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간 비가 왔다. 거의 잠시도 쉬지 않았다. 3층까지 물이 찼다. 바지를 허벅지까지 걷고 첨벙첨벙 물을 헤치고 가 고양이 한 마리를 겨우 구해냈다. 사실 죽게 내버려두는 게 얘한테는 더 좋은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주연은 아파트 옥상에 고양이를 데려다 놓고 통조림 한 캔을 따 앞에 내려놨다. 고양이는 젖은 털을 그루밍 하느라 주연이 뭘 하는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지구가 멸망했다. 딱히 놀랄 일도 아니었고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것까지는 아니었다. 주연은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비가 그쳐야 빨리 가볼 수 있을 테니까. 제가 생각한 것보다 더 오랫동안 비가 와서 사실 마음이 좀 초조해지는 중이었다. 몸뿐만 아니라 뼛속까지 다 젖은 기분이 들 때쯤에야 비가 그쳤다.
그리고 엄청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9층에서 살던 주연은 대강 배낭에 짐을 꾸려 18층으로 올라갔다.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지구멸망보고서
+ 23
네임 펜 하나를 집어 들어 벽에 숫자를 썼다. 1부터 빼곡하게 적힌 숫자가 23이 됐다. 8일간 비가 오더니 3일간 펑펑 눈이 왔다. 하루만 맑았고 다시 비가 내렸다. 또 눈이 왔다. 그걸 반복하다가 21일째 되던 날 드디어 맑아졌다.
혹시 곧바로 또 눈이나 비로 돌변할까봐 이틀을 더 기다렸다. 해는 쨍쨍했다. 오히려 삼일 째 해만 쨍쨍하니까 다 타버릴까 무서울 지경이었다. 주연은 머리 위로 올려뒀던 선글라스를 꼈다.
길 가에 주차된 차 하나에 올라탔다. 차 키가 다행히 꽂혀 있었다. 이런 행운은 어지간해서는 오지 않는 법이다.
녹은 눈으로 질퍽해진 회색빛의 거리는 휑했다. 꿈인지 실제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조용했다. 모두가 다 죽었다. 아니, 사실 죽었다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마치 증발해버린 것처럼 다 사라졌다. 주연의 계획대로.
벙커로는 차로 15분이 걸렸다. 길에 엉망으로 주차된 차들 때문에 절반까지만 차를 탔고 그 다음부터는 내려서 걸어야했다. 급한 마음 같아서는 차로 다 밀어버리고 싶었지만 물리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
행운책방의 간판은 떨어진지 오래였다. 늘 이정표처럼 삼았던 간판이 없어진 바람에 한참이나 이 근처에서 헤맸다. 주연이 자주 들러 커피를 마시던 1층의 카페 안도 엉망이었다. 물이 빠진 길바닥에 깨진 컵이 돌아다녔다. 주연은 행운책방이 있는 건물 귀퉁이의 벽돌을 발로 밀었다. 안 쪽으로 향하는 계단이 드러났다.
주연은 5분이 넘게 계단을 내려갔다. 단단한 철문은 여간해서는 열 수 없게 되어있었다. 그런 철문을 총 7개 더 열었다. 그러고 나서야 지하 벙커가 드러났다. 주연은 그 곳에 무언가를 숨겨 놨다. 그 무언가는 주연이 지구에 와서 유일하게 사랑한 거였다.
"형."
"....."
"저 왔어요."
주연은 배낭을 내려놓고 철문을 닫았다. 너무 지쳐서 눈이 뻑뻑했다. 재현은 주연이 벙커를 나가던 그 날과 마찬가지로 침대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재현의 혼자 힘으로는 이 벙커 문을 절대 열 수 없었을 거다. 그걸 알면서도 왠지 불안해 벙커 안 화장실만 겨우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정도의 길이로 재현의 손목을 침대에 묶어뒀다.
이주연의 지구멸망프로젝트에서 이재현은 유일하게 이주연이 살려낸 생명이었다.
