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UTION ▲
동반자의 전원 및 대사 기능을 해제하시겠습니까?
동의 즉시 본체는 비활성화 되며, 재활성화 시 본체에 비가역적인 결함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한 손해(기억상실, 지능저하, 신체기능약화 등)에 관하여 당사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칭동점
Lagrangian point
전기포트를 올리고 식탁에 걸터앉았다. 이마를 문지르다가 얼굴을 죽 쓸어내렸다. 간밤 몸이 으슬으슬하다 싶더니만 두통이 있었다.
함부로 아프면 안됐다. 권역 내 유일한 정식 의료기관인 국립의료센터에 방문하려면 차 끌고도 꼬박 1시간을 가야 했다. 도착해서의 대기시간은 장담할 수 없다. 하물며. ‘(고작) 몸살이요?’ 의료진의 멸시적인 태도가 선연한데 병원행을 택하는 건 멜섭이 아니라면 어리석다. 외상환자만으로도 병상이 넘쳤다. 완치가 어려운 말기환자들이 강제퇴원 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실정에 병원 앞에선 적극적 존엄사 허용을 촉구하는 집회가 연일 열렸다. 주관은 어느 인도주의 의료협회였다. 뼈를 갈아 병원을 굴리고 있는 의료인들의 거개가 같은 소속임은 의미심장했다. 극단은 만난다. 대척점에 선 것처럼 보이지만 안과 밖은 실상 같은 것을 요구한다. 책임.
아르바크와 알스비드. 태양과 지구의 라그랑주 포인트에 건설된 쌍둥이 스페이스 콜로니로 전 인류의 60%, 대한민국 국민의 81%가 이주했다. G7과 뜻을 함께한 대한민국 정부는 UTC 기준 금년 12월 31일 23시 59분 59초 이후 지구에서의 국가주권을 포기한다. 비이주민에 대해 아무런 권리와 의무를 가지지 않는다. 반도는 완전한 시장경제체제에 돌입하며 연합정부 협정이 최소한의 평화―전쟁 미만의 상태―를 보장할 것이다.
격렬한 논쟁과 부침이 있기는 했지만 십수 년에 걸친 이주 프로젝트 끝에 사양화된 이 땅에는 완고한 국가주의자,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정도만 남게 됐다. 극단은 만난다니까?
나는 뭘까. 그저 끝을 바라는 사람이었다.
포트 스위치가 내려가는 소리에 움직여 싱크대 서랍을 열었다. 기관이 비이주민들에게 보급한 갖가지 의약품들을 뒤적이다가 빈손으로 돌아섰다. 먹고 죽으려도 없는 때가 오겠거니 한다. 온수에 차 티백 하나를 담그고 방으로 가 두툼한 스웨터를 껴입었다. 가슴의 지퍼를 목까지 올렸다. 두터운 암막 너머로 까르르거리는 소리가 이명같이 전해졌다. 커튼을 걷고 샷시를 열었다. 차갑고 깨끗한 공기가 끼쳤다.
폐부를 소독하듯 부풀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진짜 꼬맹이들이었다. 미성년 자녀를 둔 가족은 이주 최우선순위였으므로 스스로를 한 차례 더 의심하게 되는 것이 과장은 아니다. 눈가를 부볐다. 정말로, 고만조만한 아이들 넷이 모여 비눗방울을 불고 있었다. 기껍기도 잠시, 고까운 생각이 들었다. 쟤네 부모는 여기서 무슨 희망을 찾는 걸까. 내게 자식이 있었음 못 그랬을 텐데. 하등 무용한 비난을 하면서 허리를 쭉 빼고 발코니 난간에 팔짱 낀 팔을 걸쳤다. 비눗물이 연신 숨을 입고 떠올랐다. 대부분이 애들의 머리 위에서 터졌지만 간혹 한두 개가 2층 높이까지 다다랐다. 영롱한 구체에 단지의 풍경이 오색찬란하게 비쳤다. 허상은 아름다웠다. 전율했다. 아름다움은 허상이지만 소멸은 실체였기 때문이다. 등 뒤에서 초인종이 울림과 동시에 아주 가까이 날아왔었던 방울이 퐁, 얼굴에 물을 튕기며 터졌다.
오늘따라 낯선 것 투성이다. 원래 벨소리가 저렇게 컸었나? 가슴 속 떨림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그렇게 된 지 제법 오랜데. 딩동, 딩동. 방문자가 재촉했다. 차게 굳은 손가락을 까딱 구부렸다. 가위에서 풀린 듯이 튕겨져 나갔다. 무모한 부모들처럼 기적을 꿈꿨다. 험하게 문을 젖혔다.
표정과 목소리를 가다듬고 정중히 인사한 여자가 클립보드를 펼쳐 건넸다. 내 신상이 간략히 기입돼있었다. 경계심이 강해졌다.
“근데요.”
“인생동반바이오봇 신청하신 거죠?”
“예?”
무슨 개소리지. 내가 미간을 구기건 삐딱하게 서건 한 번 더 손 모으고 허리 굽혀 인사한 여자는 기계처럼 제 할 말을 이어갔다.
“고객님 여생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금부터, 권리 양도 전 주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니, 아니, 잠깐만요. 손을 펼쳐 훽훽 내저은 후에야 여자가 입을 딱 다물었다. 바이오봇? 내가 아는 그거?
몇 해 전 모 국제시민단체가 범지구적 캠페인을 시작했다. 아나키에 처할 잔류자의 일상을 함께하며 미연의 사고를 방지함을 목적으로 반려생체로봇을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혼자 된 뒤 한국지부에서 직접 연락이 오기도 했었다. 잘 살 마음이 있으면 여기 남았겠나? 웃고서 스팸 처리했었다. 근데 이 뭔 벼락같이 해맑은 약조란 말인가. 당신들이 뭔데 내 여생을 책임져.
