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너머로 주연이 연신 코를 훌쩍였다. 받자마자 와르르 울음과 함께 진짜 짜증 나, 쏟아내더니 여간 서러운 게 아니었는지 아직도 숨이 가빴다. 얼러가며 들어보니 뭔 세탁기에도 못 넣는 러그를 괜히 사다 줬냐며 애먼 데 성질부리는 게 요지였다. 너가 이거 갖고 싶다고 캡쳐 보냈던 건 기억도 안 나냐. 재현은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꿀꺽 삼키고 필살기 꼬질말투를 장착했다. 형이 주말에 가서 손세탁 해주께에……. 서서히 잦아드는 숨소리가 주연답지 않은데 또 이주연다워서 웃음이 났다. 웃으면 뭐라 할까 봐 잔뜩 숨죽였지만.
“아직도 서러워? 그만 울어봐 쫌. 형 마음 아프다.”
-어떻게 온다는 입에 발린 소리도 안 하냐, 이재현 변했지.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래도. 재현도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이주연 침대에 눕혀다가 설거지 기깔나게 해주고 분리수거 혼자 두 번은 기꺼이 다녀오고 싶었다. 놀리면서 콧물도 닦아주면 아닌 척 사르르 풀린 얼굴이 볼만하겠지. 그런데 인생이 내 마음 같지 않은 게 현실이니까.
“갈까?”
-됐어, 형 아직도 퇴근 못했다며.
그건 그랬다. 모니터만 보고 있었더니 눈이 다 침침했다. 손을 들어 미간을 꾹꾹 눌렀다. 사무실에 혼자여서 어두컴컴한 계단 복도로 나가서 통화하지 않아도 되는 것만 좋았다. 물론 집이라면 더 좋았을 거다.
“그니까 내가 울어야 하는데 너가 먼저 울어서 선수 뺏겼잖아…….”
오랜만에 산뜻하게 일이 하나도 제대로 풀리지 않는 날이었다. 다음 주까지 해오라던 보고를 갑자기 내일까지 부탁한다며 부탁 같지 않은 말을 던진 팀장도 미치겠는데 하루 종일 메신저가 울렸다. 이 회사 알고 보니 일하는 사람은 나 혼자인지 다 나한테 일 맡기고 지랄. 카톡으로 냥냥펀치 날리면서 우는 고양이 이모티콘 날렸는데 이주연 반응이 영 시원찮다 싶더니 얘도 힘든 하루였나 보다. 알았으면 식빵 굽는 놈으로 보내줄걸.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누가 그랬나. 딱 봐도 주연은 여덟 시부터 전화 날리고 싶은 거 제 얘기 듣고 참다가 열 시에 날린 걸 알아서 재현은 내심 미안했다.
“식탁 의자는 왔어?”
어디 가면 어른스럽다고 칭찬 듣는 주연도 첫 독립은 별수 없이 헤맸다. 인테리어 한다고 잔뜩 설레서 오늘의집 깔더니 생각보다 가구 가격이 만만찮다고 우는 소리. 이제 내가 왜 몇 년째 식탁 안 사고 멋없는 컴퓨터 책상에서 밥 먹는지 알겠지. 재현의 말에 그래도 자기는 꾸미고 살 거라더니. 주연은 냅다 벽에 걸 액자며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둘 조명 먼저 결제해 놓고 정작 식탁 의자가 없어서 자꾸 집들이를 미뤘다.
그래봤자 이사 첫날 이주연 붙잡고 바닥에 앉아서 입주민 매뉴얼 읽어가며 가르친 건 재현이다. 쭈연아 일쓰는 1층, 분리수거는 지하 3층이래. 내일 인터넷 신청하고 알았지? 어딘가 주눅 든 얼굴로 알았다고 고개 끄덕이던 주연에게서 어김없이 다음날 전화가 걸려 왔다. 형 나 큰 쓰레기는 어디다 버려? 거기다 대고 자연스럽게 갤러리 열어서 사진 찍어온 입주민 매뉴얼 보는 재현도 재현이었다. 1층에 경비실 가서 말해봐. 전화 끊고 너무 애를 바보로 키우나 싶다가도 그 마른 몸을 휘적이며 큰 쓰레기를 혼자 옮길 주연을 생각하면 재현은 또 카톡 보내게 되는 것이다. 정작 소녀시대 다리라고 재현을 놀리는 걔는 장딴지 하나는 단단한데도.
‘배달시키지 말고 해 먹어라 검사한다ㅎ’
큰 손으로 핸드폰 가득 쥐고 화면을 확인할 주연의 새 부리 같은 입술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주말에 만나자마자 마른 뺨을 부여잡고 찐하게 뽀뽀 해줄 생각이었다.
이주연과의 연애란. 안 봐도 얼굴이 눈앞에 동동 떠다니던 건 처음 몇 달이었는데, 또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 나니 재현은 언제부턴가 주연의 구부정한 등이 조금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게 짠했다. 신기할 정도로 뼈가 불거진 몸을 처음 봤을 때는 동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오목하게 팬 곳은 채우고 튀어나온 부분은 잘 집어넣어 주고 싶었다. 물론 여전히 걔의 모든 부분을 정성껏 데워주고 싶다만 요즘은 등 돌리고 누운 날개뼈에 얼굴을 묻으면 입술보다 코가 먼저 나갔다. 싹싹 발라먹는 것보다 힘껏 들이마실 때 딸려 오는 살냄새가 더 귀해서.
