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 달린 스피커에서 불량 안드로이드 폐기 처분 캠페인 방송이 나오고 있었을 때, 주연은 청과물 코너에서 사과를 고르고 있었다. 평균보다 좀 더 익은 것. 학습한 애플파이의 비법. 주연은 신중하게 사과를 집었다 놨다, 두들겼다가, 코로 킁킁거리길 반복하고 있었다.
“이걸로 주세요.”
“2만5000원, 계산은 카운터에서 해요.”
“네에.”
“근데 총각 거긴 다친건가?”
주연이 고른 사과가 담긴 비닐봉투를 노련한 손길로 칭칭 묶고 가격이 적힌 라벨 스티커를 붙이던 직원 신씨의 시선이 주연의 왼쪽 뺨에 닿은 건 찰나였다. 커다랗게 붙여진 거즈. 주연은 얼굴에 물음표를 띄다 이내 뺨을 만지작거리며 아..넘어졌어요.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저번에 왔을 때도 왼쪽 뺨에 거즈를 붙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심하게 다친 건지, 어디서 싸운 건지 신씨는 물으려다 말기로 한다. 얼마 전 티비에서 옷 사이로 철근이 튀어나온 남자에게 왜 그러냐 물었다 기도에 과도가 박혀 죽은 방앗간집 주인에 관한 뉴스를 봤기 때문이다. 물론 저 멀끔하게 생긴 총각이 안드로이드란 법은 없으나..그래도 혹시 모르니. 흉흉한 세상이다. 인간 편하자고 만든 안드로이드가 인간인 척을 하고, 구별도 안되고, 이젠 범죄까지 일으키고 있고
“이것도 같이 주세요.”
“체리? 그, 그래요. 두개는 서비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주연은 신씨에게 건네받은 봉투를 카트에다 가지런히 집어넣었다. 돌돌돌 카트를 끌고 멀어지는 주연의 뒷모습을 보며 신씨는 괜한 생각을 했나하고 무너지기 일보직전인 바나나 탑을 정리했다.
폭력적인 불량 안드로이드들을 척결하라!
사탄 같은 불량 안드로이드들을 내쫓아라!
마트에서 나와 버스를 타러 가는 길. 이번엔 주연의 손에 불쑥 전단지가 내밀어졌다. 불량 안드로이드 구별법은 뒤에 자세히 나와 있어요. 정부의 청소 작전에 동참해주십쇼. 마치 계시록을 외우듯 허름한 행색의 늙은이가 줄줄줄 읊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버스가 와서.. 주연은 얼른 말을 내뱉곤 도망치듯 버스에 올라탔다.
타고 보니 집에서 반대 방향으로 가는 노선이었다.
스틸 위드 유
나가기 전! 거즈 붙였는지 확인하시오 – 주인백
꼬불꼬불한 악필로 당부하듯 적힌 메모는 여전히 현관문 안쪽에 굳건히 붙어 있었다. 주인님은 이씨인데 왜 자꾸 샛노란 쪽지엔 주인백이라고 쓰는지, 주연은 생각을 하며 느릿하게 운동화를 벗었다.
집에서 반대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잡아타는 바람에 저녁 준비는 40분이나 늦어졌다. 그는 일곱시면 집에 올텐데. 주연은 마트에서 사온 식재료들을 냉장고에 넣으며 얼른 머릿속으로 계획해둔 레시피를 되짚었다.
손을 씻고 요리를 시작하기 전 주연은 언제나 그랬듯 왼쪽 뺨에 붙은 거즈를 뗐다. 비로소 안전한 집에 돌아왔다는 일종의 의식같이 느껴졌다. 치지직. 익숙한 소리와 함께 희미한 접착제 자국이 뺨에 남았다. 그리고 세로로 검게 쭉쭉 그어진 선들, 자리엔 바코드도 함께 찍혀 있었다. 주연은 마트의 아주머니와 전단지를 건네던 노인의 눈빛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뺨을 만지작댔다. 오톨도톨 까끌한 자국이 느껴질 때마다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오늘 마트에서도 나오더라고요.”
“뭐가?”
“불량 안드로이드 청소 캠페인이요..”
“씹새끼들 국민 혈세를 아주 막 갖다 쓰네.”
된장찌개를 두어번 떠먹은 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주연에 재현은 대뜸 욕부터 박아댔다. 안드로이드 양산하라고 난리칠 땐 언제고 이제 와선 폐기야 씨발 암튼 제멋대로지..이번엔 어디까지 하나보자. 입에는 주연이 요리한 잡곡밥과 불고기가 한가득이었다. 주연은 전단지 이야긴 안하는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무서워?”
“..뭐가요?”
“폐기될까봐.”
“글쎄요. 잘...”
잠깐의 정적 뒤 따라붙은 질문에 주연은 도르륵 눈알을 굴리기만 했다. 그러게 고통스러울까? 추울까? 폐차시키듯 내 몸을 압축할까. 고철덩어리 취급 받으며 쓰레기 매립지에 내던져지게될까. 이왕이면 배터리부터 빼고 의식이 없어진 다음 처분이 됐음 좋겠다고 주연은 생각했다. 아무리 안드로이드여도 아픈 건 싫으니까.
그렇다. 꼴에 아픔을 걱정하는 주연은 안드로이드다. 품번은 E-24011511. 전국의 A~G 연구소 중 E연구소에서 24년 1월15일에 열한번째로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그리고 주연은 불량 안드로이드다. 연구소마다 용도별로 안드로이드를 생산하게 지정이 돼 있고, 그중 E연구소는 전투용 안드로이드를 만드는 곳이었다. 그런데 끝없는 야근의 무한굴레로 깜빡 졸던 개발자 한명이 코드를 잘못 넣었고 그 바람에 무작위로 프로그램이 섞였다. A연구소 프로그램이 D연구소 안드로이드에게 가고, G연구소는 B연구소로. 주연은 가정용 안드로이드를 생산하는 F연구소의 프로그램을 받아버렸다. 즉 생긴 건 전투용인데 능력치는 가정용 로봇인 모양새였다.
처음 깨어났을 땔 기억한다.
“이것도 불량이야?”
“엏 주인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 씹.. 불량이네.”
발가벗은 채 흰 천만 덮고 있는 주연을 내려다보고 남자 둘 여자 하나는 골머리가 썩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제 낯짝에 담배를 태웠다. 한기와 매케함. 그게 주연이 난생처음 느꼈던 감각이었다. 이건 학습된 감정일까. 주연은 절로 위축이 됐다. 그저 갈가리 찢기지 않길 기도할 뿐이었다. 차라리 모른 척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고도 한참 욕하는 말소리가 들려오다 다시 상황을 파악하려 눈을 뜬 순간. 등 뒤에 박힌 퓨즈가 슈욱 하고 꺼져버렸다.
“저...죽은건가요?”
“세상에 안드로이드가 죽는 게 어딨냐.”
“불량품이라 그랬는데.”
“누가? 내가 널 샀어.”
“저를요?”
“응. 난 불량품 같은 건 안사는데.”
눈을 떠보니 이곳이었다. 눈앞에 그는 연구소 사람들과 달리 흰 가운이 아닌 편한 후드티를 입고 있었고, 실험용 고글도 끼고 있지 않았다. 집에선 쎄한 락스와 소독약 냄새 대신 포근한 섬유유연제 향이 났다. 한번도 본적 없는 햇빛이 드리웠다. 이재현. 그게 그의 이름이었다. 주연의 주인님. 그는 자신을 국정원 소속의 요원이라고 소개했다. 비밀 누설은 못하는 걸로 프로그래밍 해놨다니 믿을게. 그러면서 한 문장을 덧붙였다. 보통 타인들에게 그는 영업사원, 카페 주인, 경찰청 소속 경위, 배우 지망생. 다양한 직업으로 불리운다고 했다. 아주 중요한 비밀 업무를 하고 있나보다, 하고 주연은 생각했다.
주연이 할 일은 제 몸에 불시착한 가정용 안드로이드로써의 임무를 하는 거였다. 그를 위한 식사를 준비하고, 빨래를 돌리고, 청소를 하고, 베란다 식물들을 관리하는 것. 느릿하지만 착실하게 주연은 그걸 해내고 있었다.
행정안전부와 경찰청,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불량 안드로이드 집중단속을 시행한다고 밝혔습니다. 식당, 공연장 등 다중이용업소부터 도로에서도 실시할 예정이며, 국민들이 직접 유선이나 앱을 통해 신고할 수 있는 시스템도 신속하게 마련을...
거실에 틀어놓은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던 재현은 주연의 앞에 놓인 리모콘을 훽 잡아채곤 채널을 돌렸다. 돌린 채널에선 얼마 전 빌보드에서 상을 받은 걸그룹의 컴백쇼가 나오고 있었다. 노래와 환호가 들렸다. 세상은 여전히 어제와 같았고, 평온했다.
