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guiding
손목에 차고 있던 스마트워치의 진동이 단잠을 깨웠다. 그러고도 아직 의식의 밑바닥에 남아 있던 졸음은 재빠르게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마저 털어냈다. 그렇게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일찌감치 잠에서 깨어났던 이주연은 꾸물꾸물 몸을 일으키려다 옆에서 뻗어진 팔뚝에 덥석 긴 몸이 붙잡혔다.
“앟.”
어디서도 그다지 아쉬울 일이 없었던 체구를 한 번에 제압당하고, 의지와는 반대로 푹신한 침대에 몸이 깊게 파묻히니 반사적으로 그런 탄성부터 새어나왔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언제나 공기가 반쯤 섞인 듯 새는 발음 탓에, 아무리 힘을 실어도 그다지 날카로운 느낌은 못 주던 목소리가 고요를 깨트린 것과 동시에 맨살이 드러난 목덜미엔 끝이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슬금슬금 엉겨붙어왔다.
그건 갑자기 무슨 변덕인지 어느 날 뜬금없이 장발에 도전하기 시작한 이재현의 머리카락이었다. 기껏해야 가끔 염색으로 분위기 전환만 했었지, 늘 비슷한 기장을 고수하며 차분한 스타일을 유지하던 두발은 애매한 인고의 시기를 지나니 이젠 제법 태가 났는데 이럴 때는 특히 짐승의 갈기 같은 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아, 간지렇…. 몸 여기저기의 통증은 무던하게 잘도 참았으면서 왜 간지럼은 그게 안 되는지. 몇 번을 반복해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에 주연이 몸을 들썩이는 사이, 아직 잠에서 덜 깬 재현은 제 고개를 이쪽의 목덜미에 바짝 붙인 채로 웅얼거렸다.
“…오늘은 그냥 쉬어….”
졸린 기색이 남아 있는 와중에도 묘하게 또랑또랑한 느낌이 있는 목소리는 고막을 타고 전달되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서 바로 울리는 듯 했는데 그 내용부터가 심히 유혹적이었다. 하지만 주연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은 약속이 있었다. 같은 팀의 센티넬 후배, 손영재와 아침 훈련을 하기로.
“안 돼, 약속했으니까. 게다가 내가 불렀는데 째면 모양 빠지잖아.”
“언젠 모양 안 빠졌나 뭐….”
…뭐랳. 못 들은 척 넘어갈 수 없었던 혼잣말에 굳이 퉁명스러운 대꾸를 중얼거리자 재현은 킥킥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얌전히 주연을 놓아주는 대신 한 번 더 사람을 꼬드겨댔다.
“손영재는 김선우랑 같이 훈련 하라고 하면 되자나.”
“…….”
“오늘 훈련 안 가면 내가 아침에 맛있는 김치찌개 끓여주께.”
그건 제법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물론 요리 실력은 자신이 훨씬 앞선다고 생각하지만, 남이 차려준 밥은 남의 손을 탔다는 것 자체로 각별한 맛이 있는 법. 남들 앞에서는 절대 보여준 적 없는 혀 짧은 소리로 툭툭 자신을 흔들어대는 이재현의 꼬임에 이주연은 잠깐, 아주 잠깐 한눈을 팔았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진짜 안 돼, 오늘 몸 좀 풀고 올 거야. 아직도 여기저기 좀 뻐근한 느낌이 있어서…."
“…아직도?”
군데군데 장난기가 섞여, 가볍게 들떠 있던 목소리는 그 대목에서 손바닥 뒤집듯 태도가 휙 바뀌었다. 어디 봐봐. 목소리는 진지한 무게가 실린 만큼만 나직해지더니, 재현은 주연의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고 손목을 턱 붙잡아 왔다. 거기에 채워진 스마트워치는 이주연의 몸상태를 실시간으로 송출하는 중이었다. 초록색으로 빛을 발하는 스크린 위로는 여느 때와 똑같은 숫자가 떠올라 있었다.
