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친구 중 하나의 별명이 호구 킴이었다. 본인은 절대 아니라며 니들이 사랑을 아냐고 노발대발했으나 다들 귓등으로 듣고 넘겼다. 그 터무니없는 부정의 말은 재현의 귓등도 몇 번 스쳤다. 재현이 보기에도 호구가 맞았으므로. 연습 생활과 병행하느라 학교를 비운 시간이 많았던 재현마저 듣고 혀를 내두른 에피소드가 수두룩했다. 시간 쪼개 가며 사느라 항상 피곤했던 재현은 하품을 달고 살면서도 호구 킴의 하소연을 경청했다.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재현에게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다 하루는 참다못해 조언했다. 걍 고백을 해. 호구 킴이 오늘이야말로 꼭 건네주고 말겠다던 피크닉을 도로 들고 교실로 돌아왔을 때였다. 내정자에게 도달하지 못한 피크닉은 재현이 대신 처리했다. 호구 킴은 동년배면서 몇 십 년은 더 산 것 같은 말투로 답했다.
우리 재현이. 사랑 앞에선 다들 자신을 잃는 거란다.
우웩. 재현은 그 말에 토하는 시늉으로 답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쟤가 분명 저런 성격은 아니었는데. 매사에 호불호가 확실하고 적극적이었는데 꼭 좋아하는 애 앞에만 가면 쪼다같이 굴었다. 거기까지 곱씹다가 재현은 다짐했다. 내가 앞으로 존나게 사랑에 빠져도 쟤처럼 굴진 말아야지. 나를 잃지 말아야지.
사실 다짐이랄 것도 없었다. 실제로 그랬다. 본인 성격 다 죽이고 타고난 성정 바꿔가며 자신을 잃기엔 재현은 자기애도 높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 터라 호구처럼 굴고 싶어도 어려웠다. 연애라고는 짝재라고 불리던 중학교 시절에 딱 두 번. 그 때도 삼류 연애 드라마에서나 들을 법한 말들로 차였다. 가령 넌 나 안 좋아하는 거 같아, 너랑 똑같은 사람 만나 봐 따위의 것들. 어른 흉내 내는 이별 멘트에 어른 흉내 내며 수긍했던 자신이 우스운 건 차치하고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랑에 호구처럼 군 적이 없다는 거다.
그래서,
이재현은 지금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이십 분 전 올라탔던 밴에서 도로 내렸다. 이십이 분 전 사장님에게 우렁차게 인사 박고 장렬히 퇴장했던 음식점으로 머쓱하게 웃으며 다시 들어섰다. 프라이빗 룸까지 빠르게 걸어가 미닫이문을 확 제끼자 소란스럽던 내부가 금세 조용해진다. 양반다리로 앉아 눈 동그랗게 뜬 찬희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물어온다.
“뭐야. 송도 간 거 아니었어?”
“엉. 아니었다.”
“뭐야. 이현재 취했냐?”
이번엔 답 대신 허공에 손 휘적거리기 스킬로 때운다. 동시에 사팔뜨기 지망생 마냥 내부를 빠르게 훑는다. 돌연 사라진 놈이 다시 나타나니 올려다보는 멤버들의 표정이 참 가관이었다. 재현은 이쪽부터 저쪽까지 전부 훑은 뒤 미간을 좁혔다. 못 찾기도 어려운 그 얼굴이 없다. 그래서 신발 대충 벗어던지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대로 가장 구석까지 들어가 안에 딸린 방의 손잡이를 잡아채자 바투 앉아있던 준영이 종아리를 붙잡았다.
“안에 주연이 자는데?”
“알어.”
“뭘 알어. 깨우게? 우리 더 있다 갈 건데.”
이번엔 종아리 털기 스킬을 구사한다. 탈탈 털자 준영의 손이 나가떨어졌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이 작은 탓에 대각선으로 누운 인영이 보인다. 의도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레 웃음이 샜다. 소리 내 웃은 것도 아니면서 누가 들었을까 빠르게 등 뒤로 문을 닫자 길쭉한 인영도 다시금 어둠에 먹힌다.
재현은 휴대폰 밝기를 최대한 낮춘 채 가까이 다가섰다. 한 해 마무리가 좋았던 탓에 멤버들 웃음소리가 유독 컸다. 애 잔다고 막아선 거 치고 방음 효과라곤 없다. 재현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가까이 붙어 쪼그려 앉았다. 그 김에 말랑한 볼 찌르며 말 붙여 본다.
“쭈연이.”
그 말에 작게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옷이라도 말아서 베고 자지.”
“.........”
