪽으로 기울었다. 잠이 든 모양이었다. 재현은 그제야 손을 놓고 일어났다. 주연이 곁에 벗어둔 점퍼를 몸 위에 둘러주려고 집어 들었다. 점퍼 안 쪽에 딱딱한 게 만져졌다. 재현이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캠퍼스의 어스름한 가로등 불빛이 겨우 점퍼 안 쪽을 비춰줬다. 바느질로 얼기설기 기운 안 쪽의 또 다른 주머니, 거기에 도서관 열쇠가 있었다.
"어떻게 찾으려고 여기에 놓은 거야."
허탈함에 웃음이 나왔다. 가로등 불빛이 웅크리고 앉아 잠이 든 주연의 몸을 비춰줬다. 아주 긴 밤이었다.
"형 어디서 태어났어요?"
"산부인과."
"...그건 저도 마찬가지고요."
"어? 너도?"
주연이 눈을 가늘게 뜬다. 과자 봉지의 배를 부욱 찢으며 재현은 웃었다. 사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생각할 시간을 버는 거였다. 주연의 질문은 처음부터 잘못됐다. 재현은 태어난 적이 없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기 시작했을 뿐. 그게 신과 인간의 다른 점이다. 그래서 신은 죽지도 않는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사라진다. 그런 맥락에서 재현은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건 갑자기 왜."
"그냥 형이랑 예전부터 알았던 사이였던 것 같아서."
"....."
"진짜 웃기긴 한데... 제가 무슨 생각까지 했냐면요."
긴장해서 입이 바짝 말랐다. 주연은 가끔 좀 엉뚱한 소리들을 늘어놓곤 했는데,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 잡는다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인데 정확히 맞춰버리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거기까지는 아직 시뮬레이션을 돌리지 못했다.
"제가 기억상실이라 형을 기억 못하는 거 에요."
...아, 걱정한 거 억울해.
"왜? 너 기억상실이야?"
"그럴 수도 있겠다는 거죠. 걱정할까봐 가족들은 다 저한테 숨기고."
"소설을 써봐."
"저 진지한데요."
바람이 휘잉 불어 머리카락을 날렸다. 파라솔 아래 플라스틱 테이블에 앉으면 갑자기 모든 말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지금이 그랬다. 재현은 꼬깔콘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고민했다. 절대 안 돼, 라는 마음과 동시에 그냥 해볼까... 싶은 마음이 공존했다.
재현이 잊을 수 없는 밤이 딱 두 개 있다. 1924년 경성의 술집에서의 어느 밤과, 1987년 도서관에서의 어느 밤. 이제는 세 개가 될 거다. 2023년 편의점 파라솔 아래의 어느 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너를 알았어."
"언제부터요? 저 신입생 때?"
"아니 그보다 더 오래."
"고등학생 때?"
"아니 그보다 더."
"...초등학생 때? 형 ㅇㅇ초등학교 나왔어요?"
"아니 그보다 더 더 더 더."
주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요? 그러면서 팩소주로 손을 뻗는다. 재현도 술기운을 빌리려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세 캔 째인데 이상하게 더 정신만 말짱해지는 기분이었다.
"형 진짜 저랑 같은 산부인과에서 태어났어요?"
재현이 심호흡을 했다. 아마 오늘도 아주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어쩌면 이 말을 하려고 99년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재현이 증발해버렸다. 주연은 혼란스러웠다. 재현이 사라지지 않았더라도 혼란스러웠겠지만 아예 사라져버리니까 정말로 혼란스러웠다. 긴 이야기의 끝에 재현은 말했다.
증거는 없어, 믿지 않아도 좋아.
나는 어쩌면 이 말을 하려고 99년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증거도 없고 항상 말꼬리 끝에 장난이 매달린 사람인데 왜 자꾸만 믿고 싶은지 모르겠다. 주연은 가방 뒷주머니에서 도서관 카드를 꺼내며 생각했다. 여름이 막 시작될 무렵 사라진 재현은 다시 가을이 와 개강을 할 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주연은 재현의 집에도 몇 번 찾아갔다. 주인아주머니는 요즘 재현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월세는 꼬박꼬박 들어오는 걸 보면 방을 뺀 건 아닐 거라고 했다.