저 멀리 간 문고리를 잡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그딴 거 신청한 적 없…”
문 뒤에 또 다른 인영이 버티고 있었다. 해를 등지고 선 호리한 신장을 훑어 올렸다. 얼굴을 숙인 남자는 풀죽은 어린애처럼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손이 저절로 움직여 입가를 가렸다. 심장이 철퍽 내던져졌다.
‘그’의 짓이었다. 묻지 못하지만 확신했다. 내게 ‘그’ 자신의 분신을 보낼 이가 또 있나. ‘그’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죽여 버리겠다.
“소생에는 업계 최고 바이오로보틱스사가 협력하였습니다. 외관은 고객님 요청을 반영해 커스텀 되었고 기능성 측면에서는 인간과 98퍼센트 유사합니다. 2퍼센트의 다른 점이라면 역시 영생한다는 점이겠지요.”
뿌듯하게 설명하는 여자부터 목을 비틀고 싶었다. 사실 내 자신부터. 세필의 기술이 재현한 짝퉁을 외면할 수 없는 나부터. 다분히 ‘그’의 소행이어도 ‘그’에게 죄스러웠다.
“사전에 동의하셨던 내부 준칙에 따라서 기존의 기억은 전부 삭제되었습니다. 하지만, 익히 봐오셨을 서비스형 로봇과 다르게 메타인지를 갖춤에 따라서 자신의 사고를 인식하므로 온전한 인격체로서 대우해주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지금 이 태도는 인격체를 대우하는 태돕니까?”
“아. 현재는 기초운동망 외 지능망이 오프된 상태입니다. 함께 드리는 장치로 등록 절차를 마치시면 활성화됩니다.”
여자가 한 차례 뒤를 돌아본 후 싱긋 웃었다. 껐다 켜는 인격체란 형용모순. 그 윤리관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권리 이전에 동의하시면,”
J가 정녕 바란 걸까. 저를 대신할 존재를?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네?”
“동의하지 않으면요.”
여자가 입술 안을 깨물면서 눈썹을 뉘였다. 당황스러운 줄 알았으나 황당한 거였다.
“생체를 개조한 AI의 경우, 인공 바이탈 시스템을 제거하면 일반적인 장례 과정을 거칩니다. 시신과 마찬가지니까요?”
그녀는 서슴없이 단어들을 꺼내놓고 동조를 구했다. 뇌가 재차 입력을 거부했다. 생체. 개조. …시신.
시신.
시신.
뺨이 저 혼자 파르르 떨렸다.
“어디서 나오셨다고요?”
낮게 반문하자 이상하다는 듯, 여자가 옆구리에 낀 클립보드를 다시 들었다. 투명한 뒤판에 로고가 인쇄돼있었다. 영리법인 순환. 서류를 뺏었다. 이미 확인한 첫 장은 구겨서 버렸다. 어머. 탄성을 터뜨린 여자가 허겁지겁 그것을 주웠다.
생명전환각서.
인체재활동의서.
권리중개보증서.
신체포기각서에 다름 아닌 앞선 두 장은 J가, 상품공급계약서를 닮은 나머지 한 장은 내가 기명날인했다. 내가. 어느 샌가.
본인은 상기의 내용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숙지하였으며 계약의 체결에 있어 일체의 간섭과 강요가 없음을 확인합니다.
방어적인 조항 이후, 이지러진 데 없이 선명하게 찍힌 지문에 엄지를 맞댔다. 손톱을 세워서 벅벅 긁자 사본일 종이가 울었다.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저 남자가, 단지 ‘그’를 본뜬 상품이 아니란 소리다. 강한 바람이 아파트 복도를 지났다. 그의 흑발이 어지러이 휘날렸다. 정말 살아있기라도 한 마냥.
고객님. 여자의 부름에 언뜻 적의가 실렸다. 발을 옮겨 남자를 살짝 가리기도 했다. 식은 눈빛이 물었다. 당신이 원한 거 아니야?
나는. 나는…
콧등이 알알하더니 종이 위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괜찮으세요? 눈을 크게 뜬 여자가 일시적으로 견제를 거두고 휴지를 찾는 듯 에코백을 뒤적였다. 그 틈에 인중을 대강 문지르고 맨발로 문턱을 밟았다. 그의 손목을 쥐었다. 생생한 촉감과 온기에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그는 무력하게 끌려왔다. 등 뒤로 보내고 약간 물러섰다.
“동의해요. 죄송해요. 할게요.”
여자의 눈이 한층 갸름해졌다. 성심껏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색한 대치 뒤, 여자가 알 바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새로운 서류 한 장이 인주와 함께 내밀어졌다. 이양완료확인서. 도료가 피처럼 고인 엄지를 서류에 찍었다.
‘그’가 돌아왔다.
영영.
끌면 끄는 대로 앉히면 앉히는 대로 맹탕같이 구는 그를 두고 ‘그’를 찾아갔다. 봉안함이 든 캐비닛 유리에 손을 대자 미처 닦지 못한 붉은 빛이 묻어났다. 자국을 멍하니 보다가 홀 중앙의 제단에서 촛대를 훔쳐 왔다. 강화유리 모서리를 깨뜨렸다. 파편이 뺨을 긁었다. 둥근 옹기를 꺼내어 뚜껑을 열었다. 주둥이를 봉한 한지를 걷었다. 차곡차곡 접힌 안감을 젖혔다. 잿빛 가루 대신 하얀 솜이 들어있다. 동글동글한 방울솜.
어쩐지. 어쩐지, 내 눈을 피해서 죽더라.
