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마을이 온통 흰 눈으로 뒤덮였다. 성탄절 전부터 이어진 눈보라는 잠시 그쳤다가 다시 내리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마을 남자들이 전부 마을 어귀로 나와 큰길에 이어진 작은길들을 쓸었다. 날이 밝자마자 이어진 노동은 한낮이 되어도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꽈리고추 하우스를 운영하는 김씨가 삽으로 푹푹 눈을 푸다가 에라이, 하고 풀썩 주저앉았다. 언제 이걸 다 쓸고 자빠지냐 이 말이야. 벌컥 화를 내는 김씨의 주위로 50대 남자 셋이 몰려들었다.
“그니까, 이장 개새끼가 지는 따순 목에서 등이나 지지면서.”
“이게 말이나 됩니까? 어차피 또 눈이 내릴 텐데 치워봤자 뭐 한단 말입니까?”
서울에서 홀로 귀농한 지 2년이 된 박씨도 오랜만에 언성을 높였다. 박씨의 안경에는 김이 어려 하얀 살얼음 막이 낀 채였다. 남자들은 곧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어차피 밤이 되면 또 눈이 내릴 것이다. 집에서 나와보지도 않는 이장이 이들이 성실하게 일을 하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눈이 어느 정도 쌓이면 주변은 솜 잔뜩 넣고 누빈 이불처럼 푹신푹신해져 찬기도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눈 위에 엉덩이를 뭉개고 앉아 빈둥거리며 노가리를 까다가 문득 김씨는 여전히 눈을 푹푹 퍼 올리는 소리를 들었다. 털모자를 뒤집어쓴 김씨의 눈이 가늘어진다. 흰 눈밭 위로 길고 마른 인영이 휘청이며 삽을 움직이고 있었다.
“야!!!”
김씨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른 남자들은 어깨를 움찔거리기도,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이 새끼 이장한테 다 일러바치려고 그르냐? 걸쭉하게 쏟아지는 욕설에 묵묵히 움직이던 삽이 멈칫했다. 김씨는 니 그거 한 번만 더 하면 삽으로 대구리를 깨겠다고 씩씩거렸다. 아고 형님 진정하소... 김씨의 주변에 앉아있던 남자들은 그러지 마라고 잠시 말을 얹었고 김씨는 박씨가 건네준 양담배에 기꺼이 기분을 풀었다. 다시 조용한 눈밭에서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주연은 삽을 눈 위로 꾹 박은 채 자리에 가만히 섰다. 곧 찬바람이 주연의 뻣뻣한 검은 머리칼을 마구 흐트러트리며 지나갔다.
일용할 양식
주연이 남자의 옷자락을 발견한 건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운명처럼, 수북한 눈더미 밑으로 튀어나온 소맷자락을 볼 수 있었을까.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하면서 남자들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종종거리며 집으로 돌아갔고, 주연만 남아 큰길을 몇 번 훑어 길이라고 하기도 우스운 작은 길을 낸 때였다. 싸구려 패딩이 눈에 젖어 어깨를 짓누르고 손 마디마디가 시뻘겋게 달아올라 통증까지 무감해지고 나서야 주연은 자리에 몸을 세웠다.
양손을 서로 비벼가며 손을 녹이던 주연의 눈에 앙상하게 잎을 떨군 나무 밑으로 불룩하게 솟아오른 눈더미가 들어왔다. 흰 눈 사이로 삐죽 튀어나와 기묘하게 대비되는 검은 천 조각도.
주연은 눈에 박아 세워둔 삽을 뽑아 들고 눈더미를 향해 걸었다. 그 앞에 주섬주섬 쭈그리고 앉아 삐져나온 천을 잡아당기자, 길고 가는 손가락이 달린 손이 쌓인 눈 틈으로 불쑥 삐져나왔다. 주연은 헉 놀란 숨을 뱉으며 뒤로 넘어졌다. 편하게 입는 면 재질의 고무줄 바지가 눈으로 푹 젖었다. 차마 도망도 가지 못한 채 자리에서 떨던 주연은 문득 눈 밖으로 드러난 손이 망자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부드러운 살구색을 띠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 주연은 어린 나이였으나 마을 자체가 죽음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올해만 해도 몇이나 되는 늙은이들이 신의 곁으로 갔는가. 주연은 그들의 시신을 들어 올려 관에 넣어보기도 하였다. 그들의 손은 절대 이렇게 무르게 보일 수 없었다.
성별을 가늠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손이었다. 주연의 손은 타고나길 큼지막했고, 오랜 노동으로 마디가 굵어져 울퉁불퉁했다. 흰 눈 위에 드러난 손은 길고 쭉 뻗은 손가락들이 모양 좋게 자리 잡은 채였다. 주연은 손을 뻗어 아름다운 손의 끝을 건드려보았다. 눈이 이 손의 온기를 빼앗아 간 것일까. 몹시도 차가웠다. 하지만 딱딱하진 않았다. 무른 살이 뜻함은 살아있음이리라.
주연이 삽을 들어 눈더미를 파기 시작했다. 금방 흰 눈 사이로 검은 옷자락이 드러났다. 더 이상 삽으로 건드리지 못하고 맨손으로 눈을 치우다가 힘을 주어 눈 위에 누워있는 몸을 끄집어냈다. 눈을 감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했다. 역시 죽은 거 아닌가? 다시 드는 의문에 주연은 남자의 인중 밑에 손가락을 갖다 대 보았다. 미약한 숨결이 손가락에 닿았다. 그 작은 감각은 주연이 살면서 느낀 적 없는 간지러움이었다.
잠깐 몸을 굳혔던 주연은 남자의 몸을 부축하여 눈 위를 걷기 시작한다. 눈 위로 주연의 발자국과 남자의 발이 바닥에 질질 끌리며 그려내는 선이 길게 이어졌다.