사람 면전에 대고 할 수 있는 말이 있고 없는 말이 있는데 네가 짠하다는 말은 후자에 속해서 참았다. 그런데 한 번 뇌리에 박히니까 자꾸만 생각나더라. 주연은 애인치고 벽보고 자는 고약한 버릇이 있었다. 추위도 많이 타는 애가 한기 드는 벽에는 왜 그렇게 붙어서 자는지. 니 내 꿈 꾸기 싫냐? 재현이 부러 유치한 말로 몇 번을 다그쳤더니 주연은 겨우 벽을 등지고 웅크려 누웠다. 형 떨어질까 봐 무섭다. 더 어린애 같은 말투로 칭얼댄 후에야 가까운 곁을 내줬다. 이러니까 좋지. 얼굴 마주 보고 누운 첫 밤에 그랬더니 주연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형은 큰 애기야. 사람 대놓고 바보 취급하는 그 말이 뜨끈해서 진짜 바보처럼 웃어버렸던 것도.
조용해야 잠이 잘 온다는 누구 탓에 둘은 밤이면 건조한 연인이 됐다. 대개 먼저 잠드는 주연이 고른 숨소리를 내면 재현은 그 얼굴을 오래도록 들여다봤다. 신을 믿지 않는데도 이주연 얼굴을 볼 때면 신이 어떤 마음으로 얘를 빚었을까 종종 상상하게 됐다. 왜 차분한 눈매와 장난처럼 걷혀 올라간 입꼬리를 줬는지. 왜 사람들이 기대고 싶게 하는 넓은 어깨를 줘놓고는 정작 스스로는 잘 지탱하는 걸까 걱정될 만큼 허리는 가파른 선으로 뺐는지. 가끔은 이러다 주연이 번쩍 눈을 뜨면 어떡하나 싶기도 했다. 평소엔 별생각 없이 사는 재현이어도 잠든 주연의 얼굴만 보면 생각이 많아졌다. 어느 날 아침에 슬쩍 주연이 물었다. 형 간밤에 나 쳐다봤지? 꿈인 줄 알았는데……. 완전 뚫어지게 쳐다봤잖아. 너털웃음 흘리고 넘어간 재현이었는데 그날 종일 괜히 서운한 거다. 꿈인 줄 알았어도 그렇게 쳐다보는데 어떻게 눈을 한 번 안 떠주냐. 아, 진짜 별생각 없이 잘 살았는데 이주연만 보면.
내가 이렇게 너를 사랑하는데 네가 나를 상처 주는 날이 올까? 고요한 얼굴에 대고 속으로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이재현 인생, 연애가 처음도 아니고 많이 지지고 볶아봤는데도 정말 안 믿겼다. 그냥 믿기지 않았다. 지금 마음이 너무 커서 주연조차 이 마음에 상처 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차가운 인상에 말수가 적어봤자 잘 모르는 남들이야 겁먹겠지. 한때 재현은 자신이 있었다. 사르르 휘어지는 눈꼬리와 할 말을 신중하게 고르느라 달싹이는 입술을 보자면.
그랬는데.
“형은 가끔 나 기만하는 것 같아.”
이런 말에는 이주연을 꽤 안다고 자신했던 재현도 면역이 없다. 재현은 발끈하려던 것을 몇 년의 내공으로 간신히 참는다. 눈앞의 주연은 여전히 뚱한 얼굴이다.
그 며칠 전의 전화가 두고두고 수상쩍긴 했다. 아니 거슬러 올라가면 이사 전부터 그랬다. 말하려다 참는 듯한 기색과 가끔 혼자 긴 생각에 잠긴 모습이. 재현은 그게 거슬렸다가도 애써 참고, 금세 까먹기나 한 것이다. 바빠서 얼굴을 오래 못 본 것도 한몫했다. 페이스타임 화면 너머의 묘하게 온도 낮은 얼굴과 말투는 빨간색 종료 버튼 누르면 또 금세 눈앞의 현실이 아닌 게 됐으니까. 솔직히 언젠가는 말하겠지 싶었지만 그게 이런 말일 줄은…….
기만? 기만이라는 단어만큼 이재현에게 멀게 느껴진 것이 있었나. 가끔 배민 시켜서 사장님이 음식 봉다리에 붙여 보낸 쪽지 읽다 감동했다가도, 그게 다 자영업자의 루트로 구매가 가능한 인쇄된 스티커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정도? 기만당했다고 느꼈지만 누구를 기만한 적은, 게다가 이주연을 그렇게 기만한 적은 기필코 없다.
“야.”
내뱉고 바로 후회했지만 내색할 수가 없었다. 주연의 표정이 한층 더 싸늘해졌다.
“화난다고 마음대로 부르네 형은.”
“지금 네 말 듣고 화 안 나게 생겼어?”
“형은 내가 왜 이런 말 하는지 먼저 생각은 안 해?”
재현은 다시금 욱하는 걸 참을 수 없다.
“삼 주 만에 얼굴 본 사람한테 밥 잘 먹고 하는 소리가 이런 거면서 내 기분 생각은 안 하고?”
주연이 입술을 감쳐문다. 선이 긴 입매가 일자로 말려들었다. 오랜만에 얼굴 본 건데 다짐했던 뽀뽀 대신 잔소리부터 내뱉지 말았어야 했나. 재현은 뒤늦게 생각했다. 그런데 스킨십으로 무마하기엔 주연의 얼굴이 너무 말라 있었다. 지금도 봐. 화내는 것도 매가리 없긴……. 순간 습관처럼 재현은 또 주연이 짠해 보인다.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말하다 말고 갑자기 일어나는 건 뭐야? 투지가 가득해 보이는 주연과 다르게 너그러워진 재현이 빈 커피잔을 치웠다.