“집 간 사람 다시 오게 해놓고는 잠이 오지, 아주?”
엄한 형 코스프레는 거기서 엔딩이다. 자꾸 웃음이 실실 새는 탓에 쓰잘 데기 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기로 했다. 꽉 다물린 긴 눈매를 잠시간 바라보다가 고개를 한껏 내려 주연의 귓가에 속삭였다.
“형 왔다고.”
그제야 고요히 감겨있던 눈이 꿈틀거리다 이내 떠졌다. 잠과 술에 취해 나른한 눈꺼풀이 느릿하게 두 번 꿈뻑인다. 그게 꼭 제 심장을 간질이는 것 같았다. 재현은 말없이 바라보다가 다시 한번 속삭거렸다.
“나 왔다고.”
“....재현이 형이다.”
“그랴. 나다.”
헤헤. 정직한 웃음소리와 함께 주연은 다시 눈을 감는다.
“어쭈. 또 감어?”
재현은 그 행태에 헛웃음 쳤다. 콘서트도 잘 마무리됐고, 연말 무대를 제외하면 행사나 비공식 스케줄 외에 내년 대비 준비가 전부였다. 운 좋게 연말 회식과 스케줄 비는 날이 붙어 본가라도 다녀올 생각이었다. 부모님 못 뵌 지도 오래됐고, 뭐.. 누나도 못 본 지 오래됐고 무엇보다 다롱이가 보고 싶었으니까. 끝까지 달려봐야 부어라 마셔라가 전부인 걸 아는데도 또 집에 일찍 가네, 흥 깨네, 의리 없는 하남자네 하는 돌림 노래 부를까 봐 찬희에게만 귀띔하고 밴에 올라탄 재현은 고속도로 들어가기 직전에 유턴했다.
ㅡㅡ
갓네? ㅋㅋ 미어ㅜㅡㅡ..
취한 티 팍팍 나는 주연의 카톡 하나 때문에. 헉.. 형 저 지갑 두고 왔어요, 라는 먹히지도 않을 발연기에 흔쾌히 차를 돌린 매니저 형은 바보 혹은 천사 둘 중 하나였다. 술 깨면 기억도 못 할 텐데. 눈앞에 카톡 창 들이밀어도 머리 한 번 긁적이고 말 놈인 걸 알면서도 만에 하나 정말 미움받을까 봐. 그게 죽기보다 싫었던 까닭이다. 안전 운전한다고 서행하는 매니저 형에게 닦달할까 봐 엉덩이나 들썩이던 남의 속도 모르고 잠에 든 이는 참 매정했다. 그러고 보면 항상 매정했다. 근데 또 밉지 않아 곤란했다.
“다시 왔으니까 나 미워하지 마라.”
그래서 잠든 걸 알면서도 공연히 뱉어본다. 그 말에 주연이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이제는 어둠에 완벽히 적응한 눈 덕에 주연의 얼굴이 선명했다.
“형이,”
“아우 아니 뭔 술 냄새가... 얼마나 마셨어.”
“형이 살짝 밉긴 해.”
“..........”
“아주 미운 건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이미 미움을 받고 있었네, 내가. 씁쓸함에 입술만 적셨다. 겨울이라 터서 뻣뻣한 입술이 부자연스럽다. 그리고 재현도 부자연스러웠다. 주연이 아닌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면 재현은 뭐라고 받아쳤을까. 지금은 적당한 말을 고르지 못해 괜히 주연의 머리칼을 정리할 뿐이다. 가지런한 머리칼을 한참이나 의미 없이 만져대고는 벽에 바짝 붙어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방이 좁아 주연이 팔을 뻗고 꿈틀댈 때마다 재현의 무릎에 와 부딪혔다. 급기야는 재현의 바짓단을 붙잡았다. 잡고 펄럭이며 장난을 걸어오길래 무릎 흔들며 장단 맞춘다. 그러다 다시 잠에 빠진 건지 얌전해진 큰 손을 바라보다가, 재현은 나지막하게 불렀다.
이주연.
작게 불러보는 그 이름이 참 둥글다. 재현이 혀 위에서 하도 굴린 탓이다. 소리 내어 말하기도 아까운 그 이름의 주인은 반응이 없다. 다시 잠에 들었나. 그래서 지켜보다가 흘려보냈다. 들어주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 빚은 듯한 예쁜 귀에는 일절 닿지 못하길 바라면서.
“형은 그래도 니가 좋으니까.”
“.......”
“적당히 미워해라.”
말 끝나기 무섭게 주연의 눈가가 움찔했다. 재현은 놀라 호흡하는 법도 잊고 바라보다가 일정한 높낮이로 움직이는 가슴팍에 안심했다.
