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집구석 진작에 박차고 나갔어야 했는데, 재현은 자신이 정에 약한 인간이라는 점을 지금과 같은 순간에 깨닫는다. 그래도, 한 번만, 이다음에는… 싶은 조건들을 덧붙이며 선택의 순간을 미뤘었다. 이 가문에 제 몫의 자리가 있을 거라고. 서출을 구태여 본부인의 자식으로 올려서 적자 노릇을 하게 만든 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 생각하며 살았다. 재현은 그 타당함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았다. 동서남북 어느 방면으로 보나 정실의 자식보다 나은 점만 있었기에, 그리 생각하며 자랄 수밖에 없었다.
허나 참고 미루고 버텨낸 결과는 재현의 뜻은 한 톨도 담기지 않은 혼인으로 돌아왔다. 정확히는 부마 간택. 방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서책들이 의미가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화를 참느라 턱 끝이 당겨왔다. 집안의 경사라며 하하 호호 웃는 낯짝들에 침을 뱉어주고 싶은 것을 행하지 않으려 애쓰느라 재현은 꿇어앉은 무릎 위로 주먹만 쥐었다.
“제가 하고 싶지 않으면 어찌 됩니까.”
독이라도 삼킨 듯 혀뿌리가 묵직해져 오기 시작했다. 재현은 이것이 극심한 신경통임을 안다. 빳빳하게 굳은 턱 근육에서 시작된 통증은 점차 머리 위를 뒤덮을 거다. 주변이 무어라 하든 제 할 일을 하다 보면 빛이 보일 거라 생각했는데, 재현의 현실은 여전히 수면 아래다.
부마 간택이면 너한테는 복에 겨운 일 아니니.
친어머니조차 재현이 몰린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재현이 정원 안 별채가 아닌 본부인과 그 자식들이 사용하는 안채로 잠자리를 옮길 때에도 같은 말을 했다. 다, 네 복이니 그러려니 해라. 복에 겨운 일. 다섯 글자로 제 삶이 요약되어도 되는 걸까.
그리하여 재현이 기와 안에 갇힌 삶을 뒤로 하고 문밖의 세상을 택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비슷한 집안끼리의 혼사도 아니고 왕가의 선택이었다. 속에서는 불이 들끓어도 참아야만 한다.
***
나이가 지긋한 상궁은 중전께서 손수 고른 선물들이라며, 빛을 발하는 패물들과 고운 빛의 비단들을 꺼내 보였다. 앞에 늘어둔 것이 끝이 아니었다. 대감에게 인사를 올린 상궁의 뒤로 궁의 일꾼들이 연신 함을 쌓아 올렸다. 이 대감이 일생에 축적한 부와 맞먹지 않을까 싶어 재현은 옷자락에 젖은 손바닥만 닦아 내린다. 반쪽짜리 자식을 통해 이 정도의 부를 얻을 수 있는데, 머리에 돌만 차 있더라도 그것을 놓칠 인간은 없을 것이다. 들끓던 속은 다 타들어가 이제는 재만 남았다. 이런 팔자도 있는 거겠지. 마음을 다스려도 착잡함은 어쩔 수 없는 감정이라 마르는 입술을 혀로 축인다.
재현의 상대라는 공주는 곱게 수놓아진 비단 보자기에 싸인 종이에 적힌 이름 세 글자 외에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마저도 재현은 부마가 될 사람이었기에 이름이라도 알게 된 것이지, 이 대감도 공주의 이름을 볼 수 없었다. 무엇이 이리 비밀스러운 건지.
상궁은 재현만 볼 수 있도록 종이를 펼쳐주고 잠시 뒤에 그것을 바로 촛불 위로 가져다 대었다. 다시금 세로로 길게 접힌 종이는 불길이 붙은 아래에서부터 쉽게 타올랐다.
『 李柱延 』
왕가의 자식이라고는 하나, 공주가 가지기에는 무거운 이름이 아닌가. 공주이면서 왕실의 근간을 이어간다는 의미의 이름을 가져도 되는 건가. 재현이 일부러 트집을 잡으려는 게 아니라 그런 감상이 드는 이름이었다.
왕실의 모두가 귀하게 여겨 털끝 하나 내비치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인물. 공주는 구중궁궐 속에 숨겨져 있는 만큼 소문도 무성했다.
차마 쳐다보지 못할 만큼 박색이다. 중전의 소생이 아닐 것이다. 전하의 친자가 아닌 것을 중전이 속이고 있는 것이다. 사실 공주는 사람이 아니다.
소문은 구름과 같아서 겉보기에는 끝없이 펼쳐질 것만 같고 아득하게 느껴지지만 막상 그 안으로 내디디면 별거 없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래서 재현은 조금 무던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소문은 소문일 뿐일 거라고.