“......피곤하면 자. 러그만 빨아주고 갈게.”
주연의 얼굴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주연이 연신 물었다. 그러고 간다고? 재현은 여전히 오답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왜 그러냐, 진짜. 주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지만 주연이 멀찍이 물러나 앉았다.
몹시 슬픈 말투로, 주연은 힘없이 말했다.
“그럴 때…… 형이 너무 미운 거야.”
사람이 정말 상심하면 저렇게 쪼그라들 수도 있는 건가. 주연이 무언가를 단숨에 잃어버린 공기인형처럼 보이는 탓에 재현은 건넬 말을 잃었다. 아, 몇 년을 알아도 이주연은 너무 어려웠다.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은 아니었다. 재현의 세상 속 간격이 2.0 정도라면 주연의 것은 한 0.98쯤 되는 것 같았다. 그것도 뒷자리 겨우 절삭해서. 너무 촘촘해서 재현은 그 틈에 자주 걸렸다. 실제로 연애 초기에 재현은 미안하단 말을 달고 살았다. 친구일 때는 형 쿨해서 좋다더니 관계가 바뀌고 나서 주연은 재현의 그 쿨함을 못 견뎌 했다. 하다못해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 깻잎 논쟁으로 몇 시간 입씨름한 적도 있다. 그냥 깻잎 두 장 먹으면 안 되냐고! 주연에게 멱살 잡히고 나서야 답을 알게 된 재현은 얌전히 대답했더랬다. 알았어 까짓것 깻잎 먹지 말자;
그것도 연애 초에야 그랬지. 같이 보내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건 그 사람의 실마리를 여러 개 줍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힌트를 꽤 얻었기에, 혹은 주연 역시 재현을 이해하게 되면서 뒤는 나름 수월했다. 재현으로서는 이렇게 까다로운 주연의 모습이 오랜만이다. 답안지 찬스 없냐……? 주연이 더 화를 낼 걸 알면서도 재현은 물어보고 싶을 만큼 당혹스럽다.
그러나 당장 축객령을 내릴 줄 알았던 주연은 또 의외로 얌전히 일어서서 재현의 손에 들린 컵을 뺏어 들 뿐이다.
“형이나 들어가서 자. 감기 기운 있잖아.”
주연의 말을 듣고 나니 문득 감기 기운이 도는 것도 같다. 재현은 아침부터 목줄기가 뻐근하고 눈이 뻑뻑하던 게 몸살의 징조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이번에 너무 야근해서 목 디스크 온 줄 알았어. 재현의 말에 주연은 아까 전 “형은 가끔 날 기만하는 것 같”다던 얼굴이 되었다. 그냥 빨리 침대 가서 눕기나 해. 지친 주연의 목소리마저 나른하게 들려서 재현 역시 더 따져 물을 힘을 잃고 주연의 침대에 누웠다. 저와 편하게 눕겠다고 킹사이즈 샀다더니 1.5룸에 두기엔 우스꽝스럽게 큰 침대였다. 침구에서 주연이 자주 쓰는 우디향 향수를 맡은 재현은 조금 전까지 싸우던 것도 잊는다.
“주연아 너도 와서 누워.”
재현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주연은 여전히 고집스레 싱크대 앞에 서 있다. 자기는 아직 삐졌다 이거지. 재현은 그게 얄밉다가도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재현은 제 이마에 늘어진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올리는 손길을 느끼면서 천천히 잠에서 깬다. 온몸이 매트리스 위에 녹아서 그만 퍼져버린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노곤했다.
눈을 떴을 때 주연은 곁에 모로 누운 채였다. 주연의 뒤로 창밖이 어둑하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두어 시간은 훌쩍 지난 것 같았다. 재현이 깬 걸 알고도 주연은 여전히 재현의 이마를 살살 매만졌다. 빛이 조금 남은 방 안에서 주연의 눈이 유리알처럼 반들거렸다. 일렁이는 윤슬 같기도 했다.
“어떻게 자기가 아픈 것도 몰라?”
바보야……. 근래 재현이 들은 주연의 목소리 중 가장 사랑에 잠겨 있어 재현은 우습게도 그 말에 안심이 된다. 재현은 응석 부리듯 주연에게 안겨들었다. 자애롭게 품을 내준 주연의 쇄골께에 코를 묻고 살냄새를 맡았다. 그러면서 왜 아까 미운 말했어. 주연이 고요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직 안 풀렸는데. 주연의 말에 재현은 여전히 제가 헤쳐 나가야 할 수수께끼가 남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넌 왜 맨날 나한테 숙제 내줘? 정말 감기 기운이 있는지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나왔는데 주연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재현의 목덜미를 감싸안고 몇 번이나 짧게 입 맞췄다. 이재현 진짜 언제 클래. 그렇게 말하는 주연이 이상하게 어른 같이 느껴져, 재현은 그 다정한 타박에 굳이 반박하지 않고 주연의 티셔츠 속으로 손을 넣었다. 만져지는 늑골이 확실히 더 말라 있었다. 이런 게 짠하다는 말 대신 키스했다.