[100%]
이능력을 다루는 센티넬의 컨디션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상태를 알려주는 안정도 수치. 기름을 만땅 채워놓은 자동차처럼 더 이상 오를 구석도 없는 완벽한 수치는 가이드 이재현이 이주연을 전담으로 마크하기 시작하면서 단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대략 삼 주 전부터 주연은 객관적인 수치와 별개로 묘한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일상생활에선 별 문제가 없었는데 능력을 사용할 때만 이전과 달리 약간, 아주 약간 더 힘이 들어갔다. 그 감각을 굳이 비유하자면, 매일 운전하던 자가용의 엑셀이 아주 살짝 뻑뻑해진 느낌? 하지만 막상 A/S 센터에 점검을 요청하면 거기에선 정상이라고 판단을 내리는.
자동차랑 너랑 같냐. 재현은 그런 비유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느낌을 남에게도 이해시키기 위해선 그런 설명이 최선이었다. 여하튼 아직까진 그런 증상 때문에 일을 그르친 적은 없었으나, 껄끄러운 이질감을 없애기 위해 주연은 정말 별별 방법을 다 동원해보았다. 가장 먼저 머리부터 발끝까지 속속 검진도 받았고, 유연함 자랑하던 관절 이재현이 아니라 솜씨 좋은 물리치료사에게도 맡겨보고, 몸에 좋다는 영양제도 종류별로 구매해서 먹어보고, 아무 예정도 없었지만 일부러 며칠 휴가를 받아선 내내 집에만 틀어박혀, 마치 동면하는 곰처럼 20시간 연속 사치스러운 잠을 청해보기까지.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이 아직까진 별로 효과가 없었기에, 일단 주연은 당분간 훈련 횟수라도 늘려 변화한 몸 상태에 적응하고자 했다. 어쨌거나 이런 이유를 핑계로 본업에 발목이 잡힌다면 다른 누구보다 자신부터 그걸 용납할 수 없을 터였다.
"…나도 같이 갈까?"
"아잏, 이거 가이딩 문제가 아니라니까."
"그래도."
"아냐, 쉴 사람은 쉬어야지."
다년간의 경험으로 재현은 그런 주연의 성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되었다. 일상의 곳곳에선 참 헐렁하게 굴었으면서, 자신이 한 번 정한 기준이나 가치관은 철석같이 지키는 주연은 이럴 때는 특히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도 따박따박 돌려주는 대답엔 늘 그랬듯 옹골찬 고집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
"진짜 어디 아픈 덴 없지?"
"어."
"…그럼 훈련만 하고 바로 와.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부르고."
그래서 재현은 여전히 염려가 섞인 얼굴을 하면서도 주연을 순순히 놓아주었다. 무슨 일이 있을 게 뭐가 있어. 주연은 긴 팔을 둘러 황금같은 휴일, 새벽부터 별안간 초조해진 연인을 꽉 안아주는 것으로 그 대답을 대신했다.
*
저렇게 구는 이재현은 어느덧 계란 한 판의 나이가 되었어도, 큰 애기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어서 귀엽다…고 생각한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는데.
"이주연, 너 괜찮아?!"
"어엏…."
의무실로 부리나케 달려온 이재현의 얼굴은 그야말로 사색이 되어 있었다. 안 그런 척 사실 남에게 보이는 스타일도 몹시 신경 쓰는 사람을 후줄근한 차림으로 뛰쳐나오게 만든 게 미안해 입을 다물고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더니, 그걸 대번에 오해하고 다른 데로 불똥이 튀었다.
"야, 얘 괜찮은 거 맞아?!"
내내 주연의 상태를 걱정하던 손영재를 향한 눈동자가 이글거리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 형, 그게 아니랗. 그대로 냅두면 멱살까지 잡아챌 기세에 화들짝 놀란 주연이 병상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뭘 어떻게 했길래 얘가 10m 높이에서 떨어져!!"
민들레 솜털 같은 발성은 쩌렁쩌렁한 고함에 묻히고 말았다. 정작 손영재는 본인의 능력을 이용하여 아찔한 순간의 주연을 구해주었건만. 폭발하는 화산 같이 맹렬한 분노를 마주한 손영재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재빨리 어느 한 구석을 가리켰다.
"아니, 형! 저기 봐봐요, 워치가 이상하다니까??"
"이상하다고?"