***
남자가 눈을 뜬 것은 하루가 꼬박 지난 후였다. 그의 눈에 처음으로 들어온 건 당연하게도 천장이었다. 오래된 벽지가 누르스름하게 변색 되어 있는 천장. 주변은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옅은 빛을 제외하면 깜깜했다. 몸 위를 덮은 두꺼운 이불에서는 오래된 것의 묵은 냄새가 났다. 남자는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방은 아주 작았다. 자신이 누워있는 이부자리를 주변으로 별다른 가구가 없었음에도 그렇게 느껴질 정도로 아주 작았다. 방구석에는 종이상자가 몇 개 쌓여있었고 그 위에는 컵과 반쯤 물이 찬 페트병이 덩그러니 놓였다. 남자가 별로 꼼꼼하지 못한 성향이라는 것을 감안한다고 쳐도 이 방을 전부 구경하는 데에는 몇 분도 채 걸리지 않을 터였다. 정말 별 볼 일 없는 방이네. 남자는 누운 채로 잠깐 생각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곧바로 누군가 낡고 녹슨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
주연이었다. 남자는 낯선 얼굴에게 안녕, 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아, 안녕하세요…”
고개를 꾸벅 숙이는 모습이 숨길 수 없게 어수룩했다. 아무렇게나 잘린 검은 머리, 깡마른 몸과 변변치 못한 옷차림. 색이 별로 없는 입술은 하얗게 부르터있었다.
“나 도와준 게 너야? 기억이 잘 안나는데.”
“네… 바닥에 쓰러져 있어서…”
“아하. 고맙다. 죽을 뻔했네.”
“네에…”
“이름이 뭐야?”
“주연이요...”
주연은 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다가 잠시, 잠시만요 하고 후다닥 방을 나섰다. 방음이 잘되지 않는지 문밖으로 계단을 달려 내려가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주연이 누군가와 함께 다시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를 들었다. 다시 문이 열리고 이번에는 머리가 반쯤 벗겨진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 일어났대?”
노인은 신발을 벗고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왔다. 뒤에 서 있던 주연은 노인이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따라서 신발을 벗었다. 그 사이 노인은 남자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남자의 눈이 노인을 위아래로 훑고는 다시 그 뒤에 그림자같이 선 주연을 향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우리 주연이가 딱 발견한 게 아니었으면 눈 다 녹고 나서 발견되었을 거 아녀.”
“아, 네.”
남자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주연이 옆에서 저희 이장님이세요, 했다.
“어쩌다가 거기 그러고 누워 있었댜?”
“중간에 차 네비가 고장나서요. 방향을 영 못 잡고 헤매다가 차가 멈추는 바람에 주위에 사람 없나 보러 나온다는 게 그만.”
“진짜 큰일 날 뻔했네. 여긴 의사도 없어서 주연이가 붙들고 간호했으니 생명의 은인이여.”
정말 그렇네요. 남자는 웃으면서 이장의 말에 동의했다. 뒤에 선 주연이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살짝 저었다. 남자는 이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연은 다시 한번 남자의 손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이현재라고 합니다. 찻길이 좀 녹을 때까지 신세 져도 괜찮을까요. 사례는 하겠습니다. 어르신.”
이현재. 주연은 악수하는 두 사람의 뒤에서 남자의 이름을 몇 번 속으로 곱씹었다. 남자와 퍽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을 하며.
***
축사 벽에 결로가 생겼다. 주연은 이장이 지시하는 대로 사다리를 끌고 한참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결로를 전부 제거하고 땅을 밟자 바닥이 휘청이는 느낌이 들었다. 에구구…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아 잠깐 쉬고 있으니 이장이 찬 보리차를 한 잔 떠다 주었다. 주연은 아무 말 없이 잔을 받아 삼켰다. 눅눅하게 뭉개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장은 주연이 주저앉은 바닥 옆에 서 있다가 넌지시 말을 걸었다.
“그 양반은?”
이장이 묻는 사람은 두말할 것 없이 이현재, 그 남자다. 그제 주연에게 주워져 어제 눈을 뜬 남자. 주연은 입에 물고 있던 보리차를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계속 주무시던데요…”
아침 일찍 방을 나선 주연이었다. 현재는 두꺼운 솜이불을 덮은 채 눈을 뜨지 않았다. 주연이 옷을 입고 나갈 준비를 하느라 제법 시끄러웠을 텐데 미동도 없었다. 어제도 이장이 밑으로 내려오면 안방을 내어주겠다는 말을 거절하고 내내 잠만 자더니, 허리가 아프지도 않나 궁금할 정도였다.
“여기 다 하고 들어가서 깨있으면 데꼬 내려와라. 닭 한 마리 잡았응께.”
헉. 내심 놀랐으나 겉으로 티 내지 않고 고분고분 네, 했다. 현재가 입고 있던 옷이 보통 비싼 옷이 아니라고 사모가 수군거리는 걸 듣긴 했으나 이렇게 신경 쓸지는 몰랐다. 주연은 이제 들어가 보겠다는 이장의 뒤에 대고 꾸벅 인사를 하고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축사 벽에 다 헐어 못 입게 된 옷이나 좀먹은 이불 뭉치를 두르고, 타카를 박고, 구석에 모아둔 잡 목재를 덧대면서 보수를 했다.
축사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송아지와 어미소, 돼지 네 마리가 있었다. 불쌍한 가축들은 최대한 바람이 들지 않는 구석에 모여 서로의 온기로 몸을 데웠다. 살얼음이 생긴 물통에 가볍게 주먹질을 해 얼음을 부수자 어미소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걸어와 물을 할짝거렸다. 착하다, 주연은 온순한 눈을 한 어미소의 이마를 살살 쓸어주었다.
건초를 먹이통에 가득 채우고 마지막으로 축사 주변을 덮어놓은 비닐까지 점검한 후에야 주연은 축사를 나섰다. 축사와 연결된 뒷길을 쭉 돌아 2층으로 향하던 걸음이 문득 멈췄다. 스스로의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쩌지.”
그동안 주연은 아침에 일을 했다고 씻는 일이 없었다. 말이 좋아서 2층이지 이장의 집 옥상에 작게 컨테이너를 올린 게 주연의 보금자리였다. 욕실이 딸려 있을 리 만무했다. 점심은 사모가 싸준 밥을 일터에서 먹고 다시 일을 해야 했다. 녹초가 된 상태로 돌아와서는 이장의 집에서 씻고 차려주는 저녁을 먹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 그게 불편한지도 모르고 살았다.