*
오답 노트를 적기 위해선 질문을 복기해야 한다. 재현은 그날 주연의 말을 곱씹었다. 기만. 가끔 문어체로 말하는 애인을 이해하기 위해 네이버 국어사전에 검색했다. 기만하다. 남을 속여 넘기다. 역시 서운한 말이었잖아. 사무실 파티션 안에서 마음껏 머리를 쥐어뜯었다.
재현의 틈을 반으로 쪼개도 주연의 간격이 될 수조차 없다. 그럼에도 기민하게 감각을 곤두세우자면 재현 역시 미묘하게 느껴진 순간이 있긴 했다.
‘형은 어떻게 다 했어?’
자취방으로 이사 준비를 하던 어느 날 주연은 뜬금없이 물었다. 그때 재현은 조금 전 주연이 사고 싶다던 책상 치수를 계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 그냥 했지 뭐. 재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그걸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주연의 태도를 알았다. 역시나 재현의 팔을 잡아챈 주연의 얼굴이 진지했다. 아니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말고. 형, 혼자였을 거 아냐.
주연에게 재현은 첫 남자 친구지만 둘은 애초에 친구였던 시절도 꽤 길었다. 주연은 친구로 시작했을 때부터 재현이 게이라는 걸 알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걸 비롯한 복잡한 사정으로 재현이 집 밖으로 나돈다는 것을 재현을 아는 웬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재현 역시 딱히 숨기지 않았으니까.
가족이 멀었다. 단순히 물리적 거리를 말하는 건 아니고 심리적 거리도 그랬다. 어차피 재현은 고등학생 때부터 나와 살았다. 나 외로워서 술자리 안 빼잖아, 거침없이 말하며 콘치즈를 푸던 재현은 어딘가 아이코닉한 것이 마치 반항아 제임스 딘 같아서 쉽게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게이는 관념적으로 친해지고 싶은 상징처럼 받아들여졌다. 미드 속 여주의 베스트 프렌드가 한 명쯤은 게이이듯이. 수없이 불려 나간 술자리에서 주연은 재현의 대각선 맞은편에 앉아있던 수많은 사람 중 하나였다.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표정이라 시큰둥할 줄 알았던 첫인상과 달리 주연은 싹싹하고 잘 웃었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쉽사리 친해지기 힘든 축구파와 농구파로 갈린다는 사실을 안 뒤에도 선뜻 재현의 풋살 모임에 불러달라고까지 했다.
친구로서의 주연은 다소 생소한 타입의 사람이었다. 날카로워 보이는 표정을 사르르 풀며 웃어 보이긴 해도 다른 사람이 재현에게 그러듯 친해지고 싶어 안달 내지도 않았고, 친분을 가장하며 호기심이라는 이름 아래 무례한 질문을 던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형은 제임스 딘보다 다른 배우 같다고 처음 듣는 외국 배우 이름을 알려주기나 했지. 집에 가서 찾아보니 어딘가 청순한 이미지의 배우였다. 이 새끼 나 좋아하나? 어린 날의 재현은 한 번쯤 의심했지만 사심 있다기엔 주연은 풋살 경기 후 서슴없이 등목하고 국밥 먹더니 여자 친구 알바 끝나서 데리러 간다며 손을 흔들었다.
너가 걔랑 친해? 라는 반응이 어느 정도 납득될 만큼, 키 크고 잘생겼다는 공통점 외에 겹치는 구석 하나 없는 둘. 그래도 재현은 주연이 괜찮은 동생이라고 늘 생각했다. 진지한 이야기 싫어할 것 같다는 세간의 평가와 달리 재현은 의외로 주연과 단둘이 있으면 평소와 다른 결의 대화를 나눌 때도 있었다. 예컨대 자주 보지 못해 마음이 쓰이는 본가의 강아지 같은 것들. 아마 주연은 그 시기 재현의 측근 중 다롱이 사진을 가장 먼저 본 사람이었을 것이다. 재현은 웬만하면 가정의 흔적이 묻어나는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러나 주연이 동생의 영역에서 벗어난 건 다소 이변적인 일이었다. 뭐 잘생기긴 했지만 재현은 주연보다 좀 더 살갑고 어른스러운 연상이 좋았기에.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 관계에서 크게 불만이랄게 없었는데.
주연이 크리스마스에 본가로 초대한 게 계기였다. 재현은 물론 미국에 가족이 있다는 친구가 명절마다 주연의 집으로 간다는 것도 알았기에 그 초대가 그렇게 당혹스럽진 않았지만. 재현이 초대받은 시기가 크리스마스, 그것도 주연이 가장 좋아하는 ‘명절’이라는 사실은 묘하게 사람을 몽글거리게 만든 것이다.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주연의 본가에서 재현은 사진 속에서만 보던 주연을 닮은 강아지에게 간식을 줄 수 있었고, 또 주연의 가족들과 함께 커다란 원목 식탁에 둘러앉아 갈비찜에 이어 코스트코에서 사 온 치즈케이크를 나눠먹었다. 제게는 다소 멀었던 가족의 느낌을 선뜻 공유한 주연의 잠든 옆모습을 보며 싱숭생숭했던 밤.
언제부터 내가 좋았어? 시간이 한참 지난 후, 하루는 재현이 물었을 때 주연은 그 크리스마스의 기억을 꺼냈다. 형에게 이런 따뜻한 가족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 안에 내가 포함되는 것도……. 신중하게 말을 고르던 주연을 꼭 껴안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 주연에게 독립이 갖는 의미가 상당하다는 걸 재현 역시 어렴풋이 알았다. 그 먼 거리도 꾸준히 통학하고 직장도 셔틀버스 다니는 곳에 들어간 주연에게는 이 애매한 시기의 갑작스러운 독립이 어떤 결심을 뜻한다는 것도.