그 한 마디에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이재현은 황급히 이주연의 손목을 잡아챘다. 워치 위에는 새벽과 달리 한 번도 본 적 없는 숫자가 깜빡이고 있었다.
[2411%]
기준치를 넘어버린 에너지 세이브… 기능 같은 게 있을 리가. 익숙한 숫자를 넘어도 한참 넘어버린 수치는 황당함만을 선사했다. 이재현은 얼떨떨하게 입을 열었다.
"이게 뭐냐?"
*
"아니… 이것 봐, 에너지 파장이 다 사라졌잖아."
영어 이름 Jacob, 한국 이름 배준영 연구원은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며 모니터를 가리켰다. 이재현과 이주연은 멍한 표정으로 그가 가리킨 화면을 바라보았다. 원래는 마치 열화상 카메라에 찍힌 것처럼 알록달록한 파장이 관찰되어야 할 주연의 모습은, 안에 무지개가 아니라 그림자를 품은 듯 스스로 발산하는 파장 하나 없이 실루엣이 거무죽죽하기만 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 있어. 기계가 잘못 된 거 아냐?"
놀란 채로 굳어 있는 주연을 대신해 재현이 입을 열었다. 갑자기 눈앞에 들이 밀어진 사실을 믿을 수 없어 자꾸만 이것저것 트집을 잡았지만 결국 객관적인 현상 앞에선 헛된 저항에 불과했다. 어쨌든 일단 결론부터 내려 보자면.
"…나 민간인 된 거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이주연은 하루아침에 일반인이 되어버렸다. 이건 좀처럼 관찰되지 않는, 아주 드문 현상이었다. 아직까지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진 않았지만 센티넬 능력 상실은 노화와 연관이 있다고 여겨지고 있었으므로. 보통 50대가 되면 점차 능력이 약해지기 시작하다 결국 소실되어 평범한 민간인으로 분류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 소실이라는 것도 단계별로 차근차근 진행되기 마련이었고.
헌데 아예 능력이 약해진 것도 아니고, 아주 살짝 거슬림을 느꼈을 뿐인데 갑자기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능력이 사라져 버리다니. 이런 경우는 아주 예전에 교과서로나 슬쩍 배웠을 뿐이었는데.
"지금까지 이런 사례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어."
여전히 뇌리를 짓누르는 의문을 제이콥이 풀어주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숫자들이 까마득했다. 이제까지 발견된 사례들로 확률을 계산해보면 약 416만 6천명 꼴로 한 명 정도로 이런 일이 관찰된다는 것이었다. 그걸 퍼센트로 환산하면 0.00002411%.
"그러니까, 로또 1등 맞을 확률의 약 두 배 정도는 된다는 소리지."
까마득한 숫자는 좀처럼 현실로 와닿지 않다가 친절한 설명에 겨우 이해가 되었다. 로또 당첨이 비록 내 일은 아닐지언정, 매주 당첨자는 나오는 거니까.
*
그렇다면 차라리 로또에나 당첨될 것이지.
정작 이제까지 복권은 그다지 사본 적도 없었으면서 주연은 속으로 그런 푸념을 중얼거렸다. 어쨌든 맨몸으로 임무에 투입될 순 없었으니, 바라지도 않았던 휴가를 강제로 얻게 되었고 며칠 사이로는 검사에 면담에 퍽 바빴지만 결국 정신없었던 것도 한때뿐이었다. 갑자기 붕 떠버린 시간 속에서 몸이 편하니 자꾸 생각만 복잡해졌다.
센티넬의 능력이 왜 사라지는지조차 명쾌히 파악하지 못하는 현재의 지식으로 잃어버린 능력을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 했다. 비록 희박하긴 했으나 로또 1등 확률의 두 배는 된다는 확률도 계산할 수 있었던 이런 경우와 달리, 그런 건 이제껏 공식적으로 관찰된 사례 한 번 없기도 했고.
…그럼 아무래도 퇴역해야겠지.