재현은 주연을 덧그린다.
아주 오랜 시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눈, 코, 입을 완성하고 턱으로 진도 빼려던 차 영영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방문이 천천히 열렸다. 준영이었다.
“너 앉아서 뭐 하냐.”
“걍. 왜. 벌써 가?”
“벌써는 뭔 벌써여. 주연이 깨워줘, 가게.”
“...쭈연, 숙소 가자.”
“들은 척도 안 하는데.”
“걍 내가 업을게. 얹는 거만 도와주라.”
그 말에 준영이 작은방 안으로 들어섰다. 몇 번이고 업어 본 몸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같다. 스케줄이 바쁘기도 했고, 콘서트 이후 독감으로 고생했던 주연은 실제로도 살이 많이 내렸다. 이 얼굴이 더 작아질 수도 있네. 재현은 부러 입으로 영차, 소리를 내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손바닥에 닿는 엉덩이도 이전보다 더 살이 없는 느낌이었다. ...이 엉덩이가 더 납작해질 수도 있네. 그런 생각이나 하며 조던 뒤축 구겨 신고 밖으로 나서자 업힌 주연을 본 멤버들이 몸을 제껴가며 웃어댔다. 몇은 카메라까지 들었다. 잘 찍으라고 자세까지 잡아주자 주연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영양가 없는 이야기나 하며 밴을 기다리던 사이 가장 먼저 도착한 건 주연의 숙소로 향하는 밴이었다. 셋 먼저 탄 후 주연을 태우려고 몸을 틀자 그다음 밴에서 학년이 고개만 쏙 내민 채 물어온다.
“형! 송도 갈 거지?”
“엉. 나 걍 택시 타고 갈 테니까 바로 가.”
“오케이. 조심히 가고.”
“와. 진심 두 번을 안 묻네.”
“자 드가자.”
그 말과 동시에 창문이 쏙 올라간다. 재현은 헛웃음 치며 고개를 젓고는 주연이 타고 갈 밴으로 다시 몸을 틀었다.
“야 콥아. 주연이 좀 잡아봐.”
주연이 편하게 탈 수 있도록 뒤도려는데 주연의 두 다리가 허공에서 거세게 덜렁였다.
“어? 야. 가마이써. 너 깼어?”
고개만 돌려 묻자 주연은 답 없이 재현의 목을 더 꽉 끌어안는다.
“너 신발 없어 지금. 기다려.”
“나도 갈래.”
“어딜.”
“형 따라 갈래.”
“어디 가는 줄 알고 따라온대.”
“뭐가 중요하지 그게.”
“넌 뭔.., 진짜.”
이미 주연과 숙소를 함께 쓰는 멤버들은 다 승차한 상황이었다. 재현이 별다른 답을 주지 않자 주연이 한 번 더 다리를 휘저었다. 조금 가벼워졌다고 해도 이런 몸부림이 다 감당 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무게 지탱을 위해 보폭을 넓게 벌리려던 차, 한 번 휘청인 재현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야 걍 가라. 나 얘 델꼬 송도 갈게.”
“엥. 주연이랑?”
“다롱이 보고싶댄다.”
암튼.
“간다, 그럼.”
이래서 한 그룹인가. 어떻게 두 번 물어보질 않지. 영재가 내려 주연의 신발만 신겨주고는 다시 올라탔다. 그리고 쌩 떠나버린 밴 세 대. 다행히 가까운 곳에 택시 승강장이 있어 그리로 향했다.
그리고 지금.
재현과 주연은 택시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차가 방지턱을 넘으며 덜컹거릴 때마다 주연의 작은 머리가 재현의 어깨 위에서 나부낀다. 재현은 이따금 흘러내리는 주연의 긴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끌어당겨 제 오른쪽 어깨에 더 갖다 붙였다. 아무런 사심이 담기지 않은 척 말랑한 턱살도 한 번 건드려본다. 머리카락 만지다 턱을 만지는 건 경로가 상당히 불순하나 업으면서 한 쌩고생과 퉁치기로 했다.
귓가에서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주연의 숨소리.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심야 라디오. 잠시의 공백을 메우는 창밖 소음. 어느덧 올림픽대로였다. 가만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재현은 문득 서글프다. 불빛들이 만들어낸 야경이 너무 예쁜 까닭이다. 주연도 봤으면 했다. 주연은 그런 낭만이 있는 사람이니까. 혼자 보는 게 아쉬워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 재현은 숨을 헉 들이켰다.