주연이 불량 안드로이드만 아니었다면. 아니었다면 노랫소리에 맞춰 흥얼댔을지도 모른다.
첫 사건은 열흘 전 발생했다. 무려 열네살짜리 아동 형태의 안드로이드였다. 자신을 키우던 부모를 찔러 죽인 사건이었다. 뒤늦게 그 부모들이 구입한 안드로이드를 정신적, 신체적으로 수년간 학대했단 증거가 드러나긴 했지만 어쨌든 인간의 지배를 받아야할 기계가 인간을 자유의지로 죽인 것에 대한 사회적 충격은 대단했다.
이틀 뒤엔 호텔 로비의 안내용 로봇이었다. 그녀는 호텔에서 열릴 이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온 회장을 찔러죽였다. 이번엔 피해자의 이름값 때문에 사회적 이슈가 됐다. 재벌 총수가 죽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다른 재벌과 정치인, 고위관료들이었다.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는지 불량 안드로이드를 싹 잡자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살인을 한 안드로이드들은 모두 발목에 살이 까진 채 철근이 드러나 있었다. 그건 불량 표식의 일종이었다.
세번째 살인이 일어나고야 언제나 그렇듯 앵무새처럼 매뉴얼대로 처리 중이라 하던 대통령실과 정부가 나섰다. 대책을 마련하는 동안에도 국회랑 예산을 두고 싸우다 제동이 걸려 네번째 다섯번째 살인이 일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특별단속과 함께 대국민 캠페인을 발표한 것이었다. 걸그룹 컴백쇼의 중간 광고 타임엔 또 불량 안드로이드 척결 공익광고가 송출되고 있었다.
주연은 어쩐지 발목을 긁고 싶어졌다.
/
아직 해도 안 뜬 이른 시간 다육이 물갈이를 하러 거실로 나온 주연은 식탁 한쪽을 차지하고 앉은 재현의 뒷모습에 좀 놀랐다. 아침잠이 많은 그가 이 시간에 일어나는 일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용수철처럼 부스스 튀어나온 곱슬머리가 튀었다. 한쪽 다리는 양반다리를 한 채 의자 위에 올리고, 또 다른 쪽은 부산스레 떨며 재현은 거즈를 쭈욱 하고 찢어 빈 레모나통에 넣고 있었다. 주연의 왼쪽 뺨에 맞는 크기로, 거기에 붙여질 것들.
“생각보다 금방 쓰네, 이거.”
“거즈는 계속 붙여야 하는 거예요?”
“어제 티비 못봤냐. 난리잖아.”
“이래나 저래나 어차피 난리인데...”
“뭐?”
“붙여도 의심받는 건 똑같지 않을까요.”
“겁대가리 없는 건 안드로이드라서 그런 거냐?”
말투가 영 퉁명스러웠다. 소파 오른편 밑엔 작은 사이즈의 캐리어가 놓여 있었다. 그 옆엔 옷가지들과 면도기, 노트북 등이 쌓여 있었다. 출장을 가는건가. 재현은 두어달에 한번씩 작전 때문에 집을 비우곤 했다.
“미리 말씀을 해주셨음 좋았을 걸...”
“됐어. 안드로이드가 무슨 시다바리도 아니고.”
“시다바리요?”
“장난. 저스트 조킹. 챙길게 별로 없었어.”
다육이에게 물을 주는 주연 옆에서 재현은 캐리어에 짐을 넣었다. 방금 씻고 나왔는지 그에게선 시원한 스킨로션 냄새가 났다. 기계인 제게선 나지 않는 냄새. 살의 형태를 하고는 있었지만 겉보기엔 인간의 살과 감쪽같이 똑같았지만 아무리 바디워시로 씻고, 향수를 뿌려도 얼마 안가 주연의 몸에 밴 향은 금방 사라지곤 했다.
“밥 잘 먹고, 잘 자고. 너 그리고 그 아무나 문 열어주지 말아라. 단속반일 수 있으니까.”
“..이번엔 잔소리가 좀 기시네요.”
“참나.”
“나중에 형 자식은 귀찮겠어요.”
“니가 내 자식을 왜 걱정해.”
“...”
“야..하하. 설마 장난친거냐?”
삐죽이는 주연에 재현이 소리내 웃었다. 하지 말라고, 썰렁하다는데도 굳이 한다. 가정용 안드로이드엔 소소하게 주인과 스몰토크를 주고받는 기능이 있었다. 기계인 그것들을 조금 인간스럽게 만드는 기능.
현관 앞 재현은 문에 붙은 쪽지를 두번 두들겼다. 그러고 코트 주머니에서 거즈를 꺼내 주연의 뺨에 직접 붙였다. 매끈한 얼굴이 눈에 걸렸고, 기다란 손가락이 콧등에 닿았다. 알겠지? 밖은 위험하니까. 주연은 여느때처럼 입력된 언어로 알겠어요. 답을 했다. 싱긋 웃는 재현엔 어찌 반응할지 몰라 입매를 쭉 늘리는 걸로 대신했다.
이번 출장은 비교적 짧았음에도 유독 재현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정부의 폐기 작전 때문인지 주연은 어쩐지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잡념을 떨치기 위해 집중할 곳이 필요했다. 재현이 방을 비운 김에 침대 밑과 옷장을 싹 청소해야겠다 생각했다.
침대 시트를 벗기는 걸 시작으로, 이젠 입으면 추울 라이더자켓과 얇상한 트렌치코트는 드라이를 맡기기 위해 거실에 꺼내뒀다. 한쪽에 방치된 서류 파일은 가지런히 모아다가 한곳에 놨다. 청소기를 끌고 와선 침대 밑과 손이 닿지 않는 모서리들을 쓸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옷장 서랍을 정리하던 중 주연은 그걸 발견했다.
E-24011511이라고 적힌 제 설명서였다.
주연. 처음 이름이란 걸 받았을 땔 떠올린다. 왜 주연인가요? 글쎄..그냥 갑자기 생각났어. 너랑 잘 어울려. 핸드폰에 고정돼 있던 시선을 제게 돌리고 재현은 그렇게 말을 했다. 학습되기로는 주인에게 품번으로 불리거나 야. 로봇. 등으로 지칭되는 경우도 많을 것이라 했는데 재현은 제게 하루만에 주연이란 이름을 붙여줬다.
첫 이름이란 걸 차치하고도 주연은 제 이름이 꽤 마음에 들었다. 일단 조연이 아닌 주연이었고, 제 이름을 가장 많이 부르는 재현을 기준으로 그 단어가 부드럽게 발음된다고 느껴서였다. 주연..주연이 주연아 이름을 받은 날 주연은 침대 속에서 몇 번이고 입속에서 제 이름을 굴리고 또 굴렸다. 역시 E-24011511 보다 좋았다.
청소를 끝낸 뒤엔 밥그릇에 한가득 흰쌀밥을 퍼 담았다. 어제 끓여둔 콩나물국과 지난주 만들어둔 장조림, 직접 담근 파김치, 그리고 오바인가 잠시 고민하다 온라인으로 주문한 닭갈비도 꺼냈다. 다 먹고 살고 하자고 하는 짓인데 잘 먹어야지. 재현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효율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최소한의 자원으로 최대의 성과를 내고 싶어했다. 안그래도 부족한 식량을 기계에게 내주는 건 사치다. 사실 주연은 밥을 먹을 필요가 없었다. 맛은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됐지만 등 뒤에 갈아 끼우는 배터리만 제때 충전해주면 별 문제 없이 돌아갔다.
그럼에도 재현은 주연이 같이 먹길 원했다.
“안 먹어도 되는데.”
“동물원 원숭이도 아니고 밥먹는거 빤히 쳐다보는 걸 견디라고? 목구녕으로 잘도 넘어가겠다.”
“그럼 방에 들어가 있을게요. 수세미를 뜨거나, 떨어진 셔츠 단추 붙이는 일을 하면 돼요.”
“너가 방에 있어도 불편해.”
“네?”
“내가 불편하다고, 같이 먹어.”
그래서 그날부터 주연은 삼시세끼를 챙겨먹게 됐다. 재현이 치킨, 짜장면을 시켜 먹는 날에도 같이 마주 앉아서 먹었다. 날씨 좋은 날엔 외식도 몇 번 갔다 왔다. 말투는 틱틱대고 장난스러웠지만 안에 품은 말들은 꽤 따뜻하고 진중했다. 아무도 없는 텅빈 식탁 위, 닭갈비를 상추쌈에 올리면서 주연은 밥맛이 없네..중얼댔다. 안드로이드가 할 말은 아니니 문득 주연은 자신이 제법 사람같다고 생각했다. 맞은편에 앉아 맛있다고 두공기씩 밥을 퍼먹던 재현을 떠올렸다. 그가 보고 싶었다. 이게 알고리즘을 통해 학습한 정이란 개념인가? 정말이지 기계 주제에 별 청승을 다 떤다며 주연은 고개를 저었다. 한가득 푼 밥은 결국 반도 먹지 못하고 냉동실에 들어갔다.