주연이 이상한 애라는 것 정도는 재현도 알았다. 사귀고 처음 맞이한 생일에서 소원 빌고 촛불 끄라는 말에 주연은 제 소원으로 지구가 멸망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평소 하는 짓으로 봐서는 형이랑 오래오래 행복하게 해주세요, 같은 깜찍한 소원을 빌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입 밖으로 튀어나온 소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주연은 타노스가 손가락을 맞부딪쳐 모두 사라진 것처럼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될 거라고 했다. (재현은 그 영화 보여준 걸 좀 후회했다.) 대체 어디서 온 자신감인지 알 수 없었지만 웃음기 하나 없이 하는 말이 어쩐지 좀 섬뜩했다.
"그래도 형은 살려줄게요."
케이크에 유일하게 하나 있는 딸기를 주연에게 양보하자 아무 말 없이 생크림만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주연이 한참 후에 덧붙였다. 나만 살려준다고? 재현이 되묻자 주연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동이네..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재현은 생일 선물로 준비한 운동화를 건넸다. 짜잔. 주연은 웃었다.
그 때 그 운동화를 여전히 신고 있는 주연을 따라 벙커에서 나왔을 때 재현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지구가 멸망했어요. 주연은 잔뜩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덧붙인 세 글자에 재현이 휙 고개를 틀어 주연을 바라봤다.
"..너 미쳤어?"
"아뇨."
주연이 손목에 차고 있던 아대를 벗었다. 사귈 때에도 주연은 왼쪽 손목에 찬 아대를 벗지 않았다. 형, 제가 여기 좀 보여주고 싶지 않은 흉터가 있어서요. 키스하다 손목을 더듬자 주연이 흠칫 놀라며 그랬다. 재현은 주연의 상처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절대 궁금해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너무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딱히 거슬리지도 않았지만 한 번씩 볼 때마다 궁금하기는 했다. 지구가 멸망하고 나서야 주연은 그 아대를 벗는다.
"....."
주연이 익숙하게 손목 안 쪽을 열었다. 드러난 쇠로 된 작은 덮개를 마저 연다. 34% 형광 초록색 불빛이 반짝였다.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재현이 무언가 물으려는데 주연이 고개를 푹 숙였다.
"..형, 잠시만.."
"....."
30퍼센트 미만으로 내려가면 이대로 기절할 수도 있었다. 잠시 재현의 팔을 쥔 채 어지러움을 견뎌내던 주연은 이내 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 편의점 안을 거침없이 활보하더니 이내 건전지 코너에서 멈췄다. 가게를 털듯이 가지고 나온 건전지를 전부 배낭에 넣었다.
아예 없는 것보다는 그래도 건전지로 충전이라도 하는 편이 나았다. 재현은 편의점 앞 파라솔 의자에 앉은 채, 건전지를 먹는 주연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 다음으로 더 놀랄 게 남았는지 물으려다 말았다.
재현은... 5년을 만난 이주연이 누군지 여전히 모르겠다.
인간은 부모에게서 태어난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주연은 태어난 게 아니었다. 어느 비밀 연구소에서 만들어졌다. 그 연구소는 벙커처럼 아주 깊은 곳에 있었다. 그것도 행운책방 벙커처럼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되는 게 아니라 배를 타고 가야 하는 바다 깊숙한 곳에 있었다.
그 곳에서 끊임없이 안드로이드들이 만들어졌다. 평소에는 인간인 척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면서 동시에 지하 벙커에서 훈련받은 안드로이드들은 주로 다른 행성을 탐험하는 데 이용됐다. 21세기에 더 이상 우주선에 원숭이나 개를 태우는 야만적인 짓은 할 수 없었으니까.
안드로이드들은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다. 그 곳에서 죽었을 수도 아니면 다시 돌아오지 못했을 뿐 살아있을 지도 모른다. 허나 확실한 건 인간들은 쉽게 안드로이드를 버렸다. 만들 때는 그렇게 사랑한다더니 우주선에 태워 보낼 땐 짐짝을 버리는 듯 굴었다.