15년 경력의 간병인이 간증했다. 오래 앓다 가는 환자들은 암만 숨이 꼴딱대도 보고 가야하는 사람들을 기다리더라고. 오며가며 친해져서 담배 한 대씩을 주고받던 전공의도 딴판의 관점이나마 안심시켜주었었다. 보호자의 부재중에 심정지가 오면 보호자가 오실 때까지는 소생술을 지속해요.
그런데 어쩐지, 나는 예외였더라고.
딱 이틀 J의 곁을 비웠었다. 행성을 떠나는 엄마와 누나 가족을 배웅하러 나설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컨디션은 좋은 편이었다. 사랑에 미쳐 가족을 저버린 아들에 실망한 엄마는 자식 하나 없는 듯이 살겠다고 했다. 차라리 마음이 놓여 서둘러 병원으로 돌아갔다. 말끔히 정리된 베드에 아득해 머뭇댈 때 건너편 건물 지하에서는 염습이 끝나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난 무연고자가 됐다.
‘일반적인 장례 과정’에서 내 대신 유유히 권리를 행사한 이는 J의 외삼촌이었다. J에게 남은 하나뿐인 친족이자 가족 이상으로 ‘그’와 내가 의지하던 삼촌은 못 기다려서 미안하다며 무릎을 꿇었다. 나보다 이성적이면서 또한 이상적인 결단을 내렸을 걸 믿었으나 그를 일으켜주지 못했다. 다만 생살이 나오게 손톱을 뜯으며 돌이켜보았다.
손과 팔에 혈관이 안 잡혀 발등에 라인을 잡고 잠든 J를 보던 나를 간병인이 위로했지. 그에 뭐라고 했더라. 나를 미련하게 기다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냥, 최대한 편하게… 짧게…
‘그’가 아무래도 들은 것 같았다. 그게 미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관 열라고 내 눈으로 확인할 거라고 행패 부리지 못했다. 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비워두지 않고 굳이 솜을 채운 것도 J 나름의 위트인 듯했다. 웃어도 좋다는. 그러나 그 허락까지 벌이었다. 항아리를 껴안고서 주저앉아 등을 둥글게 말았다. 왜. 왜 그랬어? 충분히 고통스러웠잖아. 충분히 가여웠고 예뻤잖아. 응?
땅거미가 낮게 깔린 거실, 그는 앉힌 모양 고스란히 소파에 자리해있었다. 불을 켜든 편히 눕든 아무 것도 못한 채로. 불가능한 채로.
반나절 그가 머문 공간에서는 어쩐지 병원 냄새가 났다. 그의 앞으로 다가가 바닥에 앉았다. 그가 관성적으로 눈을 떴다가 감았다. 의지와 욕구가 부재한, 흔히는 살아있다고 믿을 수 없는 상태다. 그러나 통증과 다투다 지쳤을 때 ‘그’는 종종 이러했으므로 그를 마주하는 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숨만 붙어있길 바랐었던 때가 있다.
허벅지 옆에 놓인 손등을 먼지 닦듯 쓸어봤다. 멍들지도 터지지도 않은 매끄러운 피부에 울컥했다.
나의 J가 아니다. 알았다. 하지만. 나의 J야.
그의 검지 끝을 말아 쥐고 단단하고 바른 무릎 뼈대 위에 머리를 기댔다. 그냥 아무 것도 하지 말자. 그러면 기근 든 이 땅이 우리를 서서히 풍화시킬 거야. 이 지상의 숨탄것이 차차, 모두 사라지면 우리의 설움도 더는 특별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세상은 버릇처럼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매일 여섯 시면 켜지도록 설정해 둔 거실 스탠드가 번뜩였다. 고개를 들었다. 캄캄하기만 하던 그의 눈에 둥그런 광채가 반사되었다. 그것을 보자 어떠한 충동이 일었다. 내심 너도 바라진 않았어?
여자가 주고 간 케이스를 개봉했다. 손톱만한 칩을 꺼내 핸드폰에 내장하자 앱이 하나 설치됐다. 초등학생이 실습한 것처럼 조악한 화면이 열렸다.
○ Inner Cycle System ○
아무 것도 멈춰 있지 않다. 모든 것이 순환한다.
사이비스러운 소개말 아래로 몇 가지 메뉴가 나열돼있었다. 기본 조작 매뉴얼, 전원 및 대사 제어, 감각 및 동작 제어, 고도 지능 제어…
엄지가 허공에서 부들댔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그를 올려다봤다. 그의 마른 뺨을 쓰다듬었다. 미적지근한 살결이 감겼다. 기대오는 듯한 느낌은 착각일 것이다. 허나 광활한 어둠이 깃든 눈을 마주하면 반드시 울렁이게 되어 있다. 호소하고 싶어진다. 날 좀 봐. 네 눈 안에서만 살아있던 나. 네가 봤어야 할 풍경. 네가 맡았어야 할 향기. 너를 직조했어야 할 시간. 너를 경험했어야 할 공간. 모든 것이 바늘 잃은 털실처럼 엉켜 내 목을 졸랐다. 뼛가루 한 톨 남기지 않은 죽음보다야 죽을 것 같은 감각이 실체라, 반드시 나쁜 선택을 하게 되어 있다.
화면을 넘겼다. 순식간에 마지막 경고마저 해금하고 핸드폰을 내던졌다. 식탁 밑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보다 고개를 떨궜다. 감긴 눈꺼풀 안으로 눈알이 뜨거운 물기에 잠겼다. 아 좇같애 진짜. 울화가 탱탱볼처럼 목울대를 치받았다. 맞았을까, 이게.
그때. 머리카락을 삐죽 잡아당기는 손길이 후회를 단지 위선으로 만들었다. 얼굴을 들었다. 시선이 그의 손목을 기어가 차마 눈을 못 보고 코에서 나동그라졌다. 턱을 으득 고쳐 씹었다. 톡 불거진 손가락 마디가 눈 아래 여려진 살을 깃털같이 문질렀다.