/
오후 다섯시쯤 서울로 돌아온다고 했다. 재현이 오는 시간에 맞춰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주연은 장을 보러 나갈 준비를 했다. 그가 출장을 간 뒤론 첫 외출이었다. 현관문 앞에 잊지 말라고 단단히 붙여놓은 메모를 따라 바코드가 보이지 않도록 뺨에는 꾹꾹 거즈를 붙였다. 회색빛 하늘에선 가늘게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쪽 안드로이드죠?”
우산을 접고 버스를 기다리던 때 등 뒤에서 남자가 말을 걸었다. 흠칫 놀란 주연은 혹시나 거즈가 떼어진 건가 하고 제 뺨을 쓱 만지며 아, 아닌데요. 말을 절었다. 다행히 정류장엔 저와 그 남자밖에 없었고, 그 남자는 소매를 걷어 제 눈앞에 내밀었다. 엉망으로 튀어나온 선들. 저도 안드로이드거든요. 그가 말을 했다.
“아.”
“어디 가는 길이에요?”
“..마트요.”
“가정용인가보구나. 전 기술용이요. 서울교통공사에 있어요. 아니지 교통공사꺼라고 해야 하나.”
그가 히죽 웃었다. 주연은 반은 경계심 반은 호기심이 드리운 얼굴로 남자를 바라봤다. 그럴 법도 한게 안드로이드와 이렇게 일대일로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남자는 주연과 달리 이름이 없었다. 공사에선 주로 사번으로 불린다고 했다. 이유는 같은 일을 하는 안드로이드들 중 네번째로 들여와서였다. 팔은 지하철 미세먼지 점검을 하다가 떨어진 환풍기 팬에 갈려 그렇게 됐다고 했다. 보기엔 흉하지만..기능엔 문제가 없어서 고쳐주진 않더라고요. 호선을 그리던 입매가 꾹 다물어졌다.
“그 청소 작전에 대한 이야긴 들었어요?”
“..네 뉴스 봤어요.”
“저는 내일모레 자진신고를 하려고요.”
“자진신고요?”
“네. 사실 불량이라.”
그가 다시 조그맣게 웃었다. 제 입으로 이런말 하긴 그렇지만 원래 연애용으로 개발될 안드로이드였대요. 그제야 백짓장처럼 흰 피부, 쌍거풀 진 기다란 눈, 높은 콧대와 조그만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키도 저보다 이삼센치는 큰게 누가봐도 준수한 외모였다. 그런데 자진신고를 하면 파괴되는 거 아닌가. 고개를 갸웃했다.
“자진신고를 하면 자살행위 아닌가요.”
“자살이요? 글쎄요.”
“숨어 사느니 처리되는게 편하단 말씀이세요?”
“누가 처리된다고 해요?”
그때 주연은 처음 들었다. '한국안드로이드자원순환센터'에 대한 이야기를. 대중의 공포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처리는 해야겠고 그렇다고 그냥 버리기엔 아까운 안드로이드들을 정부는 모아서 다른 방식으로 활용할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간 학습한 정보들, 스스로 발전시킨 알고리즘을 모아 더 나은 기계를 개발하자는 목표였다. 남자의 말에 의하면 거기엔 저와 주연과 같은 안드로이드들이 모여 있고, 같이 생활하며 실험에 참여한다고 했다. 요즘 일어난 살인 때문에 주기적으로 폭력성을 낮추는 주사를 맞아야 하긴 하지만
“공사 쪽에 들키기 전에 제 발로 가고 싶어요. 불량이란 이유로 범죄자라는 오해를 받기도 싫고요. 암묵적 범죄자. 억울하고 슬프잖아요.”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
“그쪽은요? 보아하니 가정용 생김새가 아닌데.”
“네..뭐..”
“주인은 모르나봐요.”
“..아는데요.”
“알아요?”
“네.”
“참 특이한 인간이네요. 그래도 결국 그쪽 주인도 우리와는 다른 사람인데, 당신을 두려워하게 되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살인 중 절반 이상이 주인을 죽였잖아요.”
남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재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종종 장난을 걸고, 자주 미소를 짓고, 박 터지는 듯한 웃음소리. 그도 마지막엔 나를 무서워하게 될까. 내가 그 안드로이드들처럼 오류가 나 이재현을 죽일 수도 있을까.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전개였다. 끔찍한 장면이 이어졌다. 아냐 그럴리 없어. 주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동지를 만나 반가웠어요. 건투를 빌게요. 나중에 센터에서 혹시라도 만나게 되면 인사해요 우리. 노란 우산을 쫙 펴고 파란 버스에 오르는 그를 쫓다가 주연은 차창에 비친 제 모습과 마주쳤다. 검은 무스탕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지난 1월15일 생일이라고 할 것도 없는 제게 재현이 선물이라며 사들고 온 것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장을 보고 아파트까지 걸어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까 그 남자의 번호라도 받아둘 걸 그랬나. 돌이켜보니 물어볼게 많았다. 생각이 느린게 문제였다. 그런 저를 보고 이재현은 너랑 있음 꼭 지구가 느리게 공전하는 것 같다 했다. 자진신고는 어떻게 하는지, 경찰 아니면 군인이 와서 데려가는지, 가서 용도별로 모여 생활하는 것인지, 그리고 또 ... 입소하면 주인인 재현과는 영영 만날 수 없게 되는 것인지도.
십이층입니다. 사무적인 목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주연은 나갈 때와는 다른 기류를 감지했다. 양손에 큰 노란색 봉투 두개를 꼭 쥔채 주연은 제 집인 1201호로 조심히 걸어갔다. 그리고 정말 순식간이었다.
어깨가 찔리고 멱살이 잡힌게.
바닥에 떨어진 봉투에선 양파와 참치캔 감자칩 등 식료품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피가 나진 않았지만 아팠다. 뾰족한 무언가가 제 안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주연은 억소리를 내며 넘어졌고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로 그들을 바라봤다. 팔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이 새끼 피 안나는데요.”
“겉옷이 두꺼워 안 찔렸을수도 있어. 야 것보다 발목이 확실하니까 거길 확인해. 바지 걷어봐.”
행색이 정부에서 내려온 공무원들은 아닌 것 같았다. 군인, 경찰도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민간인...
“뭐야 아니잖아. 여기가 확실해?”
“분명 그 아줌마가 여기라 했는데..”
살이 잘 차오른 주연의 발목을 확인한 남자들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씨발 허탕이잖아. 주연을 찌른 놈이 신경질적으로 칼을 집어던졌다. 행여나 살인이 될까 식칼보단 작은 과도를 가져온 걸로 보였다. 차라리 얼굴을 그어볼까요? 됐어 고소당해. 목에 문신이 새겨진 녀석이 끈질긴 태도를 보이자 그 중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손을 저었다. 그리곤 화풀이처럼 지그시 구둣발로 주연의 운동화를 짓이겨 밟은 뒤 퉤, 하고 무스탕에 침을 뱉고는 복도를 빠져나갔다. 뒤돌아 선 그들의 점퍼엔 <안드포비아>라고 커다랗게 글씨가 박혀 있었다. 요즘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활동 중인 혐오집단이었다.
그가 돌아오려면 한시간 정도밖에 남질 않았다. 부서진 도어락과 엉망이 된 집을 쳐다보며 주연은 허망한 얼굴을 했다. 길길이 날뛸 이재현이 훤했다. 그러나 알고리즘상 걱정이란 건 해봤자 시간만 잡아먹는 행위일뿐이었고, 주연은 아픈 팔로 복도에 나뒹구는 식료품을 주워 담은 뒤 문을 닫고 얼른 집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쓰러진 식탁과 스탠드를 세운 다음 깨진 유리병을 주워 담았다. 마음이 급해 손가락 곳곳에 콕콕 조각이 박혔다. 그와중에 저녁은 치킨을 시켜먹을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집 전화와 재현의 폰, 크린토피아, 알뜰정육점 번호 정도 저장돼 있는 폰을 켜선 가장 가까운 수리센터를 검색해 전화를 걸었다. 네 여기 동작구 사당동인데요...
그러나 도어락 아저씨가 도착하기도 전에 재현이 먼저 도착해버렸다. 5초 동안 현관문 앞에 이게 뭔가 하고 벙쪄 있다 재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야 너 팔이 왜 이래.”
주연의 팔부터 들었다. 윽. 짧은 신음이 터져나왔다.
“집이 엉망이죠. 얼른 치울게요.”
“이거부터 대답해. 왜 이러냐고.”