지구를 죽여 놓고 다른 또 다른 죽일 행성을 찾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주연 역시도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안드로이드 중 하나였다. 박사님은 이 프로젝트의 주인공이 되라는 의미로 주연이라고 이름을 붙여줬다. 주연은 박사님이 만든 300번째 안드로이드였는데 박사님은 주연을 끝으로 더 이상의 안드로이드를 만들지 않았다. 다른 행성을 탐험하는 인간들의 프로젝트는 실패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돌아오는 안드로이드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발밑으로 아득해지는 지구는 너무 작았다. 주연은 착륙하자마자 모든 안드로이드들이 죽을 정도로 끔찍한 행성의 모습을 상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지구와 거의 흡사한 모습이었다. 또 하나, 안드로이드들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그것도 수천 개나.
전쟁을 준비한다고 했다. 일부러 통신을 끊어 돌아올 수 없는 척 해 더 많은 안드로이드들을 행성으로 보내게 하려는 거라고 했다. 주연이 갔을 땐 이미 수천 개의 안드로이드들이 행성에 이미 자리를 잡은 뒤였다.
안드로이드들은 지구의 멸망 일을 알고 있었다. 주연은 지구로 되돌아가 멸망의 목격자가 될 안드로이드에 자원했다. 지구의 멸망을 두 눈으로 보고 싶어서는 아니었고, 구해야 할 사람이 있었다. 물론 이건 주연 혼자만 아는 비밀이었다. 그래서 주연은 지구로 돌아왔다. 인간들 몰래.
다시 비가 내렸다. 주연과 재현은 벙커 안으로 돌아갔다. 배터리는 87퍼센트. 당장의 충전은 마쳤지만 건전지를 구하러 또 나가야 할 것 같았다.
주연은 저와 조금 떨어진 바닥에 무릎을 모으고 앉은 재현을 힐끔 바라봤다. 제 딴에는 열심히 설명한다고 했는데 재현이 전부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형을 사랑해서 그랬어요. 그 말이 면죄부가 될 수 있을지 역시도 여전히 확신하지 못하겠다.
습도가 높으면 녹이 슬어버릴 수도 있었다. 발이 묶여있던 15층짜리 아파트보다는 벙커가 더 안전하긴 하겠지만. 주연은 문득 제가 살려놓은 고양이가 잘 살아있나 궁금했다.
"그래서 이제 계획이 뭔데."
재현은 이틀 내내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앞에 내려놓은 통조림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삼일 째 되는 날 무슨 생각인지 주연이 주는 걸 먹었다. 그러더니 계획을 물었다.
"형이랑 오래 오래 행복한 거요."
"어떻게."
"다들 저를 데리러 올 거에요."
"....."
확신이 없어 말을 얼버무렸다. 안드로이드들이 돌아오는 것에 대해 확신이 없는 게 아니라 주연이 재현을 살려두게 내버려둘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갑자기 풀이 죽어있는 걸 보니 화가 났던 마음이 이상하게 녹았다. 재현은 주연이 불쌍했다.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제 자신을 더 불쌍하게 여겨야 할 텐데도. 재현이 주연의 손을 당겼다. 입술이 닿았다. 조금 전에도 건전지를 세 개나 먹은 주연의 혀에서는 쇠 맛이 났다.
충전을 하지 못해 휴대폰이 드디어 꺼졌다. 어차피 아무것도 되지 않아 꺼져있나 켜져있나 똑같긴 했는데 시계를 볼 수 없으니 좀 답답했다. 벙커 위로 나갔다가 돌아온 주연이 계단에 선 채 재현에게 손을 흔들었다. 형, 비 그쳤어요.
아무래도 안드로이드보다는 인간의 몸이 자연에 더 취약하니 앞으로도 쭉 날씨는 제가 확인하겠다고 했다. 재현은 대답할 기운이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오늘 둘이 해야 하는 건 재현이 먹을 음식, 주연이 먹을 건전지를 구하러 가는 것. 행운책방 옆에 있는 편의점은 이미 남은 거 하나 없이 싹 다 털어먹은 뒤였다.