“괜찮아요?”
핸드폰이든 노트북이든, 장치를 거치지 않은 육성을 듣자니 호흡이 급격히 벌렁거렸다. 몇 번인가 말을 뱉으려고 시도하다 고갤 젓고 그의 허벅지 위에 젖은 얼굴을 묻었다. 그는 잠깐 얼었지만 이내 힘을 풀고 일정한 속도로 등을 도닥여주었다. 울라는 양. 네가 우는 이유가 바로 우리 사이의 진실이라는 양.
사이비 말에도 일말의 단서는 있다.
아무 것도 멈춰 있지 않다. 모든 것이 순환한다. 어떤 것은 결코 반복될 수 없다.
가시 돋친 침을 넘기고 볼멘소리를 했다.
“뭘, 뭘 하고 싶은 거야.”
등을 두드리던 손이 어깨선을 만지작거렸다. 음. 크리스마스 선물 고르듯 고심한 그가 내놓은 대답은 싱거웠다.
“좀 잘래요.”
그렇지만 명확히도, 깨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어… 음… 그냥 있고 싶어.”
습득이 빠른지 졸려서 그런지 그는 대번 말꼬리를 꺾어왔다. 아무 것도 잊지 않은 사람처럼. 불행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더욱이 “잊고 싶다”고 들렸다.
먼저 비는 옆자리가 몇 날이고 생소하다. 게으르다고 하자니 꽤나 성실했지만 수마에는 도리 없던 ‘그’라 이른 아침 침대를 독차지하는 것이 달갑진 않았다. ‘그’ 이후 내내 소파에 구겨져 자던 몸이 그새에 풀어져 누가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태평한 건 어떤가. 바이오봇, 생체, 재활, 순환, 시신, 인격체… 그 단어들이 그러한 것처럼 머리와 마음과 몸이 모두 따로 논다.
머리와 마음과 몸, 이성과 욕구와 환경을 조화시켜 적절하게 향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누가 봐도 그일 것이었다. 눈 뜨자마자 기도처럼 자기혐오에 시달리다가 안방을 나가면 그는 따사로운 햇살 아래 책을 읽다 멍을 때리고 있거나 뽀얗고 개운한 얼굴로 김이 꽉 찬 욕실을 나오고 있기도, TV를 보면서 빨래를 개키고 있기도 했으며 화분에 물을 주며 오래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기도 했다. 그 화분 가짠데. 대놓고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의 자취만 졸졸 쫓아다니며 그의 행동들을 고스란히 흉내 내는 내가 그것보다 진짜라고 말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런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를 버릴 수도 취할 수도 없는 날들.
느슨한 잠결에 뚝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인기척을 얼마간 느끼다 눈을 떴다. 그는 주방에 있었다. 냉장고를 활짝 열고 내용물을 식탁 위에 늘어놨다. 성가신 일 말래도 부득불, 청소를 하는 것 같았다. 잠옷 위에 껴입은 후리스 지퍼를 지익 올렸다. 손에 든 무언가를 골똘하게 살펴보던 그가 흠칫 돌아봤다.
“일어났어요?”
“이런 거 안 해도 된다니까요.”
“국을 끓일까 하다가 액젓 유통기한이 많이 지났길래요. 그것만 치운다는 게 그만.”
엉망으로 살아놓고 놔두라고 정색하는 것도 궁색했다. 방치한 게 그뿐일까. 상한 거라면 이 집 전체를 들어내야 할 터였다. 내 앞에 있는 멸치액젓 통을 들어 궁굴렸다. 내가 산 기억이 없어서 입이 한결 썼다.
냉장고 앞에 서있던 그는 어느덧 싱크대 앞에서 낑낑거리고 있었다. 힘을 쓰는 오른쪽 어깨가 뾰족이 솟았다. 어슬렁어슬렁 다가갔다. 만만치 않은지 손등에 핏줄이 불끈불끈했다. 도와주겠다고 손 뻗는 찰나 그가 힘을 쑥 뺐다. 큰 손이 꽉 덮고 있던 은색 뚜껑이 보였다. 그의 어깨를 단김에 돌려세웠다. 그의 손에서 병이 미끄러졌다. 바닥에 떨어진 유리용기가 무참히 깨졌다. 반이 채 안 찼던 속이 뇌수처럼 질펀하게 흩어졌다. 무상히 유리조각을 내려다보고 있자 그가 머뭇머뭇 사과했다.
“아. 미안해요.”
스멀스멀 단 냄새가 올라왔다. 무릎을 굽혀 앉았다. 제일 최근에 떠났던 여행 중 발견해 한 움큼씩 따온 산딸기로 J가 만든 잼이었다. 먹기는커녕 보기도 아깝고 절절해 냉장실 안쪽에 밀어둔 걸 그가 찾아낸 것이다. 아이러니했다. ‘그’의 흔적을 그가 지우고 마는 게. 아니지. 실질적으로 망친 건 나다. 난 뭘 버려서 뭘 취하고 있는 걸까.
그가 나를 따라 자세를 낮췄다. 루비라도 찾은 듯이 반색하던 얼굴이 간 데 없는 한편 고스란하였다. 이상해. 아무렴, 이런 건 이상한 거야.
제가 치운다며 그가 멍청히 맨손을 뻗는다. 다급하게 말린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서 단면을 삭 스친 그의 손이 주춤 튕겨났다. 얼른 손가락을 뒤집어보았다. 검지 끝마디에 피가 배어났다. 숨이 턱 막혔다. 그래도 감히 내가, 너를 어떻게 가짜라고 해? 이런 게 감히 가짜면 나는.