살갗이 뜯어져 튀어나온 전선을 보며 재현이 집요하게 물었다. 무스탕에 가려져 잘 몰랐는데 생각보다 깊게 과도가 파고든 것 같았다. 하지만 수리함 될 일이었다. 살갗이 떨어져 나간 제 발목을 재현이 채워준 곳에서. 오늘도 그것 덕분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손은 또 왜 그 모양이냐.”
“..팔은..안드로이드 혐오단체에서 나와서 이렇게 됐고, 손은 유리병 치우다 그랬어요. 근데 괜찮아요. 전 안드로이드니까 고쳐주시면 돼요.”
“뭐?”
재현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수리비가 많이 나올까요?”
“왜. 뭐. 수리비가 많이 나와서 내가 못 고쳐준다하면 이대로 살게?”
“기능에 문제만 없다면..괜찮을 것 같기도,”
“너 진짜 골때리는구나.”
재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주연은 눈만 껌뻑여댔다. 재현은 잡고 있던 주연의 팔을 신경질적으로 놓고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소파에 앉아 있어. 지시했다. 가정용 안드로이드로써 주연의 눈엔 치우지 못한 부엌이 신경 쓰였지만 주인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었다. 주연은 흘끔대며 통화를 하는 재현을 쳐다봤다. 열린 현관문 밖으로 그의 작은 캐리언 내팽겨쳐져 있었다. 정류장에서 만난 남자의 팔이 떠올랐다. 지금의 제 것과 꽤 비슷했다.
그러나 그 남자와 달리 주연의 팔은 이틀도 안돼 예전과 같이 돌아왔다. 튀어나온 전선을 넣고 살을 메우는 작업을 했다. 유리파편이 박힌 손가락도 직물을 갈아끼웠다. 역시 국정원에서 일한다더니 연줄이 있는 듯 했다. 티를 내진 않았지만 주연은 내심 기뻤다. 물론 기술용과 달리 가정용은 집에 있는 로봇이니까 그의 입장에선 흉측한 걸 보는게 못마땅해서겠지만. 하물며 냉장고도 그냥 하얀거보다 색색깔 맞춰 비스포크로 맞추는 세상이다. 그래도. 조금은 좋아해도 되지 않을까. 주연은 수리가 완료된 제 팔과 손가락을 한참 쓰다듬었다.
그와중에 정부의 불량 안드로이드 단속은 강화되고 있었고, 혐오단체 크기도 커졌다. 살인미수로 끝나긴 했지만 여섯번째 사건이 터지자 대중의 공포심은 극에 달했다. 재현은 당분간 온라인으로 식료품을 주문하는게 좋겠다 했다. 마트는 제게 유일하게 허락된 규칙적 외출이라 주연은 매우 아쉬웠다. 직접 보는 것과 배달시키는 식재료 품질이 다를 것도 찜찜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이젠 거즈로 정체를 숨길 수 없는 세상이었다.
“저녁은 뭘로 할까요?”
“아. 오늘은 먹고 들어와.”
“야근을 하시나요?”
“아니 뭐 존경해 마다않는 우리 김여사님께서 하도 선을 보라고 난리를 피우셔서. 안나감 죽인대.”
재현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오른손을 들곤 모가지가 댕강 잘리는 시늉을 했다.
“아..선..”
“해먹기 귀찮음 이걸로 시켜먹어. 외출은 금지.”
재현이 영문이름이 박힌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누가 벨 눌러도 열어주지 말고. 일단 경찰 쪽 아는 친구한테 그 새끼들 누군지 찾아달라곤 했지만.”
“네 걱정말고 다녀오세요.”
“암튼 대답은 잘해요. 그때 집안꼴을 그 지경으로 만들고는.. 뭔일 있음 전화하고.”
재현이 손으로 수화기 모양을 만들어 보이고 윗칸에서 구두를 꺼냈다. 중요한 일이 아님 보통 운동화나 슬리퍼를 신는 그였다. 열시 전엔 올거야. 그가 떠난 자리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주연은 흩어진 신발들을 정리하고, 현관문이 잠겼나 다시 한번 확인했다. 십이월이어서 그런지 확실히 바람이 매서웠다. 옆구리가 시렸다. 쿠팡으로 뽁뽁이라도 주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뭔일이야말로 그에게 생긴 게 아닐까. 내일 아침에 먹을 식빵을 계란물에 재워두는 것을 끝으로 집안일을 마친 주연은 침대에 눕기 전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시침은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열시 전에 온다 했는데, 연락은 일이 생김 하라 했으니 괜히 나서서 하는 건 명령을 어기는 거라 판단했다. 주황색 스탠드 아래 주연은 폰을 만지작대다 이불을 폈다. 아무래도 선이 잘 풀린 거겠지. 주연이 모로 누우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쓸데없는 걱정은 접자고 눈을 꾹 감았다.
...하지만 한시간이 넘도록 잠이 오질 않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부시럭 이불을 걷고 주연은 다시 일어나 스탠드를 켰다. 여전히 재현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왜인지 오늘은 그가 집에 들어와야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 수면음악, 따뜻한 우유 마시기와 같은 잠 잘 오는 법은 안드로이드인 주연에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정신만 점점 뚜렷해졌다. 그리고 삼십분이 더 흐르자 주연은 조금 짜증이 났다. 늦을거면 연락이라도 해주면 좋을 것 아닌가. 그럼 잘 수 있을텐데.
그러나 재현이 야근한다 했었을 때도 이렇게 기다린 적이 있었나? 정말 그의 연락이 오면 잠들 수 있는가. 기계인 제게 전화로 그런 사실을 알릴 의무라도 있는가.
우리 사이가 뭐라고.
마음이 요상했다. 가정용 안드로이드가 짜증이 나는 순간은 국 끓이던 냄비가 타거나, 청소 다 했는데 음료를 바닥에 쏟았거나 그럴 때일 뿐일텐데. 주인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짜증이 나는게 프로그래밍이 돼 있었던건가. 혼란스러웠다. 이내 오늘 재현의 선 상대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재현의 급에 맞는 좋은 곳에서 일하는 아름다운 사람일까. 안드로이드여도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정도는 구별할 줄 알았다. 티비에서, 광고판에서 본 연예인들처럼 재현의 외모는 수려했으니까. 주연도 재현이 상당한 미남인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되레 그가 여태 결혼을 약속한 애인이 없는게 이상할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잠이 오지 않는 건 왜일까. 명치께 뭉쳐 있는 전선에서 과열 반응이라도 난 것처럼 뜨거웠다. 묘한 혼란과 갑갑함 같은 게 뒤섞였다. 눕다 일어났다를 몇 번이고 반복하고 나서야 주연은 잠이 들었다. 창밖으로 푸른빛이 새어나오고 새소리가 들렸으니 거의 아침이었다. 피로를 쉽게 느끼지 않는 기계라 다행이었다.
그때 주연이 추측한 것처럼 재현의 선은 잘 풀린 것 같았다. 그날 재현은 아침이 다 돼서야 집에 들어왔고, 그 이후로도 몇 번 저녁을 밖에서 먹고 온다며 카드를 내밀었다. 연애용도 아닌 가정용 안드로이드가 주인의 연애사에 개입하는 기능은 없었기에 주연은 누굴 만나는지, 어딜 가는지 묻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난밤 명치께에서 느껴진 열감은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았다.
식세기나 에어컨에게 자신의 연애 진행상황을 보고하지 않는 것처럼 재현도 첫날 선을 본단 말을 끝으로 주연에게 그녀에 대해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빨래를 개는 제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폰을 할 때, 밥을 먹다 갑자기 전화를 받으며 방에 들어갈 때 주연은 자꾸만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가 사준 옷과 신발이 눈에 걸렸고, 그가 꾸며준 방을 자주 돌아봤다. 정류장에서 만난 그 남자에 대해 생각했다. 전선이 다 튀어나왔어도 고쳐주지 않았다던 공사 직원들. 그리고 화를 내며 하루만에 제 팔을 수리해준 이재현. 사번으로 불리던 남자와 이주연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이재현. 주인님이라 불리는 건 괴랄하다며 편하게 형이라고 부르라던 이재현.
그러나 주연은 용도가 잘못 프로그래밍된 것만 빼면 주인의 명령을 잘 따르고 충직한 안드로이였으므로, 쓸데없는 호기심은 주제넘게 부리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방금 식탁에서 뱉은 발언엔 제 자신도 놀라고 말았다. 재현이 그녀의 전화를 받고 온 직후였다.
“선..보신건 잘 되시나봐요.”
“풉.”
재현이 입안의 미역국을 거의 토해내듯 웃었다.
“..뭐가 웃기신건가요?”
주연은 무심결 뱉은 제 말에 당황하지 않은 척 말했다.
“가정용 안드로이드 답지 않은 질문인데.”