그러나 참 신기한 게, 그 좁은 방에 저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는 생각만으로 평생 신경 쓴 적 없던 것이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몇 시간을 축사에서 보냈으니 몸에 가축의 냄새가 배는 것이 당연했다. 거기에 무거운 자재를 들고 왔다 갔다 하느라 등골에도 땀이 흘렀으니 땀 냄새도 섞였을 것이다. 부자라고 했으니 이런 냄새를 고약하다고 여기지 않을까? 주연은 낡은 패딩점퍼 안의 티셔츠를 끌어당겨 킁킁 냄새를 맡았다. 너무 오랫동안 축사 안에 있었기 때문인지 스스로는 별 냄새를 느낄 수 없었다.
잠시 아직 눈이 쌓인 정원을 서성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걸음을 조금만 더 옮기면 현관이 있고, 그 안에는 당연히 욕실이 있다. 그러나 이장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마음대로 문턱을 넘는 건 감히 주연에게 허락되지 않은 행위였다. 이마에 열이 펄펄 끓던 어린 날의 기억이 생생했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골방에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가, 이대로라면 정말 죽을 것 같아 기다시피 계단을 내려가 현관문을 두드렸을 때, 문을 열고 나온 이장이 보여준 냉정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주연은 기억하고 있다. 아무런 쓸모없는 늙은 개에게 그러하듯 퍼부어지던 발길질도.
주연은 정원에 쌓인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 빨갛게 부르튼 손에 한가득 쥐었다. 눈은 금세 녹아 물이 되어 손 틈 사이로 줄줄 흘러내렸다. 물방울을 털어내고 다시 눈을 쥐길 반복했다. 손끝이 터질 것처럼 땡땡하게 부풀어 오르고 화끈거렸다. 구질구질한 행위를 반복할 때마다 흠 없이 깨끗한 줄 알았던 눈에 섞인 먼지와 흙 떄문에 손바닥은 점점 더러워졌다. 손을 비벼 흙을 털어내고 최대한 흙이 묻지 않은 깨끗한 눈을 다시 쥐었다. 아팠다.
몇 번이고 손을 닦아냈을까. 손에 코를 박고 혹시 남아있는 악취를 맡으려고 노력해보아도 주연에게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되었으려나. 걱정스러웠지만 별달리 더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흠뻑 젖은 손을 휘휘 저어 털고 바지춤에 문질러 닦았다. 차마 머리나 얼굴을 눈에 박을 용기를 갖지 못한 스스로를 원망하며 터덜터덜 철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의 끝에 가까워질 때마다 주연의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쿵쿵 뛰었다. 무엇이 이렇게 두려운지 모를 일이었다.
끝을 모르고 늘어지는 걸음을 애써 재촉해 낡은 문을 열면 현재가 있었다. 현재는 이불을 걷고 앉아있었는데, 창으로 들어온 오전의 햇볕이 발밑에 어리는 걸 가만히 응시하는 중이었다.
“왔네?”
“일어나셨네요.”
현재는 주연을 돌아보고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씩 웃었다. 주연이 그동안 본 이 남자의 얼굴은 대부분이 눈을 감고 자는 얼굴이었던지라 이토록 활기 넘치게 웃는 얼굴은 새삼 처음 보았다. 부자라고 했다. 처음 현재를 업고 온 주연에게 욕지거리를 퍼붓던 이장이 그의 몸에서 벗겨낸 옷의 상표를 보자마자 바로 얼굴색을 바꿨으니 아마 좋은 옷을 걸치고 좋은 것을 누리며 살아왔을 부자. 주연은 차마 제 방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꾸물대며 말을 걸었다.
“이장님이, 일어나셨으면 식사하라고 불러서요…”
안 그래도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 욕을 먹는데 현재의 앞에서는 유독 목소리가 목 안으로 빨빨거리며 기어들어갔다. 주연은 괜히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오, 메뉴 뭔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현재는 주연과 견줄 정도로 키가 컸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채였고, 그 이후로는 계속 누워있거나 앉아있었기 때문에 지금껏 눈치채지 못했다. 태어난 이래 자신과 비슷한 키의 사람을 처음 보는 주연은 낯선 산짐승을 본 것처럼 눈만 꿈뻑거렸다. 신기했다. 지금까지 주연은 자신처럼 키가 큰 사람은 어딘가 잘못되어 태어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더더욱.
“닭 잡으셨다고 하셨어요.”
“맛있는 거네. 그럼 내려가 줘야지.”
마치 자신이 큰 선심 쓴다는 듯 코를 찡긋거리며 중얼거린 현재가 문 앞까지 다가와서, 주연은 다급하게 걸음을 뒤로 물렸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가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이 지나갈 때 인상을 찌푸리지 않길 바랐다. 옆으로 물러서 있으니 현재가 문 앞에 놓인 자신의 낡은 슬리퍼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곧 아무렇지도 않게 꿰어 신었다.
주연은 급히 말했다.
“현재,씨 신발은 밑에 층에 있어요. 비싼 거라 닦아 놓으시겠다고 했어요.”
“아아.”
주연이 안절부절못하는 거에 비하여 현재는 자신의 신발의 행방에 별 관심도 없는 눈치였다. 물론 주연은 현재의 비싸 보이는 구두를 구두약을 묻혀 싹싹 닦더니 제 늙은 발을 꽂아 신고 다니던 이장의 모습을 기억했다. 하지만 이장은 구두가 망가지지 않았는지 잠시 신어보는 거라고 말했고 주연은 이장의 말을 믿지 않는 법을 몰랐다.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어 유달리 빛이 잘 드는 옥상 한가운데 선 현재가 잠시 미간을 꿈틀거렸다. 아직 바람은 칼처럼 매섭지만 해는 제법 따뜻하게 들어서 며칠째 묵었던 눈더미가 조금씩 녹아가는 날씨였다. 오랜만에 해를 맞아 어지러운가? 주연은 궁금했으나 물어보지는 않았다. 슬리퍼를 신은 현재의 맨발이 허옇다.
“계단이 미끄러워서... 조심하세요.”
“엉.”
질질 슬리퍼를 끄는 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렸다. 그건 주연에게 무척이나 생경한 경험이었는데, 주연의 방까지 찾아오는 사람은 이장 아니면 사모뿐이고, 그들은 절대 주연의 뒤에서 걷지 않기 때문이었다. 주연은 자꾸 뒤를 힐끔거리며 현재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했다. 폭이 좁고 가파른 계단인지라 혹여나 자리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현재가 비틀거리기라도 한다면 부축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매일 몇 번이고 오르락내리락했던 계단에서 삐끗 발을 헛디딘 것은 주연이었다.