그를 일으켜서 손을 어깨 높이로 들게 했다. 키친타월을 뽑아 상처를 감쌌다.
“잠깐 이러고 있어요.”
“괜찮아요.”
거절은 무시하였다. 현관 옆 선반에서 연고와 반창고를 챙겨가자 그는 여러 장 겹친 키친타월로 바닥을 훔치고 있었다.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가 엉거주춤 끌려왔다. 물을 약하게 틀고서 환부를 가져다댔다.
“괜찮아요.”
그가 불필요한 말을 반복했다.
“내가 죽을 것도 아닌데요.”
알아. 나도 봤어. 전부 다 언캐니 밸리를 고도로 극복한 퍼포먼스의 일환인 것을. 발끈할 뻔했다. 많은 말을 억누르고 그를 노려봤다. 그는 멀뚱했다. 눈은 선하고 참하고, 거짓이 없었다. 알고 있는 공허감이 등줄기를 훑어낸다.
나는 안 될 거야. J는 담담하게 자조했다. 궤도 불안정으로 인해 콜로니 비행편 운항이 잠시 중단된다는 소식이 전해진 날이다. 넌 가. 그렇게 말하며 ‘그’는 손톱 거스러미를 물어뜯었다. 각종 의료장비로 인해 병원선이 수송할 수 있는 환자는 턱없이 적었고 따라서 조건이 까다로웠다. J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아프고 급한지 입증하길 거부했다. 그래. 나는 J의 뜻을 존중했다. 나는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 있어.
그랬어. 그럴 수 있었고, 이제는 입장이 바뀌어버렸다. 이건 이것대로 괴로웠다.
우겨서 상처를 치료한 후 부엌 옆 다용도실 발코니로 나갔다. 헐거운 담뱃갑에서 담배 하나를 빼물고 불 없이 숨을 들이쉬고 또 내쉬었다. ‘그’를 간호하며 생긴 궁여지책이다. 담배 피러 가는 시간은 아깝고 속은 뒤집어놓고 싶어서 머리를 속였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는데 금연하려고 씹은 껌에 중독됐다던 누군가처럼 낭비에 버릇이 들었다. 간혹, 여전히 병실인 듯 느껴지기도 했고.
살기만 해. 내 곁에 있어. 그럼 난 다 필요 없어. 그 말이 ‘그’의 고요한 심정을 흔들어놨을까? ‘그’의 아름다운 내면에 둥지 튼 어린 새들을 날아가게 하고 거목의 튼튼한 뿌리를 드러나게 했나? 그러니까 이제 뭐가 문제냐는 듯 나를 빤히 응시하던 그는 모질었고 다정했다.
눅눅해진 필터에서 떫은맛이 났다. 타지 않은 장초의 허리를 꺾을 때 다용도실 문이 한 뼘 가량 젖혀졌다. 모자이크가 들어간 유리 뒤 그의 허우대가 어른댔다. 문턱을 넘지 않고 그가 속삭였다.
“내가 실수한 거죠.”
“…….”
“그런 말은 좀 거북해요?”
“…….”
“다음부터는 주의할게요.”
속이 참혹했다. 눈머리를 긁적이다, 부서진 타일을 세다, 창문을 열었다. 세계가 망해갈지언정 겨울 빛이 찬란했다. 목련나무에는 벌써 보드라운 겨울눈이 빠끔. ‘그’가 몹시 사랑했던 풍경이자 ‘그’로부터 못다 사랑받은 풍경이다. 내가 ‘그’를 잃어가며 전전긍긍할 때 그도 나를 잃을까봐 전전긍긍한다. 나도 언젠가는 그를 떠나겠지.
이상해. 그런 게 이상한 거야. 우주를 개척할 순 있지만 죽은 땅은 못 되돌리는 것. 가야 하는 사람의 발목을 자를 순 있지만 유한을 없애진 못하는 것. 상실이 수건돌리기처럼 이어지는 것. 같은 자릴 돌고 돌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 슬픔을 미루고서야 쉴 수 있는 것. 그런 줄 뻔히 알면서, 인간이 또 사랑을 하는 것.
때문에 사랑은 유구히 박해의 대상이었다. 떠나지 않으면 남는다. 불멸의 수모를 감당함으로써 ‘그’는 그러기로 했다. ‘그’의 뒤에서 상대적으로 무한하게만 느껴졌었던 시간이, 그의 앞에선 볼품없었다. 이제 ‘그’와 그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우리의 방황은 이대로 끝나야 한다.
천천히 문손잡이를 당기자 그가 이쪽으로 딸려왔다. 평온하던 어조와 다르게 그의 아귀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 손등을 감쌌다.
잘 왔어. 그래도 우리는 여기서 그치자. 너를 기다렸던 날들에게 천천히 인사하면서. 마지막을 마지막인 줄 모르면서.
―현지시간 15일 저녁 6시경 중국 중앙11송전망에 화재가 발생해 장저우 핵발전소에 전력공급이 끊긴지 삼십여 분만에 복구됐습니다. 발전소가 즉시 자체 비상발전 모드에 돌입하며 큰 피해는 없었지만 국가 철수 이후 원전 안전성에 대한 불안감이 더욱 증폭되고 있습니다.
팔짱 끼고 고개 숙인 자세 그대로 눈만 번쩍 떴다. 몇 번 깜빡여 풀기를 죽이고 얼굴을 들었다. 어스름할 무렵 보기 시작했던 영화가 어느새 끝나있었다. 쨍한 뉴스 화면이 눈알을 시큰하게 적셔왔다. 옆에서는 곧 쓰러질 팽이처럼 그의 머리가 흔들리는 중이었다. 소중하게 안은 팝콘 그릇이 반 넘게 준 걸 보니 나보다는 길게 버틴 모양인데 최후가 처량하고 귀여웠다. 리모컨으로 음량을 낮추고 때를 기다려 그의 머리 아래 어깨를 알맞추 밀어 넣었다. 그가 새근댈 때마다 바디워시의 파우더향이 물씬 풍겼다. 좀 더 깊이 품을 맞대었다.