***
지난번의 패물과 비단으로도 모자라 혼례 날까지 쌀가마니를 실은 수레가 이 대감의 기와집 문턱 위를 넘었다고 한다. 정작 신랑인 재현은 궁궐 문을 넘는 순간부터 바닥만 쳐다보고 있느라 고개를 들 틈이 없었다. 본가로 들어가는 재물을 보면 분에 넘치는 혼례가 맞긴 한데, 왜 제 행색은 고개도 들지 못하는 죄인에 가깝게 느껴지는 건지. 숙여있던 고개를 든다 한들 눈은 여전히 내리깔고 있어야만 했다. 그것은 임금과 중전에게 인사를 올린 후에도 그러했고, 촘촘한 발 너머로 제 신부와 마주 섰을 때도 그래야만 했다.
본래 왕실의 혼례가 이렇게 비밀스럽게 진행되는 건가. 재현은 신방답게 꾸며진 방 가운데에 앉아 하릴없이 눈을 굴린다. 정갈한 음식들과 합환주가 올라와 있는 소반을 앞에 두고도 신부가 오질 않으니 할 수 있는 게 의문에 의문을 더하는 일밖에 없다.
사모관대와 활옷, 눈을 부릅뜨고 있는 원앙 장식 두 마리. 복을 기리는 붉은 발 너머로 신부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재현이 유추할 수 있던 건 손의 높이가 저와 엇비슷했나, 하는 정도. 키가 큰 편이라 그리 숨기는 건가. 그건 그거고 혼례란 지아비가 새 신부의 머리 장식도 내려주고 하는 거 아닌가…. 참으로 이 혼약은 이상하다. 알고 휩쓸려 왔으나 급류 구간을 지나 물살이 약해지는 곳에 도달하고 보니, 어찌 이렇게 흘러왔는가 싶다. 혼례 후에도 궁에서 기거해야 하는 점도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기존의 예법에 예외를 두면서까지 주상께서 아끼는 자식이라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때가 되면 두 분을 위한 사가를 내어주실 것입니다. 공주가 어려서부터 모셨다는 상궁은 인자한 얼굴로 재현을 달래듯 말을 보탰다.
때가 되면.
일단 공주께서 오시는 때는 언제인지 그것이 제일 궁금했다. 고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때는 언제인지. 이대로는 피곤에 지쳐 먼저 잠들 것 같았다. 술 한 잔 입에 대지 않았는데, 앉아있으니 긴장으로 잡고 있던 신경줄이 점차 느슨해지는 게 느껴졌다. 따뜻한 자리도 자리인데 은은한 향이 나서 더 그런 듯했다.
***
깜박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재현이 놀라서 몸을 일으켰을 땐 이미 해가 밝은 지 오래였다. 간밤의 동지였던 소반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고, 재현의 의관 또한 불편한 혼례복이 아닌 침상을 위한 옷차림이었다. 아니 이걸 누가. 첫날밤에 새신랑의 옷을 대체 누가 벗겼단 말인가. 겉옷뿐이라고는 하더라도.
기척이 느껴지니, 문 너머에서 재현이 기침했는지 물었다. 내실에 든 상궁에게 재현은 부끄러움도 잊고 지난밤에 대해 어찌된 것인지 답을 구했다.
머리를 조아리는 이에게 얻어낸 답은 재현이 곤히 잠들어 있는 사이에 공주가 다녀갔다는 거였다. 치장을 위해 시간이 지체되어 죄송스러웠는데, 부군께서 잠들어 계셔서 의관을 정리해주고 잠자리를 봐주고 본인의 원래 처소로 돌아가셨다고.
첫날밤부터 소박맞은 줄 알았더니, 결과적으로는 제가 부인을 홀로 둔 게 됐다. 연신 한숨이 새어나왔다. 어서 채비를 하고 공주와 아침 문후를 올려야 면이 서겠구나, 싶었는데 그 또한 되었다고 주상전하께서 전갈을 보내셨다고 한다. 궁은 예법의 정점에 도달해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재현은 어제부터 제가 알고 있던 기준선이 흔들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의 웃어른들께 아침 인사를 올릴 필요도 없다. 조반부터 석반까지 식사는 재현 혼자서다. 하지만 반가에서 지내오시던 부마께서 적적하실 터이니 왕궁의 서고와 연무장, 그리고 잘 가꾸어진 정원은 언제든 드나들 수 있는 패를 내어주라는 임금의 말에 재현의 손에는 용이 조각된 옥패가 들리게 된다. 호사를 누리면서도 그저 답답한 건 이레가 지나도록 공주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는 거다.
전각의 상궁들의 말로는 공주께서는 꼬박꼬박 이곳을 들르지만, 재현이 궁 생활이 고단했는지 매번 일찍이 잠이 들어 조용히 본인의 처소로 돌아가셨다 했다. 칠일 내내 말이다.