“어, 엏!”
바닥이 미끌거리는 철제 계단을 계속 뒤를 보며 걸었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었다. 몸이 휘청거림과 동시에 주연은 곧이어 닥칠 고통에 대비하는 것처럼 반사적으로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그 마른 몸이 계단 위로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뒤에서 뻗어온 손이 주연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당겼기 때문이었다.
“야야... 너야말로 조심해야지.”
현재가 이렇게 힘이 셀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다. 현재의 손아귀에 어깻죽지가 붙들린 채 겨우 자리에 서서, 주연은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현재를 보았다. 해를 등져 그림자가 짙게 진 잘생긴 얼굴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놀란 심장이 시끄럽게 쿵쾅거렸다. 주연은 손을 더듬거리며 계단의 난간을 붙들었고, 그제야 어깨를 붙든 손에 힘이 풀렸다. 가, 감사합니다… 입 밖으로 크게 나오지도 못한 감사를 중얼거리며 주연은 난간을 붙들고 천천히 다시 걸음을 옮겼다. 너무 크게 놀라서 일까, 심장의 거센 고동이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다.
계단이 끝나도록 시끄럽게 꿈틀거리던 심장은 1층 현관에 고개를 삐쭉 내밀고 있는 이장의 얼굴을 목도하고 나서야 겨우 안정을 찾았다. 주연은 고개를 꾸벅하였으나 언제나처럼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대신 이장은 주연의 뒤에 선 현재에게 인사를 건넸다.
“서울 양반 인제 일어난 겨? 따로 안 불러도 밥때 되면 밑으로 내려오라니께.“
현재는 놀랍게도 제가 배가 고프면요. 하고 웃어 보였다. 지금까지 주연이 봐온 중에 이장의 권유에 이렇게 장난식으로 대꾸하는 사람은 처음이었으나 크게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현재에게는 이장을 어려워하는 눈치도 전혀 없었고, 존중하는 태도도 별로 보이지 않았으나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다른 사람에게라면 예의를 가르치겠다며 길길이 날뛸 이장 또한 신기하게도 별다른 말 없이 편한 대로 혀, 하면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주연은 현재가 부자이기 때문에 이런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걸까 궁금했다. 뒤에서는 듣지도 못할 이장의 욕을 늘어놓으면서도 이장과 호형호제를 하며 굽신거리는 마을의 사람들을 떠올리니 현재의 존재는 주연이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나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현재는 주연이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이장이 열어둔 현관문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앗, 주연도 뒤늦게 현재의 뒤를 따라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이미 현재는 슬리퍼를 벗고 마룻바닥을 딛고 있었고, 벗어 던져진 슬리퍼 옆으로 반들반들하게 광을 낸 검은 가죽구두도 보였다. 주연은 현재가 벗어둔 슬리퍼를 반듯하게 고쳐놓고 그 옆에 제 운동화를 두었다. 몇 번이고 닳아 빠진 곳을 기워내 너덜너덜한 회색 운동화가 볼품없게 느껴져 고쳐 두어 보았다가 결국 포기하고 숙인 허리를 폈다.
거실에는 이미 거하게 잘 차려진 밥상이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가장 상석에 앉은 이장이 손을 흔들어 현재를 불렀다. 현재는 뒷머리를 한번 쓸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 옆에 앉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현재와 눈이 마주친 주연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순간 현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휴 먼저들 먹고 있지요~”
주방에서 사모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걸어 나왔다. 푹 고아진 백숙 그릇을 쟁반에 올린 채 종종걸음으로 움직이는 사모를 피해 몸을 살짝 옆으로 튼 주연이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 바닥에 차려진 작은 상, 뽀얗게 우러난 국물과 밥 한 공기가 상 위에 올려진 채였다. 주연은 거실을 한번 힐끔거리다가, 싱크대에서 물을 틀어 손을 닦았다. 이왕 닦는 거 몰래 퐁퐁도 조금 짜서 손 가죽을 벅벅 문질렀다. 끈적거렸던 손가락 사이가 뽀득거리는 게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예상치 못한 손님 덕분에 따뜻한 집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으니 행복한 날이라는 생각을 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주연이 어렸을 때, 마을에 임시 예배당이 섰을 때 목사에게 들은 이후로 마음에 새겨둔 말이었다. 이 세상에는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누울 자리 하나 없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그렇게 따지면 주연은 현재처럼 빛나는 축복으로 가득 찬 사람은 아니어도 꽤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주연은 젖은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고 주방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작은 앉은뱅이 밥상에 차려진 밥을 먹기 위해서는 최대한 몸을 구부려야 한다. 어깨와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후 국에 밥을 말았다. 포실포실하게 잘 익은 쌀알에 뜨거운 국물이 스민다. 잘 익은 깍두기와 함께 입에 넣으니 겨울 추위에 얼었던 몸 안이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맛있어?”
우물거리며 식사를 하던 주연의 머리꼭지에 누군가 툭 말을 걸었다. 주연은 양 볼을 볼록 부풀린 채 고개를 돌렸다. 현재였다. 주연은 급하게 입을 가리고 네, 하고 답했다.
“잘 먹네. 나 배부르니까 너 이것도 먹어.”
한 손에 웬 접시를 들고 있길래 뭔가 했더니 주연의 작은 밥상 위로 닭 다리가 담긴 접시가 아슬아슬하게 놓였다. 놀란 주연이 감사의 말을 하기도 전에 현재는 이따 봐, 하고 다시 거실로 돌아가 버렸다.
밥을 먹고 어떻게 일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장의 지시대로 눈으로 한 귀퉁이가 무너진 정씨네 하우스 비닐을 손보면서도 주연은 계속 처음 먹어보는 닭 다리의 맛을 떠올렸다. 이장이 인심을 쓰면서 나눠주었던 닭고기와 맛이 아예 달랐다. 살이 너무 말랑말랑해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가는 신기한 맛. 뼈에 붙은 살점이 사라지는 게 어찌나 아쉽던지.