고루한 보도내용도 곧 못 볼 거라 생각하면 소중했다. 이 땅에서의 새로운 컨텐츠 제작이 거의 중단된 현재, 재방송들로만 이뤄진 편성표 속에서 뉴스만이 유일하게 현실감을 일깨웠다.
―오늘 오전 7시경 설악산 대청봉 근처 중청대피소에서 첫눈이 관측됐습니다. 북서쪽에서 유입된 찬 공기가 강설 시기를 앞당긴 것으로 지난해에 비해서는 아흐레, 재작년에 비해서는 12일 빠른 첫눈입니다.
문명이 더럽힌 자리를 계절만이 끈질기게 책임지려 하고 있다. 가라, 가서 잊으라, 시간의 등을 다독거린다. 허나 암만 어진 선비도 쇠하는 게 섭리다. 11월에 첫눈이 오던 때도 있었다고 들었지만 이젠 1년의 끝 무렵에나 깜빡했단 듯 눈이 내렸다. 그에 비해 반년의 여름과 세 달의 장마는 세상을 발아래 둔 어린 왕 같았다. 폭군에게 기근과 역병이 깃드는 건 비단 옛일만이 아닌 전통이다.
이 땅에 몇 번의 눈이 더 오고 몇 번의 꽃이 더 필까. 이제는 어쩐지 그 모든 것을 목도할 준비가 됐다고 느낀다. 머리칼이 흘러내린 관자놀이께에 옅게 입술을 찍었다.
혼자 산책하고 싶단 그를 처음 홀로 내보내고 한참 현관 앞을 서성였다. 괜한 불안감을 타개하는 데는 집안일만한 게 없어서 이틀 전 교체한 침구를 또 갈았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탁조를 바라보며 최면을 걸었다. 평범한 하루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늘 아침 그가 보고 있던 스페이스 콜로니를 왕복하는 비행선에 관한 선전용 다큐가 불안의 단초가 되었다. 그는 흥미롭게 눈을 반짝였다. 미지의 세계가 사실 궁금할까?
이곳에서, 내가 끝을 보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내 곁에서 점차 깊게 잠들수록, 말이 많아지고 싱거운 장난이 늘수록, 한편으로는 혼자 골똘한 시간이 늘어날수록 자신이 없었다. 처박아뒀던 트리를 꺼내 함께 꾸미는 내내, 점등의 순간, 황홀해하던 표정을 딱 한 해만 더 보고 싶었다. 국권 소멸이 정말로 머지않았다. 내가 그럴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해주지. 미뤄질수록 변수가 늘고 상황이 어려워진다는 걸 진실로 안다는 말이다.
장초가 손가락 새에서 또 한 번 꺾였다. 돛대였다. 5L 종량제 봉투의 절반가량이 부러진 담배로 찼다. 실제 다 태운 듯이 속이 따갑다.
말을 전한 그는 안쪽을 거들떠보지도 않고서 등을 돌렸다. 모든 정황을 꿰뚫고 계신 것이 분명했다. J의 뜻이며 계획이겠지. 네가 전부 결정해놨는데 내 고민이 의미가 있기는 해? 반항심이 든다. 급히 슬리퍼를 꿰신었다. 네 뜻 안 따라. 다 알고 나서 반대로 할 거야. 그냥 네 곁에서 화병으로 죽어버릴 거다. 근데 짝이 맞지 않아 절뚝이는 걸음새가 너무너무 구차했다. 눈물이 날 만큼 초라하게 느껴졌다.
삼촌은 잎이 다 떨어진 은행나무 아래 벤치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옆에 앉자 그가 담뱃갑을 열어 내밀었다. 고개 저어 사양하고 연기만 깊이 들이쉬었다. 허리 숙여 두 다리 위에 팔꿈치를 괸 그가 시니컬한 농담으로 변명했다.
“나는 죽자고 말렸다.”
자존심 상하게, 각오 외로 허무하게 웃음이 나왔다.
“네가 견딜 수 없을 거라고 하더라. 외로울 거라고.”
쉽게 걸쳐진 웃음은 쉽게 가셨다. 그의 눈을 잡아 벌리고 찢은 것이 온전히 나임을, 종내 못박힌 마음이 사과처럼 경쾌하게 두 쪽 난다. 부스러기 한 톨 없이 갈라진다. 어차피 이럴 거였음 못 견디게 냅두는 게 윤리적이지 않냐고.
불씨를 털어 짓밟은 삼촌은 꽤나 오랫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마른 은행잎 하나를 주워 잎자루를 핑그르르 돌렸다. 가뿐한 체 한다는 걸 내용상 알았다.
“J랑 함께해서 난 기뻤다. 자식을 둘이나 기른 애비지만 내 유일한 조카가 주었던 환희는 달랐어.”
코까지 차오른 감정에 고개를 젖혔다.
부끄러움인가. 어떤 사랑은 그가 내 삶 속에 있‘었’음을 수용하며 도착하는 것일 거다. 혹 분함일까. 또 어떤 사랑이 종착역 없는 기차를 타는 것이면. 아냐, 억울함인가. 어떤 사랑은 폐쇄된 간이역을 떠날 수 없는 건데.
그가 번드럽게 닳은 바버 안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받아서 펼쳤다. 말일 출발하는 비행선 탑승권이었다.
“마지막 정기운항편이야. 이후론 좌석이 다 차야 출발하는 거, 알고 있지? 가격도 천정부지로 뛸 거다.”