“아 왜 말도 없이 깨고 그러세요.”
“방금 깼엏.”
“밖에 봐봐. 이쁘지.”
“...형 저런 거 보고 예쁘다는 생각도 해?”
“날 너무 띄엄띄엄 보네.”
“그런갛.. 형.”
“엉.”
이미 소리의 조화가 완벽했던 공간에 주연의 목소리가 섞여들자 더할나위 없었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목소리는 묘했다. 그리고 평소보다 더 고요했다. 재현은 이따금 라디오 음량에 제압당하는 작은 목소리를 더 많이 발굴하고자 고개를 꺾었다.
“형 지금도 나 좋아요?”
“왜.”
“그냥.”
“비밀인데.”
“취사하네....”
“취사는 음식 만드는 거.”
장난이 못마땅했는지 주연은 답이 없다. 다시 힐끔 내려다보니 눈이 감긴 채였다. 술 한 잔도 입에 대지 않은 재현은 솔직하게 털어놓기에 변명거리가 없었다. 창밖을 바라본다. 불빛들이 빠르게 뒤로 밀려난다. 괜히 아쉬워 고개까지 돌려가며 이미 지나쳐간 불빛들을 다시금 눈에 담았다. 늦은 시간이라 차가 쌩쌩 달렸다. 어쩌면 예상 시간보다 더 빠르게 도착할지도 모르겠다. 이 택시는 종착지가 있고, 재현은 그곳에 내릴 수 있다. 이 현실은 참 제 사랑과 상반됐다. 재현의 사랑은 종착지가 있으나 영원히 그 주변을 배회할 운명이다. 영원을 믿는 재현에게는 참 슬픈 명제였다. 참인 명제였으므로.
3년 전의 겨울, 재현은 제 마음을 인정했다.
건네주고 싶었지만 제 마음이 드러날까 싶어 미처 주지 못했던 사소한 물건들이 방 한편에 쌓여갔다. 과거와 달리 거리낌 없이 했던 말들에 주연의 반응을 살피게 됐다. 재현은 그 후로 호구 킴이 했던 말들을 자주 떠올렸다. 확실히 재현은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좋았다. 다르게 본다면 주연이로 채워지고 있는 거니까.
2년 전의 겨울, 재현은 말했다.
주연아. 한 번 안아봐도 되냐.
좋아해.
그래서 결국 재현의 마음속에 꽁꽁 묶어두었던 그 문장들마저 주연의 것이 되어버린 거다. 재현의 낮을 벅차게 하고 밤을 설치게 했던 그 모든 문장들이.
기억나는 건 토막 난 문장과 곤란함으로 물들어 아랫니를 보이던 주연의 표정이 전부다. 그 후로 되도록이면 술자리에 오래 있지 않으려고 했다. 꼭 있어야 할 때면 술은 거의 입에 대지도 않았다. 그 덕에 의리 다 뒤진 것도 모자라 분위기 깨는 놈이 됐어도 곤조 있게 밀고 나갔다. 술에 취해 고백한 멤버. 이 정도로 최악이기도 어렵다. 충분히 이기적이었고 지나치게 욕심부렸으므로 감내해야 했다.
그래서 그런가. 주연의 주위만 빙빙 돌다 멀미하고 끝내 토기가 올라와도 괜찮을 거 같았다. 아니, 주연의 궤도라고 생각하니까 정말 다 괜찮았다.
“도착했습니다.”
그럼에도 슬픈 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인 거고. 재현은 택시비 계산 후 주연을 깨워 함께 내렸다. 일언반구도 없이 데려온 손님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 집은 공기가 찼다. 막내한테 일절 말도 없이 국내여행 가는 건 뭐지 진짜. 덕분에 곤란한 상황은 면했으나 여전히 기가 찼다. 추운지 자꾸만 팔을 쓸어내리는 주연을 위해 보일러부터 풀 가동하고 갈아입을 옷과 함께 욕실로 집어넣는다.
본가에 있는 주연이라니.
믿기지 않아 씻고 여분의 침구를 꺼내는 사이에도 입꼬리 한쪽이 자꾸만 사선을 그렸다. 함께 침대에 눕는 동안에도 그랬다. 이렇게 바로 옆에 붙어 잔 게 얼마 만인지. 괜히 연습생 시절 생각이 나 센치해졌다가도 몸을 뒤척일 때마다 닿아오는 맨살에 모든 잡생각이 휘발됐다. 그냥 더 닿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무한 루프에 갇힌 것마냥 반복하다가 이제는 진짜 자야겠다 싶어 눈을 감았을 때 포근한 음성이 귓가에 와닿는다.