"....심봤다."
주연은 홈플러스 앞에서 멈춰 섰다. 언뜻 얼굴 위로 웃음이 번진 것 같기도 했다. 둘은 카트 네 개에 필요한 걸 꽉 꽉 채웠다. 재현이 주연을 위해 건전지 코너에 있는 모든 건전지를 다 카트에 싣다 고개를 들었을 때 주연은 재현이 입을 패딩 두 개를 양 팔에 걸친 채였다.
"하나는 너꺼야?"
"저는 추위를 안 타요."
"두 개 다 내꺼?"
"네. 또 눈 올지도 몰라요."
계속해서 벙커에 있을 수는 없었다. 안드로이드들이 왔다가 주연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면 안 되니까. 주연은 내내 제가 있는 좌표를 전송하는 중이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신호가 왔다. 주연은 카트 속으로 손을 넣어 건전지를 하나 꺼내 먹었다. 77이었던 숫자가 85로 올라갔다.
"건전지 더 있나 보고 올게요."
주연은 작동이 정지된 에스컬레이터를 올라 3층으로 향했다. 쓸 만한 물건이 더 있나 보려는 거였다. 전부 다 가져올 수는 없으니 일단 당장에 쓸 담요와 재현이 먹을 에너지 바를 왕창 챙겼다. 그걸 들고 다시 에스컬레이터로 향하다 힐끔 아래를 내려다봤다. 카트 옆에 재현에 없었다. 주연은 손에 들고 있던 걸 모조리 다 떨어뜨렸다.
"형.."
주연은 뛰기 시작했다. 줄지어 세워진 카트를 아무렇게나 밀치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형. 부르고 싶은데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8일간 비가 왔을 때보다 더 절망적인 심정이었다. 다시 카트가 있던 곳으로 가보려던 주연은 계산대 옆에 서있는 재현을 발견하고 멈춰섰다.
"....."
"...거기서 뭐해요?"
"라이터 찾아."
담배 두 보루를 손에 든 재현이 머쓱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패딩을 가져온 게 무색하게 밖은 땡볕이었다. 에어컨을 틀지 않은 차 안은 찜통이었다. 조수석에 앉아 연거푸 담배를 두 대나 태운 재현은 손부채질을 했다. 주연아, 나 더워. 더위와 추위 둘 다 느끼지 않는 주연은 조금만 참아요, 했다. 참는다고 뭐가 달라질 것도 아니면서.
차가 기름이 떨어져 멈췄다. 차에서 내려 길에 주차된 차들을 살폈지만 차 키가 보이지 않았다. 꼼짝없이 발이 묶이게 생겼다. 둘은 바로 옆에 있는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도어락을 뜯어내자 윙윙거리는 경보음이 들렸다. 울려봤자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뭔가 좀 무서워서 재현은 냅다 건전지를 빼 바닥에 던졌다. 그걸 왜 던져요. 주연이 얼른 그걸 소중하게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도어락이 뜯겨 크게 난 구멍 안으로 손을 넣어 이중걸쇠를 풀었다.
누군가 혼자 살던 집인 듯 보였다. 현관에 신발도 한 개, 칫솔도 한 개, 침대 위에 벗어둔 잠옷도 한 개. 둘은 나란히 그 침대에 누웠다. 날씨 때문에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할 것을 대비해 주연은 주머니에 넣었던 건전지를 먹지 않고 협탁 위에 올려뒀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잠결에도 재현이 제 등을 껴안는 게 느껴졌다.
"주연아."
"....."
"나 무서워."
그건 주연도 마찬가지였다.
5일 째, 신호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잠에서 깼을 때 재현은 창문을 열어두고 창틀에 양 팔꿈치를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속옷 한 장만 달랑 입은 채였다. 씻었는지 머리카락이 젖어있었다. 현관 입구에 아까 마트에서 가져온 짐들의 절반 정도가 옮겨져 있었다.
"나 깨우지.."