누군가 자신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호의를 베푸는 건 주연의 삶에 몇 되지 않는 경험이어서, 어쩔 수 없이 그 호의를 몇 번이고 곱씹게 되었다. 평소보다 늦게 일을 마친 대가로 정씨에게 몇 마디 욕을 들었지만 속상한 마음보다 괜스레 벅찬 마음이 더 컸다. 이장의 집에 도착했을 때, 옥상에 놓인 작은 컨테이너에 불이 켜져 있는 게 얼마나 설레던지. 평소보다 늦어 온수 보일러를 껐다는 말에도 얼른 씻고 위층에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찬물에 너무 오랫동안 씻은 건지 온몸이 으슬으슬했다. 몸이야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지만 머리카락은 수건으로 몇 번이나 털어냈음에도 곧 빳빳하게 얼어버렸다. 덜덜 떨리는 몸을 하고 주연은 제 손목에 코를 박았다. 뽀송뽀송하게 잘 마른 옷에서 나는 비누 냄새가 났다. 하얗게 질린 입술이 둥근 호선을 그렸다. 실없는 웃음이 자꾸 입꼬리에 머물렀다.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점심때처럼 두려운 마음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방문을 열고 싶어서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문 앞에서는 다시 한번 손목에 코를 박고 비누 냄새를 맡았다. 문을 열면 제 손바닥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던 현재가 고개를 들어 주연과 눈을 맞췄다.
“다녀왔냐.”
“... 네, 네... 다녀왔,어요.”
어디가 걷어차인 것도 아닌데 왜 눈물이 날 뻔했는지 주연은 잘 알지 못했다. 눈물을 참는 법은 잘 알아서 입술을 꾹 물어 삼켰을 뿐. 문 앞에는 아직 현재의 신발이 없었고 제 낡은 슬리퍼만 있었다. 그 옆에 운동화를 벗어두고 뭐 보세요, 하고 물었다. 아아, 하고 현재가 손을 들어 보여준 건 주연이 가져본 적 없는 핸드폰이라는 물건이었다.
“망가진 줄 알았는데 다행히 방전된 거였더라고. 핸드폰 충전기 있는 사람 구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적은 처음이다 진짜.”
“우와...”
주연은 현재가 보여준 작은 화면에 감탄했다. 화면에는 귀여운 노란 옷을 입은 강아지가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이 떠있었다.
“차 보험사에 연락도 했고, 이장 말대로라면 모레쯤엔 차도 다닐 수 있을 거라니까 다행이지.”
“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차가 다닐 수 있다는 말이 뜻하는 바는 뻔했다. 현재는 이 마을의 사람이 아니었고, 곧 자신이 있던 원래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당연히 알고 있는 바였으나 주연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복귀였다.
“너 아니었으면 훨씬 늦어졌을 텐데 고맙다. 새해를 하마터면 길바닥에서 맞을 뻔했잖아.”
현재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농담을 했다. 주연은 차마 그 농담을 받아 쳐주지도 못한 채 기운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방금까지 크게 부풀어있던 마음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쪼그라들었다. 주연은 다시 입술을 앙 물고 구석에 이부자리를 폈다. 벌써 자게? 현재의 물음에 네... 피곤해서요... 답하고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자꾸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애써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고 있으니 현재가 자리에서 일어난 건지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달칵, 소리와 함께 불이 꺼지고 주변이 암흑 같은 어둠으로 덮였다.
“잘자, 주연아.”
다정한 목소리. 훌쩍거리는 소리가 분명히 들렸을 텐데도 현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새벽 일찍 일어난 주연의 시선이 자신이 옷을 다 주워입을 때까지 미동조차 없는 현재를 향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방안은 검푸른 남빛으로 잠긴 채였으나, 사람의 생김이 눈에 보일 정도는 되었다. 살금살금 무릎걸음으로 현재의 곁에 다가간 주연이 그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 보았다. 현재의 얼굴은 자신과는 전혀 달랐다. 날렵한 얼굴의 선과 둥글고 큰 눈, 뚜렷한 눈썹과 모양 좋게 뻗은 콧대가 그랬다. 자신이 현재처럼 생겼다면 적어도 눈깔을 이상하게 뜬다며 얻어맞을 일은 없었겠지 싶었다.
주연은 저도 모르게 현재의 이마 위를 덮은 머리카락에 슬쩍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가 제풀에 놀라 후다닥 손을 치웠다. 주연이 이렇게 몰래 자기를 건드린 걸 알면 기분 나빠할지도 몰랐다. 비록 어제 깨끗하게 씻은 몸이라고 할지라도. 주연은 살짝 밑으로 내려간 현재의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주고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전기매트를 켜놓았다고 해도 아직은 바람이 찼다.
***
현재의 말한 대로 눈이 많이 녹아 하루 종일 바빴다. 해가 바뀌고 나서도 꼼짝없이 마을에 갇힐 줄 알았던 마을 사람들은 신이 났는지 주연만큼은 아니더라도 분주하게 한 해의 마지막을 준비했다. 집집마다 이어진 좁은 길들을 정비하고 하우스들의 비닐을 갈았다. 주연은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구슬땀을 흘렸다. 또래의 젊은이라곤 없는 마을이라 힘을 써야하는 일이라면 누구든지 주연을 찾았다. 별다른 감사 인사조차 받지 못했으나 주연도 마을 사람들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주연이 부모도 알지 못한 채 마을 어귀에 덜렁 버려진 아이라서 그랬다.
점심마저 거르고 밤늦게 이장의 집에 도착해 몸을 씻고 나오니 식은 밥과 반찬 몇 개가 차려진 앉은뱅이 밥상이 보였다. 전자레인지에 식은 음식을 데우는 것까지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그마저도 귀찮을 정도로 피곤했다. 주연은 머리에 수건을 얹은 채 밥을 먹었다. 딱딱해진 밥알이지만 허기진 목구멍은 그마저도 잘 받아넘겼다. 종일 고생한 보람인지 오징어 볶음 몇 점이 접시에 담겨 있었다. 주연은 질긴 오징어를 느리게 씹어 삼켰다. 그리고 현재를 생각했다.