모서리를 말아 쥐다 중간을 북 찢었다. 네 뜻대로 안 한다고.
삼촌이 고개 돌려 피식했다. 웃어요, 지금? 바락바락 대들고 싶었다. 그런데 반대쪽 품을 젖히는 것이다.
“성질머리 봐. J가 혼자선 절대 안 갈 거라고 하던데 내가 혹시나 해봤다.”
휴지조각 되어버린 복사본을 빼앗기고 척 봐도 원본이 들려졌다. 그 위로 한 장 더. 영문 탑승자명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결국 나를 보내는 게 목적이었구나.
“의료기 외 기기는 실을 수 없는 게 원칙이지만. 비행 도크 가서 보안국 연재은 씨 찾아. 도와줄 거야.”
그가 용건을 마치고 일어났다. 긴 숨이 하얗게 흐드러졌다.
“끝까지 우리 애 편이라 미안해. 억울하면 다음에는 내 조카로 나렴.”
나를 내려다본 눈이 찰나 반짝했다. 머리칼을 마구 헤집어놓고는 그가 자리를 떠났다. 그가 사라진 자리엔 은행잎 한 조각만이 남아있었다. 이별이 도처에 있었다.
두 장의 종이를 백과사전처럼 정독하다 귀가했다. 문을 열자 약한 물비린내가 났다. 그는 현관을 등지고 거실과 부엌의 길목에 아무렇게나 앉아있었다. 뭐해요? 묻자 그가 주방가위를 든 채 고개를 돌렸다. 그 곁으로 서니 널린 장미 다발이 보였다. 장미? 가물은 땅에 신선식품 구하기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닌 요즘 한가하게 꽃을 사고 팔 리 없는 데다 기온이 높아도 겨울은 겨울이었다. 꽃 한 송이를 집어 들었다.
“웬걸?”
군잎을 떼고 가지를 자르며 그가 싱긋했다. 다듬어진 꽃은 주둥이를 자른 생수병에 가지런히 꽂혔다.
“공원에 앉아서 쉬는데 가지 치시더라고요. 가져가도 되냐니까 예쁜 걸로 골라주셨어요.”
“이 날씨에 꽃이 폈다고요?”
“개량종이라서 얼지 않는 이상 계속 꽃을 피운대요. 장하죠. 추울 텐데.”
진짜 장한 듯이 그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가 펴졌다. 속이 시큰했다. 너는 그런 거나 걱정하지. 그러니까 어린왕자처럼 망한 땅에 돌아왔지.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후디 배 부분의 주머니 속에서 탑승권이 바스락거렸다. 짙은 향이 아득해져 일어섰다. 다용도실을 뒤져 화병을 꺼냈다. 바꿔 꽂아주자 그가 기뻐했다.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다이빙했다.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생각해.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그와 공존할 수 있었던 미래를 한 번이라도 그리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이번이 그의 진짜 끝이야.
생각하지 마. 남을 해석하려거나 파악하려 들 때 드러나는 것은 내 자신의 한계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으로서 명확한 것은 그가 나를 위해 자신의 최후를 제물 삼았다는 것뿐이다. 이상해, 그런 건. 육신 없이 떠도는 영혼. NPU가 살아있는 한 머리가 터져도 영원히 재생될 기억. 멸망할 땅에서 장미를 가꾸는 누군가.
벌떡 일어나 방을 마구 돌아다녔다. 입술을 씹었다. 티셔츠 멱살과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매트리스를 걷어찼다. 마음 같아서는 펄쩍펄쩍 날뛰고 싶었다. 갈데없는 분노가 몸속에서 쉬지 않고 웅성댄다. 거슬리고 답답하고 초조했다. 사람이 이렇게 미치는 거구나. 노크소리가 아니었으면 저층이나마 밖으로 뛰어내렸을 것이다.
거칠게 뒤돌자 그가 문틈으로 눈을 쏙 내밀고 있었다. 캄하고 캄캄한 동공 속으로 이 방구석을 지배하던 키보드워리어 다름 아닌 악령들이 흡수된다. 퇴마당한 듯이 안심되고 울고 싶어졌다.
“꼴이 왜…”
순진한 의문에 멋쩍기까지 했다. 뜨거운 낯짝을 마른세수했다. 이렇게는, 이렇게는 못 사는 거다.
“무슨 일 있어요?”
그가 조심스레 다가섰다. 그런 그를 등지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뇨. 왜요?”
목이 멘 걸 감추려고 다소 낮은 톤으로 단답한 것인데 공격적이었을지 모른다. 또 내 눈치를 보게 하긴 싫다. 주먹을 꽉 쥐고 몸을 틀어 앉았다. 눈을 깐 그가 허리 뒤로 휙 손을 숨겼다. 최대한 상냥하게 되물으며 손 뻗었다. 뭔데요. 입술을 다물고 쭝긋쭝긋하던 그가 이내 결심한 듯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가까이 왔다. 꼼질거리는 손가락 사이에 일회용밴드 한 장이 들려있었다.
“이것 좀 붙여줄래요? 가시에 약간, 진짜 약간 베였는데 한 손으론 붙이기가 힘들어서…”
일방적으로 길들여지는 사이가 어디 있을까. 그래. 나는 그를 한 번 더 책임질 자신이 없는 거야. 사실 힘들었으니까. 무력했으니까. 나도 한 번 죽었었으니까. 비겁함을 인정하니 한결 편해진다.
그의 손끝을 쥐어서 가까이 당겼다. 아주 사려깊이 관찰해야지만 베인 자국이 보였다. 밴드를 뜯으며 괜한 말을 했다.
“나랑 어디 좀 갈 수 있어요?”
“그래요. 지금요?”
“어딘 줄 알고요.”