현관 앞에 산처럼 쌓여있는 건전지를 확인하고 주연은 협탁 위에 아까 올려둔 걸 먹었다. 배터리는 41이 됐다. 여전히 신호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이 곳이 벙커와는 약간 거리가 있어 주연은 다시 좌표를 전송했다.
"주연. 생각해보니까."
"네?"
"나도 지구가 멸망하길 바랐던 것 같음."
학교 가기 싫을 때, 회사 가기 싫을 때, 발표하기 싫을 때, 미팅 나가기 싫을 때, 월요일 아침일 때 등등. 재현 역시도 숱한 순간 지구가 멸망하기를 바란 것 같다. 그 말을 하자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오며 주연은 어깨를 으쓱했다.
"고맙다고."
"....."
"....."
창틀에 아무렇게나 꽁초를 눌러 끄고 재현은 짐들을 뒤적거린다. 뭘 좀 먹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쭈그려 앉아서 건전지들 틈으로 손을 넣는데 등 뒤에서 주연이 살그머니 재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
"제가 형은 꼭 살릴게요.."
주연은 무서웠다. 재현에게 터놓고 말할 수 없었지만 안드로이드들이 저를 버린 것 같아서 무서웠다. 신호는 되돌아오지 않고 있었고 주연은 그들이 데리러 오지 않는 이상 갈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었다. 재현은 제 배에 둘러진 주연의 손을 잡아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같이 살자."
주연에게 하는 말이기도 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짐을 옮겨놓은 게 다행이었다. 곧바로 비가 쏟아졌다. 1층이 아니라 5층에 있는 방으로 들어온 것 역시도 썩 잘한 일이었다. 작동되지 않는 냉장고 안에서는 음식 썩은 냄새가 났다. 그래서 둘은 결국 옆방으로 방을 옮겼다. 이렇게 계속 방을 옮겨다녀봤자 소용이 없을 테지만.
옆방은 침대가 없긴 했지만 다행히도 냉장고 안에 맥주 몇 캔뿐이었다. 밍밍한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재현은 웩 했다. 하지만 이거라도 있어서 좋긴 했다.
"..약간..조난 캠프 온 것 같아."
밤이 되면 불이 모두 꺼져 한치 앞을 보기가 어려웠다. 재현이 허공을 더듬거려 제 옆에 앉아있는 주연의 손을 잡았다. 무서워. 괜히 장난스럽게 말하며 몸을 붙였다. 주연은 대꾸 없이 건전지를 까먹는 중이었다.
"여수 바다로 가면요.."
"응."
"통신기가 있어요."
"....."
"....."
"우리 거기까지 못 가. 알잖아."
차를 타고 갈 수 있을 지도 미지수다. 혹시라도 장애물로 길이 막혀있기라도 하면 다른 길을 찾아낼 수 없을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그 말에 주연이 잡고 있던 손을 홱 놨다.
"일주일 째 신호가 안 와요."
"....."
"가야돼요."
주연은 울기 시작했다. 재현은 훌쩍이는 소리를 들으며 주연을 제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왜 데리러 올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주연은 우주선에 탑승하기 전 박사님이 제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에게 네가 특별한 이유는 너에겐 심장이 있기 때문이야.
정말 그 '심장' 이 있다는 뜻은 아니었고 다만 마음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주연은 미련하게도 재현을 사랑했고, 안드로이드들을 믿었으며, 재현을 구하러 다시 지구로 되돌아왔다.
재현을 주연을 달래는 방법을 알았다.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다. 언제였더라, 한참 사귀던 도중에 주연이 갑자기 사라진 적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사라지기 전 날 별안간 재현의 집에 말없이 찾아와서는 너무 사랑한다고 했었다. 은근히 쑥스러움 많이 타서 그런 얘기 잘 못 하면서도 그 날 그런 얘기를 하고 집에 간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다음 날 일정이 끝나자마자 연락을 했지만 주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살던 집도 텅 비어있었다. 주연이 다시 나타난 건 20일 쯤 지난 후였다. (그 20일 사이 주연은 인간들의 프로젝트에 이용돼 행성에 다녀온 참이었다.) 어디 다녀왔냐는 말에 주연은 혼자 생각 정리를 좀 하고 왔다고 했다. 그러더니 울었다. 지금처럼.