사람을 불러 불법으로 문을 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걱정이 됐다가 슬펐다가 이제는 화가 났다. 도서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온 주연은 재현의 집 앞으로 찾아갔다. 현관문을 주먹으로 두들기고 귀를 바짝 댔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주연은 도어락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
정말 그럴 리는 없지만.. 진짜 아니겠지만..
주연은 제 생년월일을 입력했다. 5를 마지막으로 도어락을 닫자 띠리링, 하며 문이 열렸다. 주연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재현에게 제 생일 같은 거, 말해준 적 없다. 알려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거지만 파라솔 아래의 밤 재현이 했던 말들과 겹쳐지니 갑자기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할 만큼 두려워졌다.
잠금이 해제됐지만 문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재현의 말이 전부 다 진실이 되어버리면 어떡해. 주연은 그냥 몸을 돌렸다.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주연의 머리 위로 주연을 따라 불이 켜졌다 꺼졌다.
다시 재현의 집을 찾은 건 그로부터 일주일이 흐른 후였다. 주연은 심호흡을 했다. 파라솔 아래의 재현이 그랬던 것처럼 여러 번. 비밀번호 여섯 자리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현관 앞이 깨끗했다. 재현이 자주 신고 다니던 운동화는 없었다.
크림색 러그를 밟고 안으로 들어서며 주연은 형, 하고 재현을 불렀다. 금방이라도 재현이 왜, 하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집 안에는 별다른 온기가 없었다. 어쩐지 싸늘하게까지 느껴졌다. 잘 정돈된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렇다고 재현이 어디에 갔는지 알 수 있을만한 실마리는 없었다. 혹시 짐까지 다 싸서 나갔나 싶어 옷장 문을 벌컥 열었다. 깔끔하게 걸려있는 옷들 사이 주연은 잘 접혀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
얼룩덜룩 묻은 핏자국이 채 지워지지 않은 <지금> 이라고 적힌 새하얀 티셔츠. 옆구리가 조금 찢어진 티셔츠. 재현의 설명 속, 도서관 어디선가 주연이 가지고 있던 그 티셔츠.
"형 있잖아요."
주연은 재현의 침대 위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본다. 재현이 정말로 신이라면 제 말을 들을 수도 있을까 싶어서. 아예 미쳐버렸나? 싶었지만 지금 주연이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오전에 학과 사무실에 갔다가 이재현이라는 학생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주연은 제가 아주 긴 꿈을 꾼 건 아닐까 생각됐다. 도서관에서 나오던 길에 제게 짜증을 내던 얼굴, 꼬깔콘 봉지를 뜯으며 웃던 얼굴이 꿈치고는 너무나도 선명했지만.
생각해보면 재현은 너무 많이 저에 대해 알았다. 가끔 허공에서 마주치는 눈이 많은 걸 얘기하는 듯싶었다. 그 모든 이유를 알게 됐지만 그렇다고 또 다 알게 된 것도 아니었다.
"혹시 제 말 듣고 있어요?"
시계 하나 없는 방 안은 지독하게 고요했다. 주연은 눈을 감았다. 이런다고 재현이 뿅, 하고 나타날 것도 아닌데.
"어디갔어요?"
주연이 손을 폈다. 내내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 마냥 꾹 쥐고 있던 티셔츠도 함께 펼친다. 생각해보니 도서관에서의 그 밤 이후의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재현이 정말로 지하 동아리 방으로 티셔츠를 돌려주러 왔었는지, 그 이후로 저와 재현은 어떻게 됐는지. 하기야 돌려주러 왔었더라면 이 티셔츠가 여전히 재현에게 있을 리는 없지만.
"도망갔어요?"
100은 아니더라도 99까지는 이해했으니까 그냥 다시 나타났으면 좋겠다.
"형 이름은 재현이잖아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냥 다시 나타나줬으면 좋겠다. 주연이 다시 눈을 감았다.
서점으로 들어서며 주연은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었다. 한 쪽 어깨에만 메고 있던 가방 앞 지퍼를 열어 그 안으로 아무렇게나 쑤셔 박았다. 눈이 온다더니 내내 하늘이 흐렸다. 집으로 돌아갈 때 차 안 막히게 조금만 늦게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반 층을 내려간다. 베스트셀러 코너에 제 책이 있었다. 멜로불패 딱딱한 표지를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며 주연은 피어오르는 웃음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클래식을 들으며 표지를 넘겨본다.