실제로 주연은 독립을 결정한 뒤, 아무 명절도 아니고 특별하지도 않은 날 재현을 데리고 다시 본가에 간 적 있다. 말없이 찾아간 터라 급하게 차려진 소박한 가정식을 먹고 돌아오던 날 재현은 한참 조용하다 겨우 말했다. 있잖아 주연아. 난 우리 가족은 못 보여줘. 주연은 예상했던 것처럼 흔쾌히 괜찮다고 했다. 형이 불편한 건 싫어. 근데 그럼 다른 건 없어? 그래서 재현은 주연을 데리고 모교에 갔다. 제가 삼 년 동안 지낸 기숙사 건물과 점심시간마다 내달렸던 잔디 운동장의 풍경. 교정을 돌며 자기가 입었던 교복의 차이나카라 디테일과 급식 콩고기가 얼마나 맛없었는지 다섯 번은 말하면서 차에 돌아올 때까지도 재현의 손에 낀 깍지를 풀지 않던 이주연.
주연은 그런 지난한 앎을 모두 거쳐야 비로소 어떠한 속임이나 가림막이 없다고 믿는 것일지…….
솔직히 재현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혼자 방을 보러 다니며 대충 싸구려 가구 사서 채우던 순간이 뭐 서러울 때도 있었겠지. 그러나 십 년도 넘은 일을 이제 와서 말하며 울먹일 감정도 남지 않았다. 애인으로 위로를 건네고 싶었을 주연의 마음도 이해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몫이 있지 않나. 적어도 재현이 생각하기에 지금 그런 일들은 재현에게 너무 대수롭지 않았다.
재현은 대신 다른 대화를 주연과 나누고 싶었다. 이제는 그럴 때가 된 것 같았다. 부모 없이 홀로 삶을 지탱하는 어른의 무게가 어떤 건지. 다소 현실적인 나이 듦에 대해. 이제 우리는 보험 약관을 조금 더 꼼꼼히 살펴야 하고 청약도 들어야 한다고. 주연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발렌시아가 데님도 한 벌쯤은 저축을 위해 내려놓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조금 가슴 아프지만 잔소리할 용의도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주연의 12평 원룸에는 과분한 5벌 용량 짜리 스타일러를 미리 놔주고 싶기도 했다. 일 년 뒤 재현의 집 전세가 끝나면, 영끌해서 대출받아 경기도 어딘가에 작은 아파트 하나는 구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명의는 이주연 이름으로 하고, 근속 기념 휴가 모아둔 거 탈탈 써서 하와이 가면 딱 맞았다. 솔직히 여기까지 계획하고 나니 재현은 마음이 급했다. 야근에 임하는 마음가짐부터가 달라졌다.
그런데 내가 널 기만하는 것 같다고? 재현은 다시금 곱씹는다. MBTI 운운하는 건 싫지만 엔팁이라던 이주연은 제 앞에서는 종종 대문자 F 같은 구석이 있다. 주연의 말을 재현의 방식대로 거칠게 해석하면 결국 “더 잘해줘" 같은 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재현은 직구한 레이커스 져지 배송현황을 조회한다. 이러려고 산 건 아닌데 주연의 마음을 푸는데 꽤 도움이 될 것이다.
잔기침을 했다. 감기 기운이 꽤 오래갔다. 생각해 보니 주연에게 독감 백신 맞으라고 잔소리만 했지, 재현은 정작 자기가 맞는 것을 깜빡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머쓱해졌다. 사랑이란 이런 건가……. 재현은 순간 상념에 잠긴다. 이런 게 사랑이라면 재현 역시 딱히 받아본 역사가 없는데 괜찮게 주고 있는 게 맞는지.
*
사정 모르는 남들은 쉽게 말하기 마련이었다. 재현이 마침표를 찍었을지는 몰라도, 흔히들 아는 것처럼 자신의 커밍아웃 하나로 집안 분위기가 박살 난 건 아니었다. 글쎄 그렇다면 뭐 누군가의 잘못으로 뾰족하게 화살을 돌릴 수가 있는 건가. 어릴 때의 재현은 책임소재를 따지려 애썼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이런 일은 누구도 함부로 나쁘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진리를 깨달은 어른 이재현에겐 다소 모호하다.
사업이 기울면서 부부 다툼이 잦아지고, 빚이다 뭐다 하며 결국은 가족이 와해하는 과정에서 재현은 일찍이 겉돌았다. 애초에 더 어린 시절은 바쁜 부모님 탓에 학원 뺑뺑이 돌던 기억뿐이다. 집에 오면 항상 싸늘하게 식은 식탁 위에 볶음밥이 덩그러니 있었다. 랩을 벗기면 재현의 손을 축축하게 적시던, 한때 따뜻한 음식의 온기였을 물기. 재현은 지금도 모든 재료가 한데 뭉치고 조각나서 재 합체된 요리가 싫었다. 제 생일이라고 겨우 모여 억지로 화목한 척 하하 호호 웃으며 건조하기 짝이 없는 대화를 나누던 가족 같아서.
정말 기름을 둘러서 팬에 볶으면 언제라도 한 그릇에 눌러 담길 수 있는 걸까…… 재현이 맥없이 생각했다.