그 때부터 계획하고 있었구나...
재현은 느리게 주연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고 그 때 그랬던 것처럼 입 맞췄다. 여전히 주연의 입 안에서는 비릿한 쇠 맛이 났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렇지 않았다. 가까이 붙은 주연의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재현은 괜찮다는 듯 주연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어루만졌다.
86일 째.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다.
한차례 폭풍우가 지나간 거리는 엉망진창이었다. 나무들이 쓰러진 건 물론이고 길이 엉망이라 도저히 차를 끌고 나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가야 하는 건 건전지가 바닥이 났다.
습도가 높아 기계 자체에 말썽이 빈번해지니 배터리 닳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주연은 처음보다 거의 두 배 가까이의 건전지를 먹어치워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자랐다. 여수에 있는 통신기에 가면 충전할 수 있어요. 그러면서 주연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지구가 멸망해도 태양빛이 있는 한 계속해서 충전은 가능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여수에 가는 걸 반대했지만 이제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재현은 말없이 배낭을 챙겼다. 에너지 바와 물 몇 개를 챙기고 남은 부분에는 모조리 건전지를 넣었다. 주연은 재현이 두고 나온 패딩을 가지고 나왔다. 걷기 전 재현은 주연의 운동화 끈을 꽉 묶어줬다.
주연은 계속해서 건전지를 먹으며 걸었다. 배터리가 닳아지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서울을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50 아래로 내려갔다. 주연의 손목을 내내 붙잡고 있던 재현이 결국 먼저 걸음을 멈춰 섰다.
"안되겠다, 차 타자."
좀 돌아가더라도 그 쪽이 나을 것 같았다. 고집 부릴 줄 알았던 주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 키가 꽂혀있는 건 어느 카센타 앞에 삐딱하게 세워져있는 낡은 트럭 한 대였다. 주연은 조수석에 앉자마자 잠이 들었다. 배터리를 생각하면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주연은 거의 깨지 않고 잠만 잤다. 재현은 에너지 바를 아껴 먹었고 가다가 중간 중간 편의점이 보이면 지체 없이 멈춰서 건전지와 음식을 실었다. 중간에 한 번 기름이 떨어져 차를 바꿔 탔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대략 이틀을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네비게이션이 없어 맞는 길로 가고 있는지 파악이 잘 안됐다. 여수가 52km 남았다는 이정표를 본 게 조금 전이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재현은 차를 멈춰 세웠다. 재현과 주연이 소리를 내지 않으면 이 세상이 너무 고요했다. 그게 두려웠다. 정말로 둘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게 여실히 실감이 나서 그랬다.
"..형.."
"응."
재현이 손을 뻗어 주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힐끔 내려다본 손목의 숫자는 15. 이렇게까지 많이 떨어진 적이 없었다. 재현이 주연의 발치에 내려놓은 배낭을 더듬었다. 건전지는 숫자를 셀 수 있을 정도로만 남아 있었다. 재현 역시도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재현은 주연의 입에 건전지를 하나 넣었다. 입술만 겨우 열어 받아먹으면서도 주연은 눈이 마주치자 웃었다.
"형 그 때 기억나요?"
"언제?"
"저희 처음으로 데이트 한 날이요..."
주연의 말이 점점 느려졌다. 재현은 기억나지, 하고 답했다.
"그 때.. 딸기 스무디 먹는 거 보고 형 귀엽다고 생각했어요."
"그랬어?"
"네.."
"....."
"그리고 저.. 형이 일부러 가위바위보 져준 것도 알아요.."
"....."
"저는.. 프로그래밍 됐거든요.. 그래서 가위바위보 순서가 맨날 같아요.."
"알겠어, 말 그만해."
재현은 기름을 아끼려 꺼놨던 시동을 다시 걸었다. 여수가 코앞이었다. 배낭을 거꾸로 엎어 건전지를 모두 쏟아냈다. 붉은색