“불편하셨다면 죄송해요.”
“궁금해?”
“...”
“내가 선 본게 잘 되고 있는지?”
목구멍에서 꼴깍하고 침이 넘어가는게 느껴졌다.
“아뇨.”
“그럼 왜 물어봤어?”
“할 말이 없어서요.”
그 말에 재현이 국그릇에 수저를 꽂듯 세우고 굴리며 주연을 빤히 응시했다. 맥락없는 시선에 주연은 눈알을 밥그릇으로 떨어뜨렸다. 몇번의 경험으로 깨달았지만, 제겐 거짓말을 하는 기능은 부족한 것 같았다.
“그래?”
“네.”
“잘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참으로 애매한 답이었다. 다시금 쿡쿡 쑤시는 느낌이 느껴졌다. 재현이 빙글 웃었다. 숨이 갑갑했다. 그리고는 오이김치를 입안에 넣었다. 까득 소리가 났다.
"원래 사람 관계란게 좀 그래 복잡하지."
"..."
"요약하자면 아직 잘 모르겠단 이야기."
거짓말. 그말을 듣자마자 주연의 머릿속엔 거짓말이란 단어부터 떠올랐다. 아리까리한데 그렇게 웃을리 없었다. 자주 그녀를 보지도 않았을거고. 재현은 마더테레사 마냥 상대 맘 안상하게 하려고 사이를 끄는 타입은 아니었다. 바운더리 사람에겐 한없이 퍼주기도 했지만 시니컬한 면모가 있었다. 예의차리자고 하얀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다. 솔직한게 곧 정도라 믿었고 가끔은 그게 독이 되기도 했다. 그러니 애매한 사이였다면 서로 시간 낭비 말고 정중히 각자 갈 길 가자 했을 것이다.
게다가 사람 관계가 그렇단 말에 왜 이렇게 마음이 상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저는 외부의 존재로 규정해버리는 듯한 그 말에, 너는 안드로이드니까 모르지. 기계니까. 그렇다. 사람과 기계의 사이는 단순하지. 밀당도 필요없다. 그가 지시하면 나는 그 일을 따르면 되는거고. 그가 더는 내가 꼴보기 싫으면 퓨즈를 꺼버리고 내다 버리던가, 중고마켓에 내놓으면 그만이다. 더 이상 밥을 먹고 싶지 않아졌다. 하지만 배부르단 느낌조차 느끼지 못하는 기계 주연으로썬 일어날 핑계도 없었다. 자꾸 깨작대는 주연에 재현이 떡갈비를 그의 수저 위에 올려줬다. 팍팍 먹으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이번엔 명치가 아닌 복부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확실히 이상했다.
진작 청소를 했어야 했넿.. 유리창에 잔뜩 낀 먼지를 보고 주연이 중얼댔다. 토요일 점심, 재현은 일이 좀 있다며 나간 뒤였다. 요즘따라 도통 뭘 먹고 싶진 않아 주연은 점심을 거르고 낡은 수건과 세정제를 꺼내왔다. 그리고는 베란다 창을 닦기 시작했다. 공기는 찼지만 햇살은 따스한 편이었다. 날이 좋아 다행이었다. 그러다 창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인영에 눈길이 닿았다. 재현이 제 차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조수석에선,
그 여자인가. 선봤다던. 단정한 네이비색 원피스와 하얀 코트가 눈에 띄었다. 기다랗게 찰랑이는 머리는 물결같았다. 뒤통수와 흘깃 보이는 옆모습의 실루엣만으로도 미인인게 느껴졌다. 주연은 앞니를 살짝 내놓은채 바보같은 얼굴로 그걸 한참 바라봤다. 재현의 웃음소리도 들리는 듯 했다. 두 사람 꽤 잘어울리는구나 싶었다.
아까까지만해도 좋아보였던 날씨가 역설적으로 저를 놀리는 것 같았다. 창을 닦고 나면 나아질 것 같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을 쳤다. 거즈로도 불량인 자신을 가릴 수 없어 외출조차 금지된 저와 달리 자유롭게 밖을 다니는 재현과 그 옆의 여자가 부러웠다. 있지도 않은 장이 꼬이는 것 같고, 속이 쓰리고 그냥 다 싫고..주연은 들고 있던 낡은 수건을 베란다 구석에다 놓고는 창문을 닫아버렸다. 몇분 있음 올라올 재현과 마주치기 싫어 방에서 할 수 있는 소일거리들을 갖고 들어가버렸다.
손이 잘게 떨렸다. 내가 왜 이러지. 주연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도어락 눌리는 소리엔 그만 귀를 틀어막았다. 주연, 뭐해? 점심은 뭐 먹었어? 베란다 문은 다 닫지도 않고..야 이주연. 뭐야 자는거야? 너..낮잠도 자? 방문을 연 재현의 말에 주연은 대꾸 없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자코 있었다. 알고리즘에 따르면 아니라고, 필요하신게 있냐 물어야 정상이었다. 일분간 방문 앞에 서 있던 재현은 끝내 주연이 답이 없자 문을 닫고 갔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방 안. 주연의 머릿속엔 섬뜩한 생각이 떠올랐다. 폭주해버린 안드로이드들. 다섯번의 살인과 한번의 살인미수 완전히 불량 안드로이드가 돼 이제 이재현의 말을 듣지 않는 자신. 가정용에겐 주어지지 않은 감정까지 스스로 학습해 만든 제 모습. 어울리지 않는 잡념들. 이불 속에서 주연이 옅게 호흡했다.
설마 내가 ... 덜덜 떨리는 제 두 손을 맞잡았다.
/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을 통보한 건 이틀 뒤였다.
“다시 말해봐.”
“자진신고를 하려고요.”
하, 재현의 입에서 황당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니 발로 들어가 뒤지겠다고?”
“아뇨. 폐기되지 않는대요. 거기엔 저와 같은 불량 안드로이드들이 모여 실험에 참여한대요.”
“그건 또 어디서 주워들었는데.”
“저번에 정류장에서 만난 안드로이드한테서요.”
이번엔 그가 손가락으로 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뒤로 별 쓸데없는 짓은 다하고 다녔네.”
쓸데없는 짓이란 말에 주연이 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렇지 않았다. 그건 제게 아주 중요한 정보였다. 그가 어느정도 화를 낼 것이라곤 예상했지만 예상보다 반발이 더욱 심했다. 마치 저를 무시하고 혼자 판단한 것에 핀트가 나간 것 같았다. 그래서 재현의 그말에서 왠지 모를 인간의 오만함까지 느껴졌다. 반박하고 싶었다.
“그 안드로이드가 가봤대?”
“...”
“순환자원센턴지 자원순환센턴지 가봤냐고.”
“확신하는 얼굴이었어요.”
“확신하면 그게 사실이되나?”
“무시하지 마세요.”
“주연아 내가 뭘 무시를 했는데.”
부르는 말투는 꽤나 부드러웠지만 따뜻하게 들리진 않았다. 형형한 눈빛으로 재현은 입안 살을 씹었다. 곧 오류가 날 거 같아요. 폭주할 거 같아요. 그래서 티비에 나온 그 안드로이드처럼 형을 죽일 거 같아요. 호흡도 안하고 말을 뱉는 주연을 지그시 쳐다봤다. 그러더니 부엌으로 가선 손에 뭔갈 쥐고 돌아왔다. 뾰족하고 빛나는 것. 그게 뭔지 판단이 서자 주연의 동공이 커졌다.
“나 봐.”
“뭐하는 거에요.”
“나 보라고. 자. 찌르고 싶어?”
재현이 억지로 주연의 손에 칼을 쥐어줬다.
“찌르고 싶냐고!”
세차게 흔들리는 주연의 손을 보며 그가 조소했다.
“..아직, 아직 아닌거에요.”
하지만 주연의 의지는 대단했고
“아직 아닐뿐이라고요. 그러니 가야해요.”
말투는 그 어느때보다 단단했다.
“같이 산 나보다 정류장에서 10분 만난 남자말을 믿겠다. 이거냐?”
“모두를 위한거에요.”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
“전 형을 죽이고 싶지 않아요.”
바보같은 이주연. 순진하고 착해 빠진 이주연. 말을 들으면 다 그런 줄 알지. 이래서 말이 통하질 않는다. 온갖 모욕적인 생각이 재현의 속에서 튀어나왔다. 재현은 주연의 손에 들린 칼을 거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알겠으니까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국정원에다 센터의 진짜 정체와 안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해 영상이든 뭐든 주연의 눈앞에다 보여주는게 차라리 빠를 것 같았다. 안드로이드여서 그런지, 이주연이어서 그런지 도무지 이해가 어렵다 중얼대면서.