며칠 전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첫 줄부터 아버지 운운하길래 더 읽을 것도 없었다. 빼곡한 글자에 보이스피싱치곤 성의 있다 싶었는데. 문자를 일주일째 무시했더니 전화가 왔다. 재현은 전화를 받고 조선족이 아닌 진짜 부친의 연락이었음을 알았다. 돈 필요하세요? 하도 어이없어서 저도 모르게 싹수없는 안부를 건넨 재현은 자초지종을 듣고 더 싸가지 없게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 그건 새 가족을 이룬 부친의 초대였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말년에 찾아온 사랑에 회개라도 한 것인지 늦게나마 부모 노릇 하고 살고 싶다는.
재현은 회사 건물 옥상에서 아주 오랜만에 담배를 문다. 들키면 이주연이 혼낼 텐데. 어쨌든 방금의 통화나 지금의 흡연까지 깔끔하게 주연에게 들키지 않고 묻을 작정이었으니. 그럼에도 문득 주연이 보고 싶어져 전화를 건다.
“뭐해?”
-일하다가 잠깐 커피 사러 나왔어.
“보고 싶다.”
-나도. 회사 바빠?
주연은 아직 풀리지 않은 게 있다던 사람치고는 그 이후에도 썩 달라진 건 없었다. 퇴적된 것이 많은 사이란 이렇다. 앙금이 있더라도 침전물을 하루아침에 다 떠낼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상대를 어제처럼 대할 수 있는 인내심이 돋보이는 관계.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안 좋은 것 같은데.
재현은 괜히 되묻고 싶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겨?
가족은 내가 선택하는 거란 말을 믿으며 살아온 날이 한순간에 부서지는 듯했다. 자유로운 줄 알았는데 여전히 발목에 족쇄가 남아 있다. 심지어 원치 않은 부친의 새 가족 구성원까지 알게 됐다. 부친은 제가 낳지도 않은 자식을 품고 살고 있었다. 정작 자기가 낳은 자식은 이렇게 방치해뒀는데. 너는 어떻게 혼자서 다 감당했냐는 애인의 말이 떠오르며 그제야 재현은 가슴이 따끔거렸다. 부친 역시 가족을 선택한 거라면, 선택받지 못한 쪽이 되는 일은 서른을 넘겨도 여전히 아팠다.
그러나 동시에 재현은 주연에게 이 슬픈 속내를 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의연하게 넘기고 싶었다. 왜냐하면 재현이 선택한 가족에게 과거의 무게를 지우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그건 재현이 다짐한 어른의 모습이기도 했다. 방 밖으로 가족이 무너지는 소리를 숨길 생각도 하지 않던 부모를 견디며 어릴 적부터 되뇌었던.
그러니까 재현은, 주연에게 최악의 모습만큼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슬픔은 나누면 두 배가 된다는 걸 어릴 때부터 깨우쳤으므로.
“......모르겠어. 턱이 아파.”
실은 아까 통화하며 하도 이를 악물어서 그런 것 같았지만 주연이 알 리 없으니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주연은 다소 놀란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게 이런 일로 재현이 전화를 걸어 징징댄 건 처음이었다.
-많이 아파?
“그 정도는 아니야. 그냥 전화해 봤어.”
-밥도 잘 못 먹었을 텐데 속상해서 어떡해.
주연의 말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형 병원 꼭 가봐야겠다. 재현은 그게 조금 머쓱하기도, 미안하기도 했으나 주연은 놀랍게도 개의치 않아 보였다. 오늘 퇴근하고 내가 형 집 갈까? 말을 꺼낸 주연은 심지어 당장이라도 올 기세였다. 서로의 직장이 제법 멀어 주중엔 잘 만나지 않는데도. 재현이 말리자 통화는 페이스타임으로 바뀌었다. 꼭 연애 초처럼. 주연은 딱 그만큼 고양된 것 같기도 했다. 형 아프지 마. 우리 같이 오래 살아야지. 주연의 다정한 말을 들으며, 재현은 화면 너머 고요하게 들썩이는 이 납작한 가슴이 비애에 가득 차 부푼 모습을 그려보다 마음이 아파 그만뒀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렇게 착한 애에게 정말로 슬픔을 나눠주고 싶지 않아…….
*
일방적인 연락은 띄엄띄엄 지속되었다. 변명 속 부친은 긴 부재 동안 외롭고 가난했으나 처자식에게 생활비 보내주기 위해 발버둥 친 가장이었다. 이제 그는 새로운 둥지를 틀었지만, 병식을 앓게 되면서 지난 인연을 되돌아볼 줄 알게 되었다. 이 대목까지 나왔을 때 재현은 마침내 공들인 연락의 진짜 목적을 알게 되면서 그러면 그렇지, 싶었다. 연 끊은 제 새끼한테 제 발로 찾아오게도 만들고 돈이 참 무섭지. 당신이 그렇지 않고서야. 마음껏 비웃고 났더니 맥이 탁 풀렸다. 이상하게 턱이 뻐근했다.