내일이면 현재는 서울로 돌아가고 앞으로 영원히 볼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따끔거려서 괜히 차가운 보리차를 한 컵 가득 채워 들이켰다. 주연은 꾸역꾸역 그릇을 전부 비우고, 설거지를 하고, 최대한 조용히 현관을 나섰다. 사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지만 다시 눈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물론 주연의 바람은 언제나처럼 아무도 들어주는 일 없이 제 자리에서 흩어져 버렸지만.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을 올려다본 주연이 이내 고개를 떨구고 묵묵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철제 계단을 밟을 때마다 나는 끼익 소리가 오늘따라 요란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주연아.”
그리고 마지막 계단을 밟았을 때 목소리가 들렸다. 옥상 난간에 기댄 현재가 주연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왜 나와 계세요? 안 추워요?”
종종거리며 현재에게 달려간 주연이 급히 물었다. 아무리 날이 좀 풀렸다지만 아직 건조하고 추운 겨울 날씨였다. 낡아빠진 슬리퍼를 신은 현재의 맨발이 시리도록 하얘 보일 정도였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아무리 우연히 오게 된 마을이라지만 너무 누워만 있었다 싶어서. 떠나기 전에 경치는 한번 봐야 되지 않겠어?”
아... 주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현재의 옆에 붙어섰다. 이장의 집은 다른 집들보다 높은 지대에 있어서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였다. 몇 노인들의 죽음 이후로 아무도 살지 않아 버려진 채 불이 꺼져있는 집들과 듬성듬성 불이 켜져 있는 집들. 주연에게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풍경이었으나 현재의 눈에는 제법 신기한 모양이었다.
“여긴 정말 작네. 젊은 사람도 너 말고는 없어 보이고. 원래 그랬어?”
“제 기억에는요. 그나마 이장님 댁에 아드님? 그래도 저보다는 열 몇 살 더 많았어요. 지금은 인천에 사시구요.”
“그렇구나…”
현재는 잠시 말없이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주연아.”
“네?”
“너 여기 돈 받고 일하는 거라며. 얼마 받냐?”
“어, 그건…”
“너 내가 서울에 일자리 소개해 준다고 하면 올래?”
쿵, 주연의 심장이 북 소리를 내며 크게 뛰었다.
“저를요?”
“얼마 받는데? 말해봐.”
주연은 이장이 보관해주고 있는 자신의 통장을 떠올렸다. 글을 읽지 못하는 주연 대신 읍내에 나가 통장을 만들어왔다며 이장은 앞으로 여기에 매달 월급을 넣어 줄 테니 필요할 때 말하라고 했다. 그게 몇 년 전의 일이니 아마 제법 돈이 쌓였을지도 몰랐다. 다만 정확히 얼마를 주겠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서 월급이 얼마인지는 몰랐다.
“어려운 일 아니니까 한번 생각해 봐. 돈도 아마… 여기보단 더 줄걸?”
대꾸하지 못하는 주연의 태도를 오해했는지 현재는 웃으며 덧붙였다. 주연은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란 마음을 숨기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까지 주연은 단 한순간도 마을을 떠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실제로 마을을 떠나본 적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가끔 읍내에 나갔다. 아프면 병원에 가기도 했고, 장이 서는 날이면 물건을 사러 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주연을 차 옆자리에 태워준 적은 없었다. 평생토록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선택지가 주연의 앞에 별처럼 반짝거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너 머리 덜 말랐네. 춥겠다. 들어가자.”
생각에 잠긴 주연을 빤히 들여다보던 현재가 목소리를 높였다. 주연이 넿, 하고 순하게 답하자 바람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주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손이 닿은 어깨가 왠지 불이 붙은 것처럼 뜨겁게 느껴져서 주연은 괜히 부르르 몸을 떨었다.
***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주연은 다른 날들과 마찬가지로 꼭두새벽에 눈을 떴고, 무심결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놀랍게도 이미 눈을 뜬 현재가 자신과 눈을 맞춰 왔다. 주연의 입에서 절로 헉 소리가 났다. 제 쪽을 향해 몸을 돌리고 누워있던 현재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언제 일어나셨어요? 물으니 아까~ 한다. 주연은 콩닥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 보지 마세요.”
“뭐?”
이불을 개고, 일할 때 입는 막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는데 평소와 달리 현재가 깨어 있으니 불편했다. 한참을 옷을 들고 엉거주춤 서 있다가 용기를 내 말 한 건데 현재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주연은 살면서 그렇게 큰 웃음소리는 처음 들어봤다. 작은 방이 가득 차도록 쩌렁쩌렁 울리는 웃음소리에 주연의 양 귀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현재는 이불을 치면서 웃다가 옆으로 쓰러지기까지 했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건지 주연은 짐작도 못 하겠다. 너무 웃으니까 좀 짜증이 나서 왜 웃지… 했는데 그걸 듣고 더 웃었다. 더 말도 안 걸고 몸을 뒤로 돌린 주연은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보지 말라고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입었어?”
옷을 다 갈아입고 힐끔 보니 현재는 작은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렇게 웃어댔으면서 주연의 말을 들어주긴 했다. 주연이 네, 대꾸하자 고개를 돌린 현재의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주연은 최대한 천천히 신발을 신었다.
“이따 나갈 때 보자.”
“…네.”
그래도 시간은 절대 멈추는 법이 없다. 가볍게 손을 흔드는 현재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주연은 방을 나섰다.
최근 들어 가장 한가한 날이었다. 묵은해를 보내는 날. 매년 그랬듯이 저녁에는 마을회관에서 다 같이 술을 마실 것이다. 이런 날에는 주연도 부침개 몇 조각이며 술 몇 잔을 얻어먹고 기분 좋게 자리에 누울 수 있다. 그러니 원래대로라면 좋은 날이 분명한데, 현재가 떠나는 날이라고 생각하니 속이 상했다. 마을회관을 쓸고 닦으면서도 자꾸 입이 삐죽 튀어나오는 걸 집어넣느라 혼났다. 무릎을 꿇고 걸레질을 하는데 누가 제 얼굴을 보지는 않겠지만 괜히 눈에 띄면 보기 싫다고 욕을 먹을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했다.
회관을 깨끗하게 청소한 다음에는 이장의 집에서 술 상자를 날랐다. 그래도 사람이 많이 죽고 다들 늙어서 전처럼 허리가 빠지도록 옮겨야 하는 일은 없었다. 큰 상을 피고 종이컵이며 젓가락이며 차려놓으면 슬슬 시간이 됐는지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럼 주연은 눈치껏 밖으로 나와 이장이 오기를 기다리면 됐다.