“형.”
“안 잤어?”
“아까 많이 자서 잠이 안 와요.”
“많이 자긴 하더라. 근데 너 눈 감으면 구라 안 치고 일 분 안에 다시 잔다.”
“형. 있잖아.”
“엉.”
“형 저 좋아하냐고요.”
“아 거 집요하네.”
“형이 대답만 한 번에 했어도 집요할 일 없지.”
“뭔 말이 듣고 싶은데.”
“솔직한 대답.”
“감당은 되고?”
그렇게 물었으나 어쩌면 감당이 안 되는 건 자신일지도 몰랐다.
“대답 듣고 싶어요.”
왜 주연은 자신을 자꾸만 들쑤실까. 주연은 근래 들어 더 그랬다. 재현은 고개를 돌려 주연을 바라본다. 재현을 등지고 누운 주연의 뒤통수가 작고 동그랬다.
“비밀이야.”
“......형.”
그 형이란 단어가 대체 뭐라고. 주연이 발음하면 너무 달아서 귀가 아팠다.
“화보 촬영하면서 몇 번 만난 사람이 있는데.”
“엉.”
“그 사람이 같이 밥 먹재요. 둘이.”
재현은 아예 주연 쪽으로 자세를 고쳐 누웠다. 곧게 드러난 목뼈를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답했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아직 답 안 했는데. 저 갈까요?”
“가지 말라면 안 가게?”
“어떨 거 같은데요.”
“진심 문제 내는 거 왤케 좋아하는데.”
“아무튼. 나 가?”
“가고 싶으면,”
그렇게 말하는데 주연이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무방비한 상태로 마주한 얼굴에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간지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행동에 믿는 신도 없으면서 어둠에 보이지 않았길 기도한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유리알같이 빛나는 주연의 눈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곧바로 기도를 철회했다. 가능성도 없는 일을 바라며 무신론자 가오 상하게 할 수는 없었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재현도 맞받아쳤다.
“가고 싶으면 가. 내가 뭐라고 이래라저래라를 하냐.”
“....갈게요, 그럼.”
그 말과 동시에 주연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누구 하나 피하는 사람도 없이 끈질기게 붙는 시선 사이.
“근데 주연아.”
“왜요.”
“가도 되는데.”
“아까 말했잖아 그건.”
“갔다가 다시 와.”
욕심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거면 돼.”
가끔은 그게 참 어려웠다.
“이유는요. 그것도 비밀?”
“몰라, 인마.”
재현은 그렇게 말하며 주연의 얼굴을 정면에서 쓸어내렸다. 급습에 아잏, 하고 째려보던 주연은 다시 뒤돌아 누웠다. 한참이나 주연을 바라본다. 방울처럼 샘솟는 생각은 그거 하나였다. 난 정말 그거면 될 거 같은데. 무작정 왼다. 최면 걸듯.
그런 생각을 하다 저도 모르게 잠에 들었다. 일어났을 때 주연은 없었다. 곱슬머리 마구 헝클이며 거실로 나갔을 때, 어젯밤 내어준 옷이 잘 개어져 있는 걸 보고 꿈이 아니었구나 싶은 거다.
재현은 소파에 가부좌 틀고 앉아 주연과의 대화창에 정확히 열 번 들어갔다.
숙소, 숙소로, 숙소 갔, 주연아 밥 먹고 가지, 왤케 일찍 감? 꿈꾼 줄 ㅋㅋ, 숙소 갔어?
결국 아무런 문장도 보내지 못하고 휴대폰을 내려놨다. 대충 던져놓고 소파에 길게 눕는다. 오랜만의 휴식이니 정신이고 몸이고 전부 피곤해 다시 속수무책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잠깐 잠들었다가 또 깨고 다시 잠들고. 그렇게 병든 닭처럼 내리 자다 깨다만 반복하다가 휴대폰 진동 소리에 눈을 슬며시 떴다.
주연이
재현은 빠르게 받아들었다.
“어, 쭈연.”
- 자고 있었어? 그럼 나중에,
“아녀. 말해.”
- ....형.
“엉. 너 또 뭔 말 하려고 분위기 잡냐.”
- 재현이 형. 그 사람이 저 좋대요.
아 진짜.
팬싸인회에서도 해본 적 없던 말이 여기서 나올 뻔했다. 재현은 느릿하게 상체를 세워 앉았다. 그새 또 밤이었다. 사방이 온통 어둡다. 창밖으로 보이는 야경이 화려하다. 아, 집이 조금 춥다. 의식적으로 그런 생각들이나 해댔다.
- 저 만나보고 싶대요.