하나가 좋으면 하나가 나쁘다고. 주연과는 사이가 좋았다. 풀렸냐고 물었더니 주연은 이제 알지 않냐고 또 모를 얘기를 했다. 솔직히 재현은 지금 상황에서 그 말에 더욱 기민하게 반응할 기운이 없었다. 어쨌든 모로 가도 서울이니 좋은 일이다. 주말엔 주연을 만나 손을 잡으며 반지 사이즈를 재야 했다. 재현은 그래도 프러포즈에는 고리타분하지만 반지가 빠져선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정상성의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그 집합에서 한참은 떨어진 것 같은 재현조차 애인의 감격에 젖은 얼굴이 궁금했다. 재현은 주연에게 꼭 미래를 약속해 주고 싶었다. 생각해 보니 한 번도 걔한테 이 다짐을 말로 꺼낸 적이 없었기에. 오목하게 팬 곳은 채우고 튀어나온 부분은 잘 집어넣어 주면 굴곡진 곳 없이 곧게 펴질 것이다. 재현이 원하는 주연과의 삶은 그런 거였다. 걔를 반듯한 곳에 눕혀 잘 재우고 싶었다.
반차를 내고 회사 건물 치과에 간 재현은 사랑니가 곳곳에 숨어있는 엑스레이를 마주한다. 심지어 한 쪽에는 두 개가 나서 총 다섯 개였다. 잇몸 밖을 절대 나오지 않고 요령껏 누워있는 이들을 본 의사가 심드렁하게 얘기했다. 이거 다 매복인데 세 번에 걸쳐서 발치하셔야 할 것 같아요. 재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핸드폰으로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다. 주연에게 보여줄 요량이었다. 그런데 자꾸 보니 하필 사랑니가 몇 개나 가득 찬 모습이 왠지 심상치 않고 징그러워 재현은 생각을 바꿨다.
치과 베드 위에 누워 발치하는 동안 조명을 계속 응시했다. 초록 천에 덮여 눈앞이 온통 밝은 녹색이었다. 눈이 부셔도 부릅뜨고 있었다. 언젠가 <위대한 개츠비>를 보고 난 후 주연이 그린라이트의 상징에 관해 설명해준 적이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 광경이 재현에겐 다소 미래지향적으로 다가왔다. 미래로 가는 길이 참 요원해 보였다.
대체로 무감했지만 잇몸을 째는 건 느껴졌다. 찢고 들어오는 칼날처럼 어쩐지 주연을 데리고 부친을 만나는 생각이 한 번 불쑥 들더니 자꾸만 구체화됐다. 인정받고 싶은 걸까. 인정받으면 무슨 소용이 있기라도 한가? 재현은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언젠가의 주연이 떠올랐다. 내가 왜 좋았어? 재현은 주연의 마음을 자꾸자꾸 캐물었다. 이왕이면 확인받고 싶었다. 주연은 아는지 모르는지 늘 순순히 대답해 줬다. 형 되게 청순하게 생겨서. 그럼 나보다 청순한 사람 나타나면 헤어질 거야? 재현은 유치한 질문이라는 걸 알았지만 이렇게 보챘을 때 주연이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예상대로 주연은 입술을 말아 웃으며 수줍은 얼굴을 했다. 형 애기도 아니고 무슨 그런 말을 하냐. 큰 주먹에 힘은 하나도 싣지 않고 재현의 가슴팍을 툭 치더니 소곤댔다. 청순한데 씩씩한 사람 형밖에 없어. 다 아는데 그 짓을 몇 번은 반복했다. 이주연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연애의 영역에서는 언제나 재현이 한 수 위였다. 주연은 눈에 띄는 하드웨어를 가졌대도 소프트웨어는 여느 이십 대 초 남자애들과 다르지 않았으므로. 적당히 무심한 데다 아직 센스도 부족해서 여자 친구들에게 차이거나 혼나기 일쑤였다. 재현은 달랐다. 연애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현은 잠들려던 순간 주연에게 등짝을 얻어맞은 적이 있었다. 주연이 씩씩댔다. 형 너 연애 진짜 많이 해봤지? 재현은 엉겁결에 빌었다. 쭈연아 형이 뭐 잘못했니? 지금 그런 게 짜증 난다는 거야, 라고 말하던 주연을 재현이 한껏 귀여워했던 건 둘 사이의 귀여운 추억으로 남았지만 재현은 사실 안다. 재현에게는 연애의 영역이 전부였으니까. 명절마다 갈 곳 없는 친구를 데려갈 따뜻한 가정이 있는 사람은 누빌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구간이 제게는 간절했기 때문에.
가족의 영역엔 영 자신이 없었다. 이미 저편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주연을 따라 넘어가려는데 잊고 있던 무게추가 재현의 다리를 있는 힘껏 붙잡고 있는 기분이다. 독립에 서툰 주연을 과보호한 건, 어떤 것으로라도 대신하려던 못난 마음일지도 몰랐다.
초록빛이 치워졌다. 재현은 연신 입을 헹궜다. 다 되셨어요. 두 시간 동안 빼시면 안 돼요. 물린 거즈 사이로 피 맛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두 시간을 버티다, 집에 와선 쓰러져 긴 잠에 들었다.
누군가 어깨를 흔들어 재현은 흠칫 잠에서 깬다. 하얗게 질린 주연이다.
“형 일어나 봐. 이게 다 뭐야?”
주연의 손에 재현이 처방받아온 약봉투가 한가득 들려 있었다.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지 못한 재현의 얼굴을 답지 않게 재빠른 손길로 감싸 쥔 주연이 이리저리 살폈다. 형 얼굴은 왜 이렇게 부었어?
“아 주연아…… 나 사랑니 뺐다.”
“병원 갔었어? 휴가 낸 거야? 턱 아픈 거, 사랑니 때문이래?”