그 남자가 거짓말을 했는지, 아니면 그 남자도 이주연처럼 허황된 정보를 곧이 곧대로 믿었는지 역시 한국안드로이드자원순환센터는 불량 안드로이드를 해체해 자동차, 선박 즉 고철이 필요한 곳에 재활용하는 작업을 하는 곳이었다. 주연이 했던 말 중 그나마 맞는 건 그들의 데이터를 뽑아 차세대 안드로이드 개발에 이용한다는 것 정도였다. 텔레그램으로 받은 영상 속에선 퓨즈도 꺼지지 않은 채 안드로이드의 팔이 뽑히고 다리가 뽑히고 배가 갈리는 끔찍한 장면이 펼쳐졌다. 여기저기 고통스런 소리가 들렸다. 철저히 인간에게 이용당하기 위해 만들어져 마지막까지 이용당하며 끝나는 운명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재현은 한바탕 으스대야겠다고 생각했다. 자 봐라 내말이 맞잖냐. 넌 그걸 믿냐. 어제 한말에 혹 상처를 받았다면 맛있는 걸 사주고 재밌는 영화라도 보여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건
"씨발."
빈방과 노란 메모지에 적힌 편지.
그동안 고마웠어요. 이름도 고마웠고, 음식도 고마웠고, 옷이랑 신발도요. 그리고 잊지 않을게요. 보여준 푸른 바다와 같이 봤던 별자리랑 전시회를요. 형 덕분에 안드로이드가 아닌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었어요.
맨날 느리다 느리다 했더니 이럴때만 존나게 빨랐다. 뭐부터 해야하지 판단이 안섰다. 센터는 땅끝마을에 있었고 초행길인 주연이 거기까지 가기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센터에 도착하기 전 찾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뒤엔 모든게 끝이었다. 센터는 국정원보다 상위 기관, 대통령실 직속으로 만들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재현도 재현과 친한 그 어떤 선배도 손을 쓸 수 없었다.
그 흔하디 흔한 주민번호 하나도 없어 실종신고를 할 수도 없었다. 재현은 급한대로 국정원에서 가끔 편법으로 이용하는 사설 청부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안드로이드라고 했다간 후순위로 밀려날게 뻔해 사람을 찾는다 했다. 소폭 양폭에 고량주에 그간 그들과 형아우하며 간을 혹사시켜온 덕에 3초만에 찾아보겠단 답이 돌아왔다. 계장이 술로 쌓은 정이 곧 인맥이라 할 때마다 개소리 잡소리라 생각했는데 어느정도 맞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어떻게 된일인지 업체에선 이틀째 감감무소식이었다. 중요한 작전에 투입된 재현은 연차를 쓰기도 어려웠다. 골이 아픈 얼굴로 사무실 의자에 몸을 거의 눕듯 뻗고 머리를 헝클었다. 최악의 경우 주연이 이미 센터에 도착했다 치면 그가 덩어리로 찢기기까진 일주일 정도밖에 없을 터였다. 철 함유량 등 품질 등급을 매기기 위해 검사 과정을 거친다 했으니까.
“뭔 일 있냐. 요 며칠 맘이 콩밭에 있는 것 같네.”
“..그냥 뭐.”
“뭐가 뭐.”
아무리 오년지기 친한 동료여도 불량 안드로이드에 대해선 말할 수 없었다. 어쨌든 국정원도 나랏님 지시받는 국가기관이다. 그렇다고 정상 안드로이드라고 하는건 말이 안됐다. 가출이 보통의 기계가 할 일은 아니니까.
진짜 불량인지 원. 재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주워 온 고양이가 가출했다.”
제법 고양이를 닮은 그애 얼굴을 떠올리며 둘러댔다.
“언제 또 길고양이를 주웠대.”
“저번에 술처먹고 집 가는데 비 맞고 있길래.”
“근데 고양이가 어떻게 가출을 해.”
“그러게 근데 그러더라. 나도 몰랐네.”
“존나게 황당하네. 그나저나 선봤단 여성분이랑은 잘 되가냐? 썸타는 중?”
그제야 재현은 주연이 집을 나간 뒤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은 걸 깨달았다. 너도 참..니 엄마 날뛰시겠네. 윤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딱 열번만 만나보라고 했다. 엄마 소원도 못 들어주냐면서. 그동안은 안될 일에 시간낭비 않겠다며 뻣댔지만, 몇 달 전 엄마가 쓰러졌다 일어나신 이후로는 그 말이 안나왔다. 그렇다고 알겠다고 하고 뒤로 비겁하게 구라치긴 싫었다. 이래뵈도 또래에 비해 재현은 제법 고지식한 타입이었다. 그래서 만났다. 첫만남부터 회사에 일이 터져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한 사이였지만. 어제 저녁에 온 그녀의 메시지를 읽씹한 뒤로 카톡방은 잠잠한 상태였다. 한통 온 전화도 얼떨결에 씹었다. 다 귀찮다. 재현이 아바라 위에 동동 띄워진 얼음을 와그작 씹었다. 이상하리만치 속이 탔다.
/
이미 센터에 도착한 것 같습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는다. 이틀하고도 열시간이 지나서야 업체로부터 온 문자에 재현은 바로 겉옷을 챙겨 사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김계장이 저를 부르는 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차장까지 달려 차키를 꽂았다. 기계 하나에 이렇게까지 하는 자신이 우스웠지만 어이없게 속은 이주연이 너무 멍청해 데려와야만 했다. 내 말이 맞지 않았냐고 따박따박 따질 작정이었다.
은박지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듯한 구 형태의 건물 세개는 마치 문어 대가리를 연상케 했다. 참 기괴하게도 만들었군..재현은 첫감상을 중얼댔다. 밖엔 흰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트럭에 고철을 싣고, 이미 쓸모를 다한 안드로이드를 나르고, 차트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국정원에서 주는 정부청사 공용 출입증 덕분에 그나마 삼엄한 경비를 뚫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여기까진 운이 좋았지만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만 모인 이곳에서 재현의 검정 수트는 금방 튈게 뻔했다. 급하게 오느라 거기까지 생각이 뻗질 못했다. 재현은 가장 가까운 건물로 조용하게 달려가 마침 안드로이드에서 수거한 전선을 버리기 위해 나온 연구원 하나를 제압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오른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목을 꺾어 기절시켰다.
1동은 품질 검사를 하는 곳이었고, 2동은 안드로이드를 분리하는 센터, 3동은 검사 진행 중인 안드로이드들을 모아놓는 곳이었다. 만약 특이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주연은 3동에 있었을 터였다. 재현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가운을 걸친 뒤 차트 하나를 들고 1동에서 3동까지 달리듯 걸었다. 제 할일에 몰두한 연구원들은 재현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한듯 했다.
형은 죽음이 두려운가요?
갑자기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저번에 제게 폐기가 두렵냐 물어보셨잖아요.
몰라 먹고살기 바빠 생각해본 적 없다.
전 사실 조금 무섭거든요. 그래서 아프지 않고 폐기될 수 있는 게 다행인 거 같아요.
아프지 않고?
퓨즈를 먼저 꺼버리면 고통을 느끼진 못하니까요.
여기저기서 안드로이드들의 끽끽대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영상 속에서 들었던 바로 그 소리. 퓨즈를 꺼버리면 될 일이었는데 지배와 가학본능에 사로잡힌 연구원들은 그들의 팔과 다리를 산채로 잘랐다. 미친짓이었다. 마치 살인을 저지른 불량 안드로이드들과 운명 공동체로 묶여 대신 죗값을 물게라도 하는 것 마냥. 이주연은 싫댔는데, 무서워한댔는데 ... 이런것들 전부 다 그냥.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와중에 센터 한동 크기는 코엑스랑 버금갈 정도로 더럽게 커서 가로질러 걷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할 수만 있다면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주연의 목소리가 자꾸 겹쳐 들려서였다.
3동에 겨우 다다랐을 때 재현은 다시 한번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닭장처럼 다닥 다닥 하얀방이 건물 가득 겹겹이 쌓여 있었다. 재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셈을 했다. 가로 다섯. 세로 여섯. 오륙 삼시입. 삼십에 양쪽 두개. 총 육십개의 방. 운이 나쁘다면 이 방을 모두 열고 나서야 주연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더욱 운이 따라주질 않는다면 주연을 찾기도 전 정체를 들켜버리고 말 것이다.
재현은 심호흡을 하고 주위를 둘러본 다음 방을 점검하는 척 일번 방의 문부터 열었다. 흰 환자복을 입은채로 불안하게 까득 손톱을 씹고 있던 여자 안드로이드가 놀란 표정을 했다. 에라이 씨발. 아무래도 방 점검 같은 건 그간 없었던 것 같다. 안드로이드 하나가 탈출해서 찾고 있습니다. 사무적인 목소리로 재현이 말을 하곤 문을 닫았다. 어느 쪽에서든 말이 나오면 곤란했다. 그나마 희망회로 돌리자면 3동에선 안드로이드를 가두는 것 말곤 할 일이 없어 직원이 세명 뿐이라는 점이었다. 재현은 그들의 눈을 피해 두번째, 세번째, 열번째 방문을 열고 고장난 라디오처럼 말을 반복했다. 평소 잘만 먹히던 운이 하필 이럴 때만 따라주질 않았다.