이런저런 사실을 고려하다보면 결국 결론은 그렇게 나왔다. 아직 처우는 결정 난 게 없었고, 아무도 짐 싸서 나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는 이미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누구는 교관 자리를 언급하기도 했으나 그것도 능력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을 때나 고려할 만한 선택지였다. 맨몸으로 서서 10년 동안 세웠던 전공만 입으로 들먹이면 과연 기세등등한 센티넬들이 어디까지 따라 줄지는 이주연이 먼저 의문스러웠다.
그리고 주연은 그렇게 내린 결론을 썩 유쾌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몹시 낯선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껏 성실히 복무할 수 있게 해주었던 사명감과 직업에 대한 호오는 분명 별개의 문제였건만. 몇 번이나 생각했었다. 만일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센티넬에 종사하진 않았으리라고.
타이밍은 갑작스러웠지만 이런 만약, 을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막 능력이 발현되었던 새끼시절에는 숨 쉬듯, 어느덧 짬이 찬 오늘에 이르러서는 이따금. 옛날부터 작성해왔던 탓에 어느덧 한 바닥 길이가 된 버킷 리스트는 당장 며칠 전에도 갱신한 적이 있었다.
퇴역하면 가고 싶은 여행지로 한 나라를 더 끼워 넣었었다. 멕시코. 간만에 한 줄 추가된 목록을 보고는 이재현도 말을 얹었다. 왜 하필 멕시코냐고.
"거기가 마야 문명의 발상지거든."
"마야 문명?"
"어,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
"…또 새로운 유투브에 빠졌구만?"
남들 눈엔 종잡기 어려워보이던 변덕도 이재현 앞에선 손쉽게 간파 당했다. 어쨌든 거기에도 피라미드가 있고, 맛있는 타코도 퀘사디아도 실컷 먹을 수 있다고 종알거리는 것을 가만히 들어주다 이재현은 다 좋은데 여름만 피해달라고 구시렁거렸다. 남반구의 찌는 듯한 더위는 상상만 해도 질색인지 잘생긴 얼굴을 마구 찌푸린 채로.
“이러다가 이주연 아주 지구 한 바퀴 돌아버리겠네.”
“엏, 그것도 좋은데?"
딱 얄밉지 않을 정도로 한 마디를 더한 반응에 도리어 반색했던 건 자신이었다. 이젠 정말로 당장 내일이라도 비행기에 올라 어디로든 떠날 수 있고, 그렇게 한들 이주연에게 뭐라 할 사람도 없을 텐데,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자 왜 여행이고 뭐고 속이 복잡하기만 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
- 당연한 거 아냐? 네 인생의 기반이 통째로 바뀌는 건데….
스스로도 정리가 어려웠던 속내를 듣고, 언제나 똑부러진 동료 최찬희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소속과 직업이 바뀌고, 이제까지완 달리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니 당연히 혼란스러운 것 아니겠냐고 짚어주는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긴 했으나 그래도 속 시원히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혼란스럽기보단 달갑지 않은 것에 가까웠으므로.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전화를 걸어주었던 동료와의 통화를 끝내고 주연은 깊게 생각에 잠겼다. 이 감정의 원인은 무엇 때문인 걸까. 그런 의문이 떠오르면 자연히 명상하듯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요즘에는 부쩍 그런 시간이 많아졌다. 그리고 시간은 길 때나, 짧을 때나 있었는데 주로 재현의 개입으로 끝이 나는 편이었고. 지금도 그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똑똑, 하고 들려온 작은 노크 소리가 상념을 깨트리더니 조심스러운 질문이 이어졌다.
"쭈연, 지금 밥 먹을 수 있겠어?"
함께 지내는 재현은 그런 주연의 시간을 최대한 존중해주었다. 예전에는 이렇게 방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자신이 심심하다며, 괜히 용건도 없었으면서 뭐하냐고 사람을 정신 사납게 들쑤셔 놓을 때도 있었건만 이제는 태도가 영 딴판으로 달라졌다.
"어엉."
주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머쓱해했다. 나 부르지…. 밥술은 함께 뜨는데 혼자만 준비하게 만든 게 민망해서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섰으나 그것마저 재현은 손사래를 쳤다.
"어차피 있는 거 데우기만 한 거야."