그럼 제가 뵈러가도 되는 것이 아닙니까. 해가 있을 때요.
그것은 공주 전하께서 원치 않으시는지라.
거참.
어쩌겠는가. 부부여도 공주께서는 제 웃전인 것을. 재현은 더 보채지 않았다. 궁에서 말을 길게 해봤자 책잡힐 일만 는다는 건 상식이니까. 대신 의문스러웠던 점을 조용히 파헤쳐보기로 한다.
재현은 일찍 잠을 청하는 편이 아니다. 혼례를 올린 날에는 피곤과 긴장의 무게에 짓눌려 수마에 빠졌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외의 날들은 아니다. 무료한 호사는 재현이 잉여 체력을 남길 수밖에 없는 환경을 제공했는데 그리 일찍 잠이 들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재현의 잠에는 외적이 요인이 작용했다는 소리다.
그리하여 다음 날 재현은 속이 좋지 않다며 모든 식사를 물렸다. 입궐한 지 얼마 안 된 부마가 속앓이를 하며 앓아누웠다는 건, 금방 궁에 퍼져나갔다. 주상의 명으로 수염이 하얀 어의가 한 달음에 재현이 누워있는 전각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공주의 발걸음은 없었다. 아픈 척을 하면 오지 않을까, 하고 약간의 기대를 했던 재현은 주린 배를 붙잡고 그날도 이르게 잠에 들었다.
식사를 모두 물렸는데도 보료에 몸이 녹아든 시간은 비슷했다. 때문에 재현은 이제 원인을 확신하게 된다. 그 은은한 향이 수면향이겠군. 허나 찬찬히 방을 헤집어 보아도 침소 어디에도 향로는 보이지 않았다. 원인 제거에 실패했다면 다른 방도를 찾으면 된다. 외부에서 향이 들어온다면 그만큼 나가게 두면 되겠지.
날이 어둑해지고 궁인들의 시야도 흐릿해질 때, 재현은 조심히 전각의 창을 밀어낸다. 싸한 저녁공기가 침소를 채울 수 있도록. 저녁 식후부터는 모든 궁인을 물리고 아직 몸이 피곤하니 일찍 잠에 들겠다고 언질도 해놓았다.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한 부인도 부인이라고 왠지 덧을 놓는 듯 하여 마음이 쾌청치는 않다. 그렇지만. 부인께서 먼저 그러신 게 아닙니까. 재현은 이불 속에서 잠든 척을 하며, 잠들지 않기 위해 애썼다.
***
목재를 다듬고 엮어 만든 건물들은 아무리 살살 걷더라도 소음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고요한 밤이라면 더더욱. 재현이 머무는 전각은 궁 안에서도 호적한 자리에 위치해있다. 오가는 궁인들도 한정적이었고 전각의 주인도 말씀이 많지 않은 곳. 때문에 사람 소리보다 지저귀는 새소리가 더 잦게 들리곤 했다. 그러한 곳의 밤은 더 고요하지 않겠는가. 때문에 재현은 제 부인의 발소리가 다가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주무시는 거 맞지?
아직 미령하시어 일찍 불을 끄셨사옵니다.
궁이 불편하실 것인데, 내가 챙겨드릴 수도 없고.
어찌 공주 전하의 탓이겠습니까.
좋다고 느꼈던 그 향이 원인이 맞았던 건지, 재현은 맑은 정신으로 한 겹 문 너머의 목소리들을 귀에 담는다. 목소리가 조금 낮은 편인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려와 재현은 자는 척 눈을 감았다. 평온한 척 하고 있지만 아까부터 맥이 크게 뛰는 게 느껴졌다. 바닥에 버선이 스치는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턱밑까지 두근거림이 차오른다.
가까이 다가온 이는 이내 재현의 곁에 앉는다. 옷감이 스치는 소리. 참을 줄은 알지만 거짓말은 도통 해본 적이 없는 재현은 지금 순간이 고역이다. 태연한 척 눈을 감고 있는 일이. 때문에 제 이마에 따스한 손이 닿는 순간 더 버티지 못하고 눈을 떴다.
마침내 손을 쥐었는데.
마주한 신부는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일단은 성별부터가.
***
상투를 틀고 있었으니 계집 흉내를 낼 수도 없었다. 주연은 벗어두었던 장옷 자락을 움켜쥐었지만, 재현이 몸을 일으키고 상황파악을 끝내는 게 더 빨랐다.
아, 이래서.
그 한마디에 지난날의 진상을 깨달았다는 게 다 느껴져서 주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만다. 손목은 여전히 재현에게 잡힌 채다. 화가 났겠지. 잠들지 않았던 거라면 문 앞에서 상궁과 했던 이야기들을 다 들었을 거다. 공주라는 호칭도. 다 떠나서 이 시각에 이 전각을 찾는 이가 누가 또 있겠는가.