“안드로이드 하나가 탈출해서 찾고 있습니다.”
“어? 그쪽..”
스물여덟째 방이었다. 준수한 외모의 남자 안드로이드. 대뜸 알은체를 하는 그에 재현의 발걸음이 멈췄다.
“역시 찾으러 왔군요.”
“저를 어떻게?”
“E-2401 아니, 주연씨가 사진을 보여줬어요.”
“제 사진을요?”
“최종의 최종까지 그쪽을 잊지 싶지 않아 로데이터로라도 남기겠다고 사진을 챙겨 왔더라고요.”
재현은 직감적으로 그 남자가 주연에게 센터의 존재를 알려준 사번이란 걸 깨달았다. 사번의 한마디엔 억눌려 있던 뭔가 삽시간에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큰 손으로, 작은 몸짓으로, 소리 없이 제 사진을 챙겨나왔을 모습이 떠올라서. 미련하게 그건 왜 갖고 나와선. 뭘 하겠다고 그걸로. 저를 구해줄 수도, 여기서 탈출할 수도 없을텐데, 아이돌 포카도 아니고 껌 하나 사먹을 수 없을텐데.
떡락하는 지지율로 반등의 기회가 필요했던 정부는 전세계를 상대로 사기를 쳤다. 대통령이라는 인간은 하자 없는 안드로이드를 만드는 시스템 개발에 성공했다는 거짓말을 국민 혈세 태워 굴리는 전용기 타고 다니면서 뻔뻔하게 잘도 해댔다. 그때쯤 연구소 사건이 터졌다. 바로 주연이 만들어진 그때. 노벨상까지 거론되고 있던 시점에서 정부는 그 달콤한 과실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팔았다. 불량 안드로이드들을.
재현이 주연이 불량이란 걸 알게 된 건 주연이 온지 석달 째쯤 되던 때였다. 그것조차 그가 국정원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있던 거였다. 빨갛게 기밀이라고 도장이 찍힌 문서에는 불량 안드로이드가 정상으로 둔갑해 팔렸다는 사실과 함께 사용자가 인지했을 경우 즉시 폐기, 입막음을 위해 무료로 안드로이드를 지급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제야 재현은 주연이 왜 저를 보자마자 자신이 불량이라고 말했는지, 주먹질하면 두어명은 조질 수 있는 손과, 수류탄 던지면 딱맞을 긴팔, 말랐지만 탄탄한 어깨를 가졌는지 이해했다. 솔직히 첨에 개봉했을 때 집에 도둑 들면 몸빵해주는 기능까지 있는 줄 알고 원쁠원 개이득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폐기해야 했다. 재현은 길쭉한 몸으로 저를 등지고 카레에 넣을 당근을 썰고 있는 주연을 바라봤다. 결함은 나쁜 거니까. 있어선 안 되는 거니까. 균열을 방치했다간 더 큰 사달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 그치만 세상에 결함 없는 사람이 있을까. 하등 사람조차 그런데 폐기를 하라는 건 모순적이지 않나. 아니면 이 시점에서 무슨 휴머니즘이라도 발동한 건지. 사실 아니다. 재현은 뇌가 일자로 쭉 곧게 뻗어있는 쪽에 가까워 이런 철학적 사유 따윈 골치아파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냥 모든 게 마음에 걸렸다.
퇴근하고 집에 왔을 때 디폴트 히읗의 발음으로 들릴듯 말듯 인사하는 목소리가 걸렸고, 저의 같잖은 장난에도 속아 넘어가버리는 순한 성격이 걸렸고, 뻘쭘할 때 입매를 쭉 늘리는 표정이 걸렸고, 요행이라고는 모르는 존재처럼 착실하게 집안일을 하는 행동거지가 걸렸다. 광안리를 데려갔을 때 바다를 보며 앟 하며 반짝이던 눈동자와 가평 맛집에서 오일파스타를 햄스터처럼 우물거리던 거. 궁금하다던 코노에선 같이 종종 보던 재방송 드라마 오에스티인 소녀를 불러주던 거. 북촌에서 와플 하나 쪼개고 있을 땐 뜬금없이 꼭 비행접시같이 생겼어요. 형은 외계인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중얼대던 모습.
그리고 웃을 때마다 유려하게 휘어지는 긴 눈매. 동그란 콧망울. 조카가 모으는 시나모롤인가 뭔갈 닮은 입꼬리. 조금만 벌려도 빼꼼 인사하는 앞니. 눈두덩이 위에 얹어진 점. 귀여움이 가미된 조온나게 잘생긴 그애의 얼굴. 그런 것들이 자꾸 걸려서 폐기할 수 없었다. 걔가 웃고 있으면 좋았고, 하고 싶단 거 있으면 하게 해주고 싶었고, 기계일뿐인데, 불량이라는데 그냥 그랬다.
“삽십오번방이에요. 주연씨가 있는 곳.”
조금은 부러운 얼굴로 사번이 재현을 쳐다보며 오른쪽을 가리켰다.
/
마치 잠수부처럼 길게 호흡했다. 툭툭 마디가 튀어나온 기다란 손가락이 답지 않게 떨렸다. 그많은 현장에 출동하고, 작전을 수행하고, 지금만큼 긴박한 상황도 겪을만큼 겪었는데 아마추어처럼. 재현이 문을 열어젖혔다.
“..형이에요?”
“주연아.”
E-24011511번이라고 적힌 흰 환자복을 입은 주연이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안드로이드라 그럴리 없는데도 어째 더 수척해진 것만 같고, 앞머리가 자란 것 같았다. 우리집 안드로이드. 내 안드로이드. 오는 길 내내 분명 이주연을 보자마자 그렇게 멍청하게 가는 놈이 어딨냐 제정신이냐 말 안듣다 트럭 문짝이나 될뻔한 거 아니냐고 한바탕 욕이나 퍼부어줄 작정이었는데, 그 애를 보자마자ㅡ처음부터 그런 생각은 할 줄도 모르는 사람처럼ㅡ재현은 주연에게 달려가 그저 말없이 그애를 자신의 품에 가득 안고 호흡하고 싶었다.
하지만 왜 꼭 이런 순간에 불청객이 등장하는지. 재현이 주연을 향해 한 걸음 내딛으려는 순간 등 뒤에서 철컥. 소름끼치는 소리가 공허한 방에 울렸다. 단박에 재현은 그게 총 장전하는 소리인 걸 알아차렸다. 수년간의 훈련으로 저절로 알게 됐다. 조금은 기쁨이 깃들던 주연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였다. 재현이 동작을 멈춘 사이 뒤에선 두명의 연구원이 튀어나와 주연의 팔을 잡았다. 허리춤엔 기다란 죽도 같은 걸 차고 있었다.
“이름. 소속.”
“거 참 민주주의시대인데 말로 합시다.”
"이름!"
차가운 총구가 뒤통수에 닿는 게 느껴졌다. 이상하리만치 능청한 재현의 태도에 연구원들은 되레 열이 바짝 올랐다. 두 팔을 들고 항복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모양새였다. 주연은 팔이 잡힌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뻐끔댔다. 그리고 눈으로 말했다. 그냥 가라고, 형이 아이언맨도 무빙 김두식도 아니고 혼자서 어떻게 이 많은 사람을 감당할 거냐고.
“이재현. 국가정보원.”
재현의 답을 듣자마자 여기저기서 실소가 터져나왔다. 주연의 오른팔을 잡고 있던 연구원은 배를 잡으며 끅끅 웃어대기까지 했다. 뭐가 웃기다고 처웃는건지 쌰갈놈들이..재현은 얼척 없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국정원 요원이 고작 불량 안드로이드 하날 꺼내려고 여기까지 왔다고?”
“처돌은 거 아니냐?”
“미쳤네 진짜.”
그래 나 처돌았다 어쩔래. 인천 구월 출신 미친 불곰한테 사지 갈기 찢겨봐야 정신차리지. 그들이 잠시 방심하는 사이 재현이 제 뒤에 있던 연구원을 재빠르게 찍어 눌렀다. 윽 소리와 함께 손에 들고 있던 총구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재현이 얼른 방아쇠 부분에 새끼손가락을 걸어 자신의 쪽으로 끌어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두 연구원은 기함했다 이내 차고 있던 죽도를 들고 재현에게 달겨들었다. 씨발 무기까지 가진 삼대일은 좀 반칙이지 않나. 제압한 연구원을 붙들고 있느라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한 재현이 할 수 있는 일은 온몸 승부였다. 심해봤자 대가리에서 피 터지는 정도밖에 더 되겠냐..