“이장님!”
곧 이장과 양손 가득 짐을 든 사모가 위로 난 길 끝에서 보였다. 주연은 급히 달려가 사모의 손에서 부침개며 전이 가득 담긴 광주리와 오뎅탕이 양껏 담긴 들통을 받아 들었다. 이장은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아침부터 내내 싱글벙글이었다.
“너 그거만 옮기고 집에 가봐.”
“뭐 가져올까요?”
“아니, 서울 양반 데리러 곧 온댄다. 너보고 저 큰길까지 길 알려달라던데.”
“아아… 네.”
주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둘러 걸었다. 손에 든 들통에 국이 담겨 있어서 뛰질 못하니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을회관 안까지 음식을 전부 옮겨두고 이장의 집으로 가는 길에는 뛸 수 있었다. 산골 마을이 다 그렇듯이 집끼리의 거리가 꽤 되어서 한숨도 안 쉬고 뛴다고 치면 끝에는 헥헥거릴 수밖에 없다. 마당에 도착해 숨을 고르고 있으니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계단참에 앉아있는 현재였다.
“가신다고 들어서요.”
“응. 근데 너한테 눈 감고 덜렁 들려왔으니 길을 모르잖아.”
이 말에는 주연도 헤헤 웃었다. 가자, 현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 때문에 세탁소에 맡기지도 못하고 하나하나 손빨래를 한 정장이 깨끗하게 잘 말라서 다행이었다. 주연의 다 낡아빠진 옷들이 아니라 원래 자기 옷을 돌려받은 현재는 이런 시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주연은 조금 슬퍼졌다.
“검은색을 좋아하세요?”
큰길을 향해 나란히 걸으며 주연이 문득 물었다. 까만 코트와 까만 정장에 신발까지 까만색이라 유달리 좋아하는 색인가 싶어서. 주연이 보기에 현재에게는 까만색보다는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한 색이 어울릴 것 같아서.
“음, 별로?”
“그렇구나. 까만 옷만 입으셔서 궁금했어요.”
“아.”
현재는 그제야 제 몸을 감싼 옷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이건 친구 장례식 때문에.”
“… 죄송해요.”
“죄송할 거 없는 게 구십 넘게 살다 갔으니 호상이라 괜찮아.”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인 주연의 어깨를 툭 친 현재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래도 주연은 현재의 얼굴이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친한 사람이 죽는 건 슬프다. 주연도 마을에 딱 하나 있었던 구멍가게 할머니가 죽었을 때 많이 슬펐으니까. 주연은 아직도 몰래 사탕이며 과자를 챙겨주던 주름진 손을 생각하면 슬펐다.
“아오… 미친 새끼 저걸 끌고 왔네.”
큰길과 이어진 마을 어귀에는 벌써 못 보던 차가 한 대 서있었다. 주연은 차에도 새빨간 색이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현재는 머리가 아픈 것처럼 목덜미를 주무르다가 주연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아무튼, 내가 어제 말한 거 잘 생각해 봐. 알았지?”
“근데 그럼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요?“
“뭔데? 돈?”
“아뇨… 만약 제가 서울 가서 일하면… 다시 볼 수 있어요?”
주연에게 있어 돈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껏 없이도 배부르게 먹고 살았으니까. 익숙하고 정든 마을을 떠난다면 그게 돈 때문은 아닐 것이다.
“… 혹시 내 대답이 네 선택에 영향을 끼쳐?”
“끼치죠.”
현재는 깊은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마을 쪽을 잠시 노려보았다.
“그럼, 일단은 그렇다고 치자.”
“우와!”
주연이 짤짤 박수를 치는 꼴을 지켜보던 현재가 에휴, 하고는 옆에 선 차의 창문을 두드렸다.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고 모습을 드러낸 건 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인 잘생긴 남자였다.
“바보냐, 바보?”
“시끄럽고, 나 펜이랑 메모지 좀.”
“얘는 뭐야?”
“나 도와준 애.”
주연은 처음 보는 남자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 사이 차에 대고 뭔가 끄적인 현재가 주연에 손에 메모지를 쥐여줬다.
“여기 번호랑 주소 보이지? 서울 도착하면 택시 타서 여기로 가달라고 해. 전화하면 마중 나갈 거야.”
자신이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건 아무래도 말하기 창피했다. 이 종이만 잃어버리지 않으면 되겠지. 주연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반으로 접은 종이를 바지 주머니에 고이 넣어두었다.
“간다.”
“조심히 가세요.”
“그래, 또 보고.”
“네!”
웃으면서 주연의 머리를 쓰다듬은 현재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주연은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현재가 떠나 슬펐지만 그래도 기운이 났다. 앞으로 영원히 볼 수 없을 거라고 여겼는데, 다시 볼 수 있다고 말해주었으니 주연에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길을 걸으며 주연은 찬찬히 계획을 세웠다. 일단 마을회관에 도착해 이장에게 서울로 가겠다고 말을 꺼내야겠다. 통장에 얼마가 들어있는지 확인하고 그 돈으로 서울에 가는 거다. 벌써 현재가 보고 싶으니 최대한 빨리 가는 게 좋겠지. 주연은 웃으며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저 멀리 보이는 회관은 벌써부터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주연의 걸음도 절로 빨라졌다.
서두르느라 가쁜 숨을 색색거리며 회관의 문을 열면 벌써 거나하게 취한 사람들이 노래를 부른다, 춤을 춘다 하며 바빴다. 주연의 시선이 가장 상석에 앉은 이장에게 닿았다. 불콰하게 얼굴이 달아오른 이장은 큰소리로 무언가 떠벌리고 있었다.
“그 병신새끼가 이번에는 아주 한 몫 단단히 했다니까! 며칠 재워줬다고 그 돈을 주는 사람이 어딨냔 말이야. 그 새끼도 좀 머리가 어떻게 된 거 같긴 해.”