별로 힘들지도 않았어…. 하지만 그렇게 말한 것 치고는 2인용 테이블 위에 음식이 한가득 이었다. 미역국만 있었다면 생일상인가 착각할 정도로 가짓수가 많았던 반찬들 중에서도 가장 호화로웠던 건 중앙을 떡하니 차지한,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갈비찜이었다. 심지어 그건 이주연을 위해 이재현이 송도까지 찾아가 다급하게 공수해온 '엄마표 수제' 갈비찜이었고.
"많이 먹어. 고기 좀 덜어줄까?"
이주연은 이제 막 한술 떠서 밥을 우물거리고 있는데 이재현만 혼자 다급했다. 대꾸도 전에 먼저 실한 고깃덩이를 골라 앞접시에 덜어 내밀면 그걸 도로 물리라고 할 수도 없고, 이쪽은 그냥 고개를 꾸닥거릴 수밖에.
능력을 잃은 날 이후부터, 이재현은 이주연에게 뭘 못 먹여 안달이었다. 신체상으로는 별다른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고, 잘 챙겨 먹는 것으로 한 번 잃어버린 능력이 다시 돌아올 리도 없었을 텐데도 몹시 신경을 썼다.
현실적으로 도움은 안 되지만, 이런 세심함은 참 고맙다. 주연이 새삼 그런 마음을 되새기고 있을 때였다. 평온하던 식사 도중 별안간 이재현에게 연락이 들어왔다. 당직 가이드들만으로는 방금 막 임무를 마친 센티넬들의 회복이 더디니 잠깐 나와 손을 보태달라는 본부의 호출이었다.
“네? 저까지 가야 해요?”
이제껏 이재현은 당직과 별개로, 이런 비상 호출에서는 배제되는 편이었다. 워낙 동조율이 낮아, 다른 가이드들은 좀처럼 가이딩 할 수 없었던 센티넬 이주연을 전담 케어 하는 것으로 제 몫을 다 하고 있다고 상부에서 납득해준 덕에. 그러나 이제는 그 계산도 달라진 모양이었다.
“아니, 그치만요.”
자신에게까지는 상대방의 말이 들리지 않았지만, 주연은 충분히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이주연을 가이딩 할 일도 없으니까 다른 가이드들과의 형평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소리이겠거니. 그런 상황에선 아득바득 개겨봤자 결국 이재현만 손해였다.
“형, 일단 갔다와봐.”
이주연은 수저를 내려놓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때까지도 아니, 아니만 반복하던 이재현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난처함, 당혹감이 뒤섞인 얼굴을 향해 이주연은 다시 한 번 턱짓해주었다. 일어나라고.
*
그렇게 맞은편이 텅 비어버리자 갑자기 식욕이 뚝 떨어졌다. 마음이 달갑지 않던 이유도 그제야 명확해졌다.
앞으로는 이렇게 가이드 이재현을 독점할 수 없을 거라서. 이주연이라는 사람은 그대로지만, 더 이상 센티넬이 아니니까.
혼자 식탁을 정리하고, 설거지까지 마무리 한 다음 이주연은 이재현을 처음 만났던 날을 회상해보았다. 센티넬 3년차, 매일 마주해야하는 괴물들도, 어딘가 항상 나사가 빠져 있던 듯한 몸 상태에도 슬슬 익숙해지며 유독 낮은 동조율 탓에 가이딩 효율이 떨어져 담당으로 들어오는 가이드들마다 모두 앓는 소리를 해대는 것에도 신물이 날 때 쯤 이재현을 만났다.
“저 여기까지만 가이딩 받을게요.”
“아직 100% 아닌데요?”
“그거랑 상관없이 제가 받기 싫어요.”
“왜요?”
“…그냥 싫어요.”
어차피 안정도 수치를 100%로 만들기 어렵다면, 차라리 일상에 지장을 끼치지 않을 선까지만 유지해보자고 혼자 마음먹은 채, 그걸 잘 실천하고 있었는데 이재현은 다른 가이드들과 달리 끈질기게 이주연에게 달라붙었다. 아예 100% 상태를 만들 수 없다면 모를까, 할 수 있는데도 왜 하지 않느냐며.