그러나 그것도 결국 물거품이었다. 주연의 말들은 자신을 우주로 보내버리다가도 맨틀 속에 곤두박질치게 만든다. 순간적으로 목이 멨으나, 재현은 의연하게 말했다.
“너는.”
의연하게.
“너는 어떤데.”
- 그게 궁금해요?
“난 항상 이게 궁금했는데. 니가 좋은지, 싫은지.”
- 좋으면요.
아. 얼굴을 쓸어내렸다. 감정의 홍수는 위험하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몽땅 휩쓸렸다. 서서히 발 디딜 곳이 사라지고 있었다.
“내가 조금 울어야지 뭐.”
- 그게 다야?
“일단 지금은.”
- 알았어.
“...그랴."
- 푹 쉬고요. 스케줄 때 봐요.
대답도 전에 전화는 끊겼다. 아쉬웠으나 차라리 잘된 일이다. 더 이상 내어줄 말들이 없었으니까. 얼떨떨했다. 이런 가정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어 실감도 나지 않는다. 그래도 어차피 결론은 하나였다. 나는 니가 먼저라, 니가 좋은 게 내가 좋은 거야. 내 우선순위가 너야. 주연의 행복이라면 마땅히 응원할 일이다. 캘린더 앱에 들어가 스케줄이나 확인한다. 날짜를 셈한다. 이만큼이나 지나야 주연이를 볼 수 있구나.
*
연말 무대 준비를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을 비우고 싶어서 더 죽어라 했는데 연습이 끝나면 할당량을 꼭 채우고 말겠다는 듯이 주연이 생각만 했다. 연습이고 실전이고 붙어있을 시간이 꽤 될 줄 알았는데 인원이 많은 탓에 뭐든 교대로 하다 보니 짬도 안 난다. 이따금 혼자 앉아 있는 주연이를 발견해 다가갈까 싶어도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은은하게 웃고 있는 걸 보니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벌써 1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꼭두 새벽부터 사전 녹화로 바빴고 이제야 여유가 난 참이었다. 본무대 전까지 꽤 시간이 남아 멤버들은 방송국 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자기 바빴다. 잠시 정신 좀 차려보겠다고 찬바람 쐬고 들어온 사이 좋은 자리라고는 다 놓쳐버려서 내 집 마련을 위해 발품 팔던 때.
“.......”
“.......”
구석 쪽방에서 주연을 마주한다.
주연은 재현을 한 번 바라보고는 큰 손들어 간단히 인사하고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재현은 아무렇지 않은 척 꾸며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주연이 깔아놓은 초록색 매트 위로 엉덩이를 붙였다.
“나도 좀 눕는다.”
“엏.”
다시 침묵.
주연과 이렇게 어색할 때가 있었나. 허튼 말 나올까 봐 입 닥치고 있던 때도 있었으나 이렇게까지 불편하게 말이 없던 적은 처음이라 이 상황이 더 의식됐다. 어떤 말이라도 하고 싶어 대가리 열렬히 굴리는 사이 주연이 선수쳤다.
“저도 좋은 거 같아서요.”
“어?”
“저도. 좋은 거 같아서.”
“아, 엉.”
“제야의 종 듣고 고백할 거예요.”
그런 결심마저 주연이 다워서 웃음이 샜다. 그리고 슬펐다. 사랑 앞에서 한결같은 모습이. 참 못나 우습기까지 한 생각도 들었다. 주연아. 너도 너 자신을 좀 잃어주지. 조금만 용기를 잃어보지.
“좋아하겠네, 그 사람.”
자신을 좀 잃다 못해 완전히 잃어버린 재현은 그런 같지도 않은 말대꾸나 했다. 그리고 다시 침묵. 재현은 자겠다는 의사를 표현하듯 그대로 뒤로 누워 눈을 감았다.
제야의 종이 치면 주연의 사랑이 시작되나.
새해를 밝히는 그 종소리에 특별한 의미를 둔 적은 없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다를 거다. 어쩌면 이재현 인생 종 치는 소리가 되지 않을까.
차라리 잠에 들고 싶었으나 그것마저 쉽지 않다. 이따금 주연이 핸드폰 액정을 톡톡 건드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어떻게든 다른 생각으로 돌려보려는데 그럴수록 생각이 한 곳으로 집중됐다. 게다가 상상력이 좋은 편도 아니면서 자꾸만 주연의 상대가 그러졌다.