보고 싶은 외계인에게
주연은 도로 표지를 덮고 몸을 돌렸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다시 반 층을 올라온다. 차 키를 어디에 뒀나 잠시 잊어버렸지만 정신 차려보니 제가 왼손에 내내 쥐고 있었다. 목도리를 꺼낼까 하다가 그냥 내버려뒀다. 차로 걸어가는 내내 주연은 재현을 생각했다.
어떤 여름밤에 꿨던 꿈처럼 선명했지만 동시에 현실 같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속 안에 품었던 이야기를 적은 건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이었다. 언제든 다시 꺼내볼 수 있으니까. 주연은 재현과 다르게 신이 아니라 아마 먼 훗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재현에 대해 아예 잊을지도 모른다. 재현이 사라진 것만큼이나 잊어버릴 게 두려웠다.
주연이 재현을 잊어버렸을 때에도 재현은 계속해서 주연을 기억할까.
다행히 주차장에 차를 대자마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꽤 운이 좋은 날이었다.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온 주연은 곧장 보일러를 올리고 쇼파에 앉았다. 테이블 위 액자를 집어 든다. 액자 속엔 사진 대신 신문 기사가 있었다.
사복 형사 피하려 6층 도서관에서 뛰어내려 참변
.
.
- 했다. 사망한 학생은 A 대학교 학생으로 밝혀졌으며 입고 있던 옷 안 쪽 옷감을 덧대어 만든 새 주머니 안에는 영화 동아리로 위장한 학생운동 동아리 <지금> 동아리 원들의 명단이 적힌 수첩이 있었다.
- 예정이었다. 다만 경찰은 명단에 적힌 이름 중 유일하게 A 대학교 학생이 아니며 신원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한 남성을 여전히 수배중이다.
주연은 여전히 재현을 자주 떠올리곤 했다.
친구들과 헤어져 와인 바를 나왔을 때는 11시가 좀 넘어있었다. 술을 한 잔 마셨기 때문에 주연은 택시를 잡아탔다. 술기운 때문인지 그렇게 많이 춥지는 않았다. 창밖의 오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주연은 집 근처에서 일부러 내렸다. 좀 걷고 싶었다. 골목으로 들어오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후 늦게까지 내린 눈 때문에 바닥이 미끄러웠다. 10분 쯤 지나면 해가 바뀔 거다. 2033년. 그 낯선 숫자들을 입 안으로 굴렸다. 재현이 사라진지 십 년이 되어버렸다.
코너를 돌아 걷던 주연의 시선이 가로등 아래를 향했다. 이 쪽을 등지고 선 어떤 남자의 뒷모습을 힐끔 본다. 그냥 지나쳐 가려다가 그대로 멈춰 섰다. 갑자기 이유도 알 수 없이 걸음이 멈춰졌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마치 불덩이를 삼킨 것 같기도 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
시선을 내려 손에 든 책을 바라본다. 맨 첫 장을 읽었을까. 보고 싶은 외계인에게 그 얘기를 봤을까.
"안녕, 주인공."
"....."
"....."
"....."
"....."
"....."
"화난 건 처음 보네."
웃는 모습, 우는 모습 다 봤는데 화가 난 건 처음 본다. 그게 어쩐지 반가웠다.
"내가 왜 외계인이야."
봤구나. 주연은 주저앉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얼굴을 보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는데 막상 눈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재현을 두들겨 패고 싶었다. 강하게 드는 그런 욕구에 주먹을 세게 쥐자 그걸 눈치 챘는지 재현이 황급히 붙어 서서 손을 잡았다. 재현의 손은 따뜻했다. 그것 때문에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어떻게 왔어요?"
"버스타고."
"....."
"2411번이 이 앞에서 내려주던데."
"...짜증나요."
"제목은 마음에 들더라."
"....."
"벌을 받는 게 아니라 사실은 내가 이겨서 상을 받고 있는 것 같거든, 지금."
사랑은 지지 않는다. 어떤 순간에도 어떤 모양으로건. 그제야 눈물이 났다. 이상하게도. 재현이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천천히 주연의 뒷목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1924년에도, 1987년에도, 2023년에도 이걸 하지 못하고 사라진 게 내내 아쉬웠다. 1924년의 재현도 1987년의 재현도 2023년의 재현도 후회했다. 2033년의 재현은 후회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소리 내 말하는 언어 대신 숨으로 얘기하고 싶었다. 아주 많이 사랑한다고.
또 하나의 긴 밤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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