거기에 이주연은 안정도 수치가 85% 이상이라면 센티넬은 자의로 가이딩을 거부할 수 있다는 고리짝 규칙까지 꺼내들며 따박따박 맞섰다. 둘 다 자존심은 겁나게 높아서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다가 미운 정도 정이라고 점차 속내를 털어놓게 되고, 주연의 이상한 고집이 랜덤하게 배정되는 가이드들에게 부담을 덜 주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고 나자 이재현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안해왔다. 그럼 자신에게만 가이딩 받으라고.
“요즘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랜덤으로 뺑뺑이 돌리는데.”
“없으면 만들어 달라고 하면 되지.”
전담, 내지 페어라는 개념이 무색해진 지금 뭔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건지 싶어 반문하자 이재현은 마치 진작 준비해두었던 것처럼 그런 대답을 했다. 모든 시스템은 저마다의 필요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 예외를 허가 받으려면 또 다른 필요를 입증하면 된다고.
아직 초임이라 그런지 저렇게 생각하는 건 군인이 아니라 꼭 회사원 같네. 이주연은 그렇게만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념겼지만 이재현은 말만 나불거리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해보였다.
먼저 적극적으로 상부에 어필한 끝에 처음에는 한시적으로 시작했던 전담, 이라는 관계는 1년, 2년이 지나서 올해엔 벌써 6년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또한 그동안 자연히 마음이 발전하여 둘의 관계를 다른 한 편으로는 연인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게 되었고.
거기에는 늘 가까이 붙어 지내야하는 환경이 많은 영향을 끼쳤으니, 이제 그것이 난데없이 달라진 이상 관계의 정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리라.
*
그리고 이주연은 더 이상 혼자 머리를 싸매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정리된 생각을 이재현에게도 털어놓았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들어오던 이재현은 그때까지 거실에 있던 이주연을 보고 무척 놀랐는데, 대뜸 난데없는 고백까지 듣게 되었다.
“형, 내가 요즘에 기분이 영 싱숭생숭했거든? 이제야 왜 그런지 알았어.”
능력을 잃은 것도 잃은 것이지만 결정적으로는 형과의 관계에 변화가 생긴 것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그걸 조리 있게는 아니고, 다소 두서없이 쫑알쫑알 늘어놓는 것을 이재현은 진지하게 들어주다 한 마디로 요약해냈다. 그러니까 결론은.
“결국 형이랑 이런 거 앞으로 못하게 될 까봐 걱정했다는 거네?”
“앟.”
난데없이 배를 손바닥으로 툭 짚더니, 손가락을 구부려 예민한 곳만 골라 간질이니 긴 몸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이주연이 결국 뒤로 벌러덩 넘어가, 거의 누운 자세가 되자 이재현은 기다렸다는 듯 상체를 바짝 붙여왔다.
“참 걱정도 사서 한다.”
서로 다른 박자의 고동이 겹치는 사이를 이재현의 속삭임이 파고들었다. 쪼그마한 머리로 뭘 그렇게 앞서 생각 하냐고. 그런 버릇은 좋지 않다며 가볍게 타박을 놓은 다음 이재현은 그런 걱정할 필요 하나도 없다고 중얼거렸다. 왜냐하면.
“나는 너 때문에 머리까지 길렀는데….”
“나 때문에?”
“어엉.”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에 대뜸 손을 턱 얹게 하고는 들려준 이야기가 예상 외였다. 이주연은 언제인지도 기억 안나는 예전, TV를 보다 대뜸 이런 식으로 머리를 기른 연예인을 보고 감탄한 것을 내내 마음에 두고 있다가 드디어 행동에 옮겨본 거라고.
“…몰랐어.”
“당연하지. 원래 더 기른 다음에 서프라이즈로 얘기해주려고 했는데…."
아쉽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며 웃는 이재현의 얼굴은 무척 행복해보였다. 그 웃음은 그동안 이재현이 시행한 어떤 가이딩보다도 확실하게 이주연의 상태를 끌어올렸다. 이주연은 한 박자 늦게 따라 웃으며 지척에서 복슬거리는 머리카락을 확 끌어안았다.
더 이상 수치로 환산될 일 없는 마음이 충만하게 넘쳐흘렀다.
(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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