“나쁜 곳일 것 같지가 않아요.”
과연 그럴까? 나도 잘 몰라. 그저. 길들여질 필요 없는 곳이기를 소망했다. 네 여행을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길. 그게 나라면 더욱이.
맑고 그리 춥지도 않은 날이다. 집안 가득 김이 차, 창을 살짝 열어두고 오자 식탁 위로 묵직한 웍이 놓였다. 꽤 깊은 팬인데 국물이 넘칠 듯 찰랑댔다. 선 채 그 속을 들여다봤다.
“우와. 이게 뭐야?”
포크로 시들한 이파리 따위를 건졌다.
“곤드레 나물이에요.”
그가 조곤하게 대답했다. 곤드레? 재작년 봄, J가 만취해서 홈쇼핑을 보다 무려 열 세트나 구매했던 것이리라. 구박하니까 자기가 다 먹을 거라고 버럭하더니 어물쩍 밥상서 사라진. 나도 못 봤던 걸 어디서 찾았지? 문득 그의 실체가 의심스럽다. 그건 그렇고. 당장 문제는 이 ‘나물’이 2년 넘게 묵은 거란 건데. 말린 거라 괜찮은가. 그러면 종이도 먹어도 돼? 어? 아니, 진짜 논란거리는 이 국물요리의 기원이 떡볶이였다는 사실이다. 것도 밀키트.
“프레시한 게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건나물이 눈치 없이 거무튀튀하고 난리. 실소가 비어져 나왔다. 앞접시를 가져오던 그가 나를 보며 갸웃했다. 정색하고 착석했다. 국자로 요리를 젓자 설상가상 가라앉아있던 면이 꿈틀댔다. 이건 또 뭔? 해명을 바라자 그가 으쓱했다. 쌀국수 맛있잖아요. 끝내 이마를 짚었다. 무모함이 귀엽기는 한데 너무 한 솥이지 않나. 각오 뒤 수저를 들었다.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게 우선 목표이기는 했지만 남기면 내일 마저 먹어야 할 것 같아 급진적 음식을 급진적으로 씹어 삼켰다.
그렇게 오늘도 이상한 연인과 보내는 평범한 하루일 법했다. 내일이 두렵지 않고 오늘을 반성치 않는 여느 날, 자연스레 타이밍이 올 거라고 난 믿었고…
정작 그는 내 등 뒤 TV에 정신이 팔려 제 몫을 깨작거리고 있었다. 젓가락으로 그의 그릇을 댕댕 두드려도 모른 체다. 나도 화면을 돌아보았다.
―오늘 밤 연말과 연시를 장식할 화려한 우주쇼가 열립니다. 쌍둥이자리 유성우의 극대기를 맞아 한국 표준시 기준 31일 밤부터 3일 오전까지 시간당 200여개 이상의 유성이 쏟아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별 거 아니고만. 고개를 되돌리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별 거였네. 꼬리 흔들리는 게 보이는 듯했다. 입술 끝을 지그시 깨물고 짐짓 시큰둥하게 물었다.
“별 보러 갈래요?”
그가 환하게 응답하였다.
체취가 바랠까 꽁꽁 닫아두었던 옷장을 열었다. 옷을 겹겹이 입히고 파카 앞섶도 단단히 여며주었다. 두꺼운 양말을 찾다가 발견한 쌍안경 하나도 폼으로 안겼다. 더 해줄 게 없나, 집을 나서기 전까지 괜히 마음이 바빴다.
목적지를 특정하진 않았다. 조용하고 하늘을 가리는 건물이 없으면 그만이었다. 갈림길마다 그에게 물어 즉흥적으로 핸들을 돌렸다. 예보 시각까지 멈추지 않고 달렸다. 비효율적인 동선 탓에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다. J와 몇 번 드라이브를 왔었던 호숫가가 낙점됐다. 적당한 목을 찾은 뒤 시동을 끄자 살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고요와 어둠이 내려앉았다. 무심결에 핸드폰을 찾았지만. 집에 두고 오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라이트를 켜놔야겠어서 시동버튼을 누르려는데 그가 덜컥 차문을 열었다. 잠깐만요, 잡아 봐도 소용없다. 발밑에 뭐가 있을 줄 알고. 그게 우려되면 시동부터 걸 것이지, 멍청하게 따라 내리고 말았다. 보닛을 짚다 보니 슬슬 눈이 트였다. 차문을 붙잡고 우뚝 선 그가 보였다. 치아와 코끝과 눈동자, 속눈썹 한 올 한 올이 거북할 만큼 생생하고 뚜렷하다. 당연하다. 그는…… 그는….
인간은 로봇청소기도 사랑해버린다는데. 당장 집으로 돌아가 계획을 리셋 시키고 싶어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그가 발밑보다 머리 위를 보는 사람이었던 것. 내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의 고통이 아니라 이런 거다.
그의 곁으로 가 그처럼 하늘을 보았다. 달도 광공해도 없는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은가루같이 빛났다. 영원의 어깨에 잠시 머리를 기댔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는 게 곁눈으로 느껴졌다.
“눈 떼면 안 되죠. 놓친다?”
그가 다시 고개를 올리다 멈칫 아래쪽으로 꺾었다. 짧게 입술이 눌렸다.
“별보단 별에 관해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희귀한 거에요.”
또박또박 주장하곤 쑥스러운 듯 반대쪽으로 돌아가는 얼굴을 양손으로 붙들었다.
맞아. 참 귀했어. 그렇게 소회를 밝힐 날을 나 기다려볼게. 조금만 더 사랑하면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주 많이 사랑해서 잘 살 것도 같다.
비로소 너를 보낸다. 방황을 이곳의 어둠에 묻는다. 우리의 모든 상실과 슬픔은 내게서 끝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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