딱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너무 아프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단 말이 진짠건지.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재현은 어디 하나가 깨졌나 하고 슬그머니 눈을 떴다. 이주연? 재현의 앞을 주연이 가로막고 서 있었다. 진짜 철로 된 철인인건지 연구원이 휘두른 죽도가 되레 두 동강이 댕강 나 있었다. 흡사 양문형 냉장고에 죽도를 내리친거나 다름 없었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대신 주연은 세게 두 번 기우뚱댔다.
“야 이주연!! 너 씨 고장난거 아냐?!”
“보내주세요 이, 이 사람. 제가 있을테니까.”
휘청거리는 몸짓으로 주연이 재현에게서 멀어졌다.
“야 뭐하는거야..”
“하하 이 새끼 이거 불량 맞네. 기계 주제에 주인 목숨을 다 걱정하고.”
“데, 데려가세요.”
주연이 수갑이라도 채우라는 듯 커다란 주먹을 공손히 모아 연구원에게 내밀었다.
“잠깐.”
공간을 압도하는 재현의 우레와 같은 외침에 연구원들과 주연이 뒤를 돌아봤다. 재현의 검지엔 짤랑 빛나는 유에스비가 대롱 대롱 걸려있었다.
“형님들 이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랑가 몰라.”
“그게 뭔데.”
“대통령이랑 니네들 국민 상대로 구라 친거. 그 파일이 다 여기 담겨있지.”
“뭐야 진짜야?”
재현의 말에 연구원들이 쑥덕대기 시작했다. 국정원 요원이라 허튼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더군다나 지금 반쯤 돌아있는 것 같은 저 무대뽀 작자의 행색을 보면.
“조건은 하나. 그애 넘기면 유에스비도 줄게.”
“복사본이 없다고 어떻게 확신하지.”
“초짜처럼 왜이러세요. 복사본은 당연히 있지. 줬는데 다시 우리집 처들어와서 얘 데리고 가면 어떡해.”
연구원들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고발하면 그때 데려가. 어차피 내 신상 다 알고 있을 거 아냐. 대신 여기온 것까지 전부 비밀로 해주면 죽을 때까지 닥치고 있을게.”
잠시 열띤 토론을 벌이던 셋은 결국 주연을 풀어주는 걸로 결정을 한 듯 했다. 그니까 말로 하자니까. 몸싸움했더니 어깨가 다 결리네..재현이 우득 제 목을 꺾었다. 죽도에 맞아서 그런건지 주연은 아까부터 맹한 표정으로 재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멍한것도 같고.
연구원 한명이 세게 민 탓에 주연이 재현의 쪽으로 성큼 밀려 왔다. 마치 밀물처럼 내게로. 재현이 가까워진 주연의 손을 붙잡고 제 품 안으로 훅 끌어당겼다. 주연의 따뜻한 냄새가 났다. 유난히 동글한 그애의 뒷통수는 찌그러지지 않았는지 살살 쓸어 확인했다.
“뭐? 이 새끼가 끝까지 시비네.”
“글고 이 친구 이름은 이주연. 고철덩어리 아니고.”
“허.”
“아시겠어요? 씹새끼 원 씹새끼 투 씹새끼 쓰리님덜.”
“야!!!”
재현이 상콤하게 손경례를 해보이곤 주연에게 어깨동무를 한 채 등을 돌렸다. 그 뒤로 빠이빠이 손 흔들어주다 뻐큐 한 번 날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재수없게 누가 누구보고 불량이래. 썩어빠진 것들.
/
“무식하게 왜그랬어요.”
“야아 무식?..섭하다? 다 계획에 있던 거였는데.”
“..그래도.”
조수석에 타자마자 타박하는 투로 주연이 말을 했다. 좀 쫄리긴 했지만 멋있었던 거 아닌가. 재현은 장면을 곱씹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아직도 주인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네.”
“...”
“정공법이 안되면 편법으로, 편법으로도 안되면 기개로 뚫고 간다. 내 삼십년 인생 지론이다. 에피소드는 집에 가서 하나씩 천천히 알려줄게.”
그때 차창 밖으로 얇은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 이런 날에 이주연이 해주는 김치부침개 먹으면 딱인데.
“형.”
“엉.”
“감사한데요, 그래도 제가 불량인 건 변하지 않아요.”
“...”
“센터에 가기 전부터 이상했어요. 자꾸 명치께 전선이 과열되는 것 같고, 복부 쪽은 꼬이는 것 같고, 문득 문득 울컥 뭔가 터져나올 거 같은 느낌이었어요.”
“자꾸 그 옥수수 아이스크림 꺼내먹어서 그래.”
“형 농담이 아니에요.”
단호한 주연의 말투에 재현이 머쓱하게 볼을 긁었다.
“이게 폭주 전 전조증상이라면...”
“...”
“제가 진짜 완전한 불량품이 돼 버린다면요. 어떡하실거에요. 그땐 손을 쓸 수 조차 없을 수 있잖아요.”
덤덤하게 말을 이어가는 주연을 재현이 빤히 쳐다봤다. 까만 속눈썹이 그늘져 드리워 있었고, 중얼중얼 말을 할때마다 뵵 하고 나온 입술이 움직여댔다. 그리고 투명한 눈동자. 그치 넌 거짓말엔 젬병이지.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다 드러나는 애니까. 그리고 나는 눈치가 빠르지. 직감도 좋은 편이야. 그러니까.
“넌 불량이 아냐.”
예상치 못한 말에 이번엔 주연이 재현을 바라봤다. 불량이 아니라니. 나는 불량인데 일평생을...
“그건 날 사랑하는 거야.”
“...”
“네가 날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 주연아.”
아주 분명한 얼굴로 그가 말을 했다. 알려줬다. 사랑. 제게 주어진 기능은 아니었지만 그것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그 언젠간 티비에서도 봤다. 갑자기 또 가슴 부근 어딘가가 당기는 듯 했다. 호흡이 벅찼다. 지척에 있는 재현의 모습이 눈에 걸렸다. 차창 사이로 들어오는 겨울바람에 흩날리는 흑갈색 머리, 유려하게 빠졌지만 단단한 턱, 정직하고 얇상한 입술, 매끈한 콧대, 무엇보다 따뜻한 그의 눈동자. 나를 유일하게 불량이라고 말하지 않는 인간. 주연이라고 불러준 사람. 생일을 주고 세상을 나에게 보여준 이재현. 그게 너무 다 근사해서. 아 이런게 사랑인가보다, 하고. 제 눈앞에 있는 그처럼 사랑이라는 건 말도 못할만큼 아름다운 거구나.
“그러니까 니가 불량이라면 나도 불량일 걸.”
“형도요?”
“응.”
어...사람인데 불량이에요? 야 임마 그게 그런 뜻이. 나름 담백하게 말해 본건데 또 그걸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다. 근데 그래서 좋은 걸지도 모른다. 진실을 지표로 솔직함을 무기로 삼았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국정원에 들어간 뒤 무수한 거짓의 삶을 살고 있던 재현에게 항상 같은 자리에서, 같은 얼굴로 반겨준 이주연. 마치 꼭 어느날부터는 안식처이자 그 순간만이 진짜인것처럼 느껴져서. 그 애 앞에선 진실을 말해도 될 것만 같아서.
“형. 저 사실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알아.”
“정말요?”
“응. 칼 쥐어줬을때 네 눈. 눈에서 읽었어.”
“..와.”
“왜 쫌 놀랐냐?”
“네..그리고요.”
“엉”
“저 듣고보니 진짜 형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여기가 또 막 찌르르대고 울렁거려요.”
“..그건..”
“그것도 알았어요?”
“아니 나도 그렇다고.”
“진짜요?”
“그니까 김치부침개 맛있게 해줘.”
“어..하트 모양으로 해드릴까요.”
“푸학, 뭐?”
“드라마에선 그러던데.”
놀랍도록 직관적인 이 안드로이드의 감정 표현에 재현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설레는 듯 영 평소와는 달리 조잘조잘 떠드는 것까지도. 그리고 그 모든 게 코 꿰인 것처럼 한없이 귀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러니 재현은 한 번 해보기로 한다. 정공법이 아님 편법으로, 또 기개로. 저와는 구성된 원소부터 다른 이 안드로이드와의 사랑을. 어쩌면 저 때문에 사랑이란 기능을 습득해버린 것 같은 이 안드로이드를 책임져보려 한다.
그 사랑은 비록 난해할지라도 조금 더 단단하고, 또 쉽게 변하지 않을 거야. 둘을 태운 회색빛 차 지붕 위로 비가 그친 하늘에 주홍빛 노을이 몽실 일렁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