화가 나기는 했다. 그러나 이내 그간의 의문들이 풀려 허탈해졌다. 공주의 혼례라고는 하여도 과했던 혼수들과 부인이 되었으나 내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 그리고 궁이 불편할 부마를 위한다며 정해진 예법들을 물렀던 점들도. 공주가 아니라서 그랬던 거구나. 그러면서 재현은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를 훑어 내린다. 상투는 저와 혼인을 올렸기 때문에 튼 것일까. 헌데 옷은 또 고운 치마와 장옷을 두르고 다니고. 그러다 시선은 잡고 있는 손까지 내려온다. 단단한 뼈대를 가진 손. 재현의 이마를 쓸었던 손과 다르게 반대 손은 자수가 놓인 하얀 손 싸개에 쌓여 있다. 때문에 재현은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제 부인이 된 이도 원하는 삶을 살아오지는 못했구나 싶어서.
“하실 말씀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어, 그게….”
재현은 주연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린다. 보채지도 다그치지도 않는다.
“…몸은 괜찮으신 걸까요.”
***
그날 밤 둘은 동침했다. 말 그대로 같은 침상에 눕기만 한 것이지만 말이다. 제가 곁에서 자면 불편하지 않으실까요, 하던 주연은 금방 잠이 들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늦은 밤 몰래 재현의 곁을 지키다 새벽녘에나 본인의 처소로 돌아갔었다고. 재현은 잠든 주연의 얼굴을 바라보다 아직 열려있던 창들을 조용히 닫았다. 더 이상 향은 느껴지지 않는다.
주연이 정체를 들킨 이후 둘은 함께 하는 일이 늘었다. 대신 낮에 궁을 돌아다니는 것을 꺼려하는 주연 대신 재현이 주연의 처소를 찾았다. 이럴 거면 전각을 같이 쓰는 게 낫지 않나요. 어차피 이곳에서 잠도 같이 자는 일이 많지 않습니까. 말을 하기가 무섭게 차를 마시던 주연이 사레가 들러 그의 등을 두드려주느라 정신을 쏙 뺐다.
그렇지만.
안 된다는 말씀이신 거네요.
재현은 쉽게 물러선다. 처음엔 동질감이었고, 그 다음은 자신보다도 갑갑한 삶을 살았을 주연이 짠하게 느껴졌고,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느낀 감정은 애정이었다. 그렇지만 주연은 아닐 수 있다. 타인들이 짠 틀에 갇힌 일상을 살아왔으니 이 혼례 또한 해야 하는 일이니까 했겠지. 고작 얼마 전의 재현이 그렇게 생각하고 스스로를 다스린 것처럼 말이다.
혼례를 올린 부군이라 한들 아직은 그저 정체를 드러내고 편히 지낼 수 있는 친우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마음을 깨닫고 나니 한 번씩 진담이 담긴 농을 던지게 된다.
부부지간에 같은 침소에 드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잖습니까, 부인.
주연은 간신히 진정되었던 목구멍이 또 간지러워져 연신 기침을 하고 만다. 얼굴도 귓가도 온통 새빨개질 때까지.
***
유교를 믿는 나라면 무얼 하나. 예법 위에 점괘가 있었다. 그 점괘는 이번에 태어나는 아이가 있어야 이 나라가 굳건할 거라고 했다가, 방울 몇 번을 흔들더니 피 토하듯 대신 그 애가 대를 잇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라고 쏟아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귀히 모셔야 할 거라고, 삿된 것들이 탐내지 않게 숨겨서 키워야 한다고. 여자아이로 키우고 때가 되면 치러야 할 관혼상제도 맞춰서 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 당부했었다.
태어나기도 전에 주연의 삶이 결정된 순간이었다. 나라를 위하는 큰 뜻에 따라야한다는 대의 하에 누릴 수 있는 모든 수순이 정해진 삶.
그게 불만스럽지는 않았어요?
그런 때도 있었는데, 이제 괜찮아요.
재현은 더 이상 진담이 섞인 희미한 농을 던지지 않는다. 애정의 시작이 더 빨랐던 건 주연이라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으니까. 대신 주연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사소한 식습관부터 어렸을 적 이야기, 재현에 대한 첫인상, 앞으로 같이 하고 싶은 것들, 궁 밖은 궁금하지 않은지, 그리고 자녀 계획?
또 놀리시네요.
같이 잘 살아가자는 이야기지.
두 사람이 머무는 처소는 여전히 한적했으나, 종종 새소리보다 큰 웃음소리가 검푸른 기와 위까지 퍼지곤 했다. 그럴 때면 내실 문 앞을 지키던 궁인들은 종종 걸음으로 전각 바깥으로 향했다. 혹 나무 바닥이 눌리는 소리에 웃전들께서 하시던 일에 방해될까 아주 조심스럽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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