왜 주연이 자신만의 종착지라고 생각했을까. 왜 주연이가 계속 혼자일 거라고 생각했을까.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주연이는 어떻게 웃을까. 어떻게 사랑을 속삭이고 귀담아들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런 불순한 마음을 가지고도 주연의 곁에 있어도 되는 건가. 좋아하는 상대가 생겼는데 저를 의도적으로 피해버리는 건 아닐까. 잠깐 말을 섞지 못하는 사이에도 속이 그렇게나 상했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러다 결혼까지 하게 된다면. 서로를 평생의 반려자로 삼는다면. 그래서 형이랑은 더 가까이 지낼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한다면. 아주 정당한 이유들을 토대로 자신의 궤도에서 나가달라고 한다면. 욕심을 꾸역꾸역 눌러내리며 지켜보는 행위조차도 할 수 없게 된다면.
과연 조금만 울 수 있나, 내가.
그 생각에 도달하자 눈이 번쩍 뜨였다.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아주 먼 미래까지 상상의 나래를 펼칠 동안 주연이 나가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지 방 안엔 재현만 존재했다. 급기야는 손이 떨렸다. 주연이를 찾아야 한다. 그렇게 쪽방의 문을 열었을 때는 예상에도 없던 인물과 마주했다.
“스탠 바이 하실게요.”
아.
재현은 절망한다.
전 출연진이 무대 위로 오르는 인터뷰 타임.
네. 다가오는 새해는 푸른 용의 해라고 하는데요! 우리 용띠 출연자분들 인터뷰를 안 해볼 수가 없겠죠?
불필요한 말들은 전부 소음으로 밀려난다. 주연이 마음을 전하기 전에 제가 먼저 전해야 했다. 복잡한 생각들과 함께 자꾸만 주연을 돌아보던 때, 정신을 차리고 나니 재현은 저도 모르는 새 기계처럼 카운트다운을 외치고 있었다.
3 !
2 !
1 !
해피 뉴 이어!
이재현은 지금 해피한가?
NO..
닿지 못한 전화가 벌써 세 건.
주연은 전화도 받지 않는다.
“상연이 형. 주연이는?”
“화장실 갔겠지.”
“전화도 안 받는데.”
“아무래도 화장실이면 못 받을 수 있지. 야 너는 또 어디 가. 곧 올라가야 돼.”
“형! 금방! 금방 올게!”
재현은 복도로 나가 빠르게 걸었다. 속으로는 우르시는 중. 전화가 걸리는 걸 보면 상대랑 전화하고 있는 것 같진 않은데. 재현은 급한 대로 카카오톡을 켰다. 손가락을 바삐 움직이며 마찬가지로 빠르게 걸었다.
야 ㅈ얀
야 주연
주연아
말풍선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숫자 ‘1’이 야속해지는 순간.
내 카톡 보고 있지
나 많이 울 거 같아
나 존나 하나도안괜찮을거같아ㅔ
좋아해
전화해줘
형한테 전화해
연이어 뜨는 알람에 주연은 맥이 풀리듯 웃고 마는 거다.
이런 확답이 필요했으니까.
- 이주연! 너 전화를 왜 이렇게,
“이재현.”
- 뭐야.
“형이 갔다가 오기만 하면 된다고 했지.”
주연은 너무나도 오래 기다렸다. 그래서 재현의 말을 듣기도 전에 덧붙였다.
“난 가기 싫어서.”
단호하게 말해야 하니 성대에 단단히 힘을 실었다.
“형이 와.”
- ....
“형이 나한테 와.”
전화 너머 들려오는 재현의 웃음소리. 그것도 잠시 어수선해졌다.
- 오라면 가야지 또.
“여기 우리 맨날 바람 쐬던,”
- 잠만 금방,
“아잏, 전화 끊지 말고...."
- 엉?
“전화 끊지 말고 와.”
- 바라는 게 왤케 많냐.
“싫어?”
- 금방 가.
주연은 새삼스레 익숙한 곳을 둘러본다. 대기 시간이 유독 길었던 때, 답답해서 바람이나 쐴 겸 재현과 함께 나왔다가 찾은 인적 드문 곳이었다.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서 꽤 떨어져 있어 가끔 재현과 나란히 앉아 휴대폰이나 들여보곤 했었다. 주연은 항상 앉던 그 벤치에 얌전히 앉아 휴대폰을 귓가에 고정했다. 이상하게 춥지도 않았다. 보온 효과라고는 없는 이 무대 의상을 입고도. 오히려 얼굴이 탈 듯이 뜨거울 지경이었다.