현재의 이야기임이 분명했다. 위로 쏙 말려 올라갔던 입꼬리가 밑으로 쭉 쳐졌다. 돈을 많이 줬으면 칭찬만 하면 되지, 왜 욕을 할까. 속이 상했지만 이장의 말에 반박할 수는 없다. 주연은 벽에 붙어 서서 이장의 말이 끝나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 나누던 대화가 끊어지고 목이 타는지 이장이 앞에 놓인 막걸리 사발을 꿀꺽꿀꺽 들이킨 순간이었다. 주연은 조용히 이장의 옆에 가 섰다. 이장님, 하고 부르면 이장은 그제야 이 공간에 주연이 있는 걸 인지한 것처럼 깜짝 놀란 시늉을 했다.
“너 언제 왔냐?”
“아까요. 배웅하고 바로 왔어요.”
“그래?”
기분이 좋긴 한지 이장은 사발에 막걸리를 가득 따라 주연에게도 한 잔 주었다. 사발을 두 손으로 받아든 주연이 꼴깍거리며 막걸리를 마시자 어깨를 두드려 주기도 했다.
“이놈이 주워다 먹이고 길러준 값을 언제 하려나 했는데 이번에 아주 기특한 짓을 했어. 뭐, 잠바라도 하나 새로 사줘야겠어.”
“아, 아뇨. 잠바는 괜찮아요.”
“어허, 새끼가 어른이 준다는데 말대꾸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이장님, 저 이제 서울로 가려고요.”
“뭐?”
일순간 시끄럽게 떠들던 사람들이 전부 입을 다물어 주변이 조용해졌다. 순간 주연은 등골이 오싹거리는 불길한 감각을 느꼈으나 애써 무시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손님이, 서울에서 일해볼 생각 없냐고 그래서…”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두툼하고 거칠거칠한 손바닥이 주연의 뺨을 후려쳤다. 대비 없이 쏟아진 폭력에 주연의 고개가 옆으로 훽 돌아갔다.
“이런, 이런 배은망덕한 새끼가...!“
이장의 힘이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화를 내며 길길이 날뛰는 거야 전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으나 이제는 주먹질에도 발길질에도 별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아 아프지 않았다. 공처럼 둥글게 몸을 말아 엎드려 있으니 별로 시간이 흐르지도 않았는데 금세 쏟아지던 화풀이가 끝났다. 주연은 잠시 머리 위에서 들리는 거친 숨소리가 조금이나마 진정되기를 기다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잔뜩 인상을 찌푸린 붉은 얼굴에게 물었다.
“전에, 통장도 만들어주시고, 나가고 싶을 때 말하라고, 그때 그러셨잖아요…”
푸하하… 이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곧이어 주연이 얻어맞는 걸 구경하던 사람들에게서도 연달아 웃음이 터졌다.
“누가 병신 아니랄까 봐 그걸 믿냐… 호적도 없는 새끼가 어떻게 통장을 만든다고.”
호적이 뭘까?
주연은 귀가 멀 것 같은 웃음소리 속에서 멍하니 생각했다. 아무튼, 제 몫의 통장은 없다는 소리 같았다. 역시 그랬구나. 사실 속으로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주연의 바람은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으니까. 이번에도 역시 그랬을 뿐이다.
“넌 평생 이 마을 개새끼야, 어딜 감히 도망을 가...”
“평생?”
“그래, 여기 사람들 다 죽어 자빠질 때까지.”
“여기 사람들 다?“
고장 난 라디오처럼 중얼거리던 주연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장이 낀 금반지에 긁혔는지 입술 끝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주연은 깔깔거리는 사람들을 지나쳐 회관 밖으로 나갔다. 저 새끼는 화도 절대 못내! 하며 떠나는 뒷모습에 쏘아붙인 사람은 누구일까. 곧 주연 때문에 기분을 잡쳤다는 핑계로 다시 술잔이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보일러를 뜨끈하게 틀어놓은 바닥 위로 거나하게 취한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졌다. 자정이 넘은 이후부터는 제정신인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주연이 등유통을 들고 회관에 나타났을 때,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주연은 회관의 구석구석 등유를 뿌렸다. 바닥에 늘어진 사람들의 몸에도 기름을 끼얹었다. 주연의 얼굴에는 분노도 슬픔도 없었다. 축사를 고치고 하우스 비닐을 갈고 농사를 돕고 삽질을 하던 얼굴 그대로였다. 주연은 망설임이 없었다. 통의 기름을 전부 비우고 옆으로 누워 코를 골며 잠든 이장의 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잠시 현재의 말을 떠올렸다. 또 보자고 했던 상냥한 말을.
하지만 서울은 너무 멀고 난 마을 밖으로 나가본 적도 없는걸.
라이터에 불을 붙이자 곧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올해가 주연이 살면서 겪은 겨울 중에 가장 따뜻한 겨울이었다.
***
주연이 눈을 떴을 때 본 건 현재의 얼굴이었다. 그래서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뭐라고 말을 걸고 싶었으나 이상하게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계속 입술을 뻐끔거리고만 있으니 현재가 미간을 찌푸린 채 제 쪽을 노려보길래 그만두었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현재가 주연의 목, 이었던 부위를 팔뚝으로 받치고 검게 타버린 입술 사이에 손가락을 밀어 넣어 위아래로 벌렸다. 아마 기도도 식도도 녹아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을 터였다. 주연을 붙들지 않은 다른 팔뚝에는 길게 벤 상처가 있었다. 상처 틈으로 뚝뚝 떨어지는 피를 현재는 주연의 입술 사이로 흘려 넣었다.
“이재현 그으렇게 인간한테는 더 이상 정 안 준다고 난리를 치더니.”
백미러에 비치는 모습에 운전대를 잡은 남자가 연신 비아냥거렸다. 시끄러. 너 때문에 자꾸 깨잖아. 괜히 할 말이 없으니 그렇게 대꾸하는 걸 서로 잘 알았다. 주연은 어느새 코로 호흡하고 있었다.
-와아! 12시 입니다! 새해가 밝았네요. 이번 해에도 림디 잘 부탁드려요. 청취자 분들…
남자가 작게 틀어둔 라디오에서 새해를 축하하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깜깜한 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의 덜컹거림에도 주연 몸은 얌전히 눕혀져 있었다. 녹아버린 손끝과 발끝에 흰 살이 차오르는 게 보였다.
“해피 뉴이어야. 주연.”
이재현이 주연에게 말을 걸었다. 아마 주연이 이 말에 다시 대꾸하려면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괜찮았다. 이재현에게는 시간이 아주 아주 많기 때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