나한테 말 없었잖아……. 주연의 얼굴이 차게 식어있다. 재현은 실수했음을 직감한다. 진짜 미안. 말할 정신이 없었어. 정신을 차린 재현이 주위를 둘러본다. 주연은 아무래도 며칠 전 재현을 보러 오지 못한 게 마음 쓰인 것 같았다. 현관 근처에 무언가 가득 든 장바구니가 놓여있었다. 어차피 내일 주말이니까 그냥 바로 퇴근하고 왔다고, 주연이 말했다. 죽이라도 끓여줄게. 재현이 한 번 더 사과하려고 했지만 주연은 몸을 일으켜 지나쳐 버렸다.
주연이 차린 저녁을 고요하게 나눠 먹었다. 재현은 주연의 마음을 풀어줄 타이밍이 언제일지 눈치 본다. 그런데 주연은 의외로 괜찮아 보였다. 결국 재현이 내준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작게 웃기도 했다. 귀엽다. 형 같아. 아까의 싸늘한 얼굴이 거짓말처럼 흔적도 없어 재현은 안심했다.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누워 내일 뭘 할지 얘기했다. 이케아에 가서 주연의 집을 채울 가구 쇼핑을 하고, 근처에서 닭칼국수를 먹자는 계획. 시간이 남으면 천만 관객을 넘었다는 영화를 보자고 했다. 재현은 어두운 영화관 속 두 시간 동안 주연의 손가락을 만지작대며 반지 사이즈를 잴 생각이었다. 지난번 영화를 보다 코까지 골며 잠들었던 재현을 놀리며 주연이 킬킬댔다. 이번에는 졸지 마. 닿은 몸을 타고 흐르는 진동에 재현의 마음이 따뜻해진다. 주연을 껴안고 말했다. 주연아 진짜 미안해. 형이 아까 말 못 한 거. 주연은 의연하게 말했다. 괜찮아 형.
주연이 괜찮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건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였다. 씻고 온다던 말 뒤로 한참을 물소리가 들리더니 눈이 빨개진 주연이 재현의 앞에 섰다. 눈이 왜 그래 너? 재현은 주연을 따라 일어나 주연의 어깨를 잡았다. 주연이 고개를 숙이며 재현의 시선을 피했다.
“형 나 그냥 오늘 갈까 봐. 오늘 괜히 와서.”
“이 새벽에 갑자기 돌아간다고?”
재현은 되묻는다. 왜 갑자기? 그리고 별안간 주연이 폭발했다.
“갑자기, 갑자기라고 했어 지금?”
주연은 재현의 팔을 뿌리친다. 재현을 외면한 채 이를 악문 주연이 재현 앞에 갖다 댄 건 재현의 핸드폰이었다. 그걸 보자마자 재현은 주연이 모든 걸 알게 됐다는 것을 눈치챘다.
“어디가 아픈지 누가 괴롭히는지 말 한마디 없이 혼자 전부…….”
이래도 형이 날 속이는 게 아니야?
주연은 지난한 앎을 모두 거쳐야 비로소 어떠한 속임이나 가림막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니까. 주연의 울먹이는 얼굴을 본다. 네가 짠하다는 말로 이제껏 정말 그를 기만해 온 것일지도 몰랐다. 재현은 가늠한다. 제가 들이지 않은 세계를 주연이 얼마나 궁금해했을지. 그러면서도 이제까지 어떤 결심으로 저를 사랑해 줬는지. 어떻게 자기가 아픈 것도 모르냐던 다정한 질책. 주연은 늘 두드려왔던 것이다. 이렇게 사랑하는데 상처 주는 일도 생기는구나. 사랑이란 게 징그러웠다. 그렇지만 너무 많이 박혀있다고 주연이 뿌리째 뽑아 버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도 나 진짜……. 너한테 이것만큼은 말하고 싶지 않았어. 재현은 허탈한 기분으로 중얼거린다. 주연의 상처 받은 눈이 재현을 괴롭게 했다. 하고 싶은 말을 참는 얼굴, 불행을 견디는 얼굴을 잘 알기에. 그건 함부로 망가진 영역에 편입된 사람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이자 재현의 과거였다.
“형 왜 사랑을 자꾸 이딴 식으로 해…….”
솔직히 재현은 그때까지도 어떤 말이든 반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제아무리 연인이라 한들 숨기고 싶은 치부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니까. 재현은 구질구질하게 지난 것은 모두 버리고 깨끗한 미래를 맞이하고 싶었으니까. 그런 곳에 주연이 있었으니까. 너의 세계에 편입되고 싶었다고, 짐짓 불쌍한 체하면 주연은 이해해 줄 것도 같았다. 차라리 뻔뻔하게 화내서 착한 주연이 모른척 넘어가 준다면 기꺼이 그럴 의향도 있었다.
“형이랑 나 이제 가족 아니야?”
그러나 주연의 말에 재현은 제가 현재 딛고 서 있는 곳이 이미 그토록 바라던 지점이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는다.
재현은 소리 없이 젖은 주연의 뺨을 닦은 후 그를 꽉 감쌌다. 주연이 애처로이 울음을 삼킬 때마다 요동치는 가슴이 잔뜩 부풀어있었다. 발버둥 치는 주연을 빈틈없이 껴안았다. 조금씩, 조금씩 바람이 빠져 마침내 원래대로 납작해질 때까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던 것이 바로 가까워질 때까지. 아직 오지 않았던 것, 영영 도착할 수 없는 것이 지금 여기에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