주연은 전파를 타고 날아오는 소리에 집중한다. 복도를 뚫는 중인지 이따금 죄송하다고 말하는 재현의 목소리를 감상한다. 작게 아이씨, 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소리. 아 왤케 안 와, 하며 중얼거리는 말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나 짐작한다. 곧 철문이 열리는 소리. 둔탁한 무대용 신발의 밑창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울리는 동시에 재현의 숨소리도 점점 거칠어졌다.
“계단에서 넘어지지 말고 천천히 왛.”
- 어떻게 천천히 가.
다시 철문이 열리는 소리. 반복되는 죄송합니다. 이내 밖으로 나왔는지 거센 바람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그 바람을 가르는 소리. 규칙적으로 아스팔트 바닥을 때려대는 밑창 소리. 더 벅차게 터지는 생의 음. 찰나의 공백은 나지막하게 흘러나오는 재현의 웃음소리가 채웠다.
주연은 자꾸만 휴대폰을 왼쪽, 오른쪽으로 번갈아 고쳐 잡았다. 어딘가가 간지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재현이 한 번 웃으면 반작용이라도 하듯 주연이 웃었다.
이 귀로 듣는 모든 게 꼭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재현이 연주하는 사랑이었다.
괜히 신발 뒷축으로 땅을 꾹꾹 누르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주연은 재현을 마주한다.
“......형이 처음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요.”
재현은 숨을 고르며 천천히 주연에게 다가섰다.
“나도 형이 좋아, 라고 답하고 싶었는데. 형이 못 들은 걸로 해달라고 하길래. 자꾸 없던 일처럼 굴어서 정말 오래 기다렸거든요.”
재현은 가까이 붙어 주연을 살핀다.
자꾸만 재현을 살피는 눈동자가. 이따금 꿈틀 거리는 눈썹이. 추위보다는 다른 이유로 붉어진 귀가. 의식적으로 입술을 길게 늘이는 모양새가. 재현은 탄식한다. 항상 제 감정 숨기기 급급해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얼굴. 이야기를 털어놓는 주연의 얼굴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애타는 얼굴. 몇 번이고 거울로 봤던 자신의 얼굴이었다. 주연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이런 얼굴이었다.
“그때 니가 너무 곤란해 보여서.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니까. 그래서,”
“골란한 표정 아니었는데....”
“내가 미친 새끼다.”
“어느 정도 맞긴 해.”
장난을 쳐오면서도 주연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재현은 작은 얼굴을 조심스럽게 부여잡고는 눈가를 어루만졌다. 주연의 잘 말린 입꼬리가 자꾸만 아래로 휘어졌다. 그게 속이 상했다.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일엔 확신이 필요하잖아요. 근데 형이 확신을 너무 안 줘섷.”
“내가 미친 새끼 맞다.”
“그래서 거짓말했어. 그냥 화보 미팅 차 밥 먹고 왔어요.”
여태 주연의 얼굴 이곳저곳을 만져대던 재현의 손이 뇌와 함께 정지했다.
“야 이주연.”
“왜 이재현.”
“치사하게 이름을 막 불러버리네. 말문 막히라고.”
주연은 그 말에 작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야 시선이 엇비슷한 위치에서 마주친다. 서로 말없이 쳐다만 보다가 슬슬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을 때 주연이 제 어깨로 재현의 어깨를 툭 쳤다.
“그래서. 좋으세요?”
좋아하겠네, 그 사람.
재현은 제가 뱉었던 말을 떠올린다.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한숨 같은 웃음도 터져 나왔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이제 좋아한다고 말해 빨리.”
재현은 주연의 손을 맞잡았다. 재현보다 일찍이 야외로 나와있던 터라 손이 무지 찼다. 그래서 힘줘 주물렀다.
주연의 마음을 구걸하는 일은 과욕이라고 결론 내렸다. 욕심내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주연에게는 늘 그랬듯이 편하고 장난기 많은 형, 언제든 살 맞대고 기댈 수 있는 그런 형으로만 남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꾹꾹 눌러 담다 보니 스스로조차 마음의 크기를 과소평가했던 거다.
이 전부를 요약할 방법이 없다. 재현은 직접 전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해 정리해 본 적도 없는 말들을 꺼내들었다. 온통 이주연으로 채워진 자신의 모습으로, 용기 있게.
야, 주연아.
....일단 해피 뉴 이어.
지금이랑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근데 모든 날이 새로울 거야.
원래 사랑이 그래.
나한테 니가 그랬어.
너 좋아하고 난 뒤로 단 하루도 똑같은 날이 없었어.
나 진짜 부끄러워.....
형 그러면욯.
엉.
우린 해피 뉴 데이네요. 매일매일 새로우니까.
그러네. ....이주연.
넿.
해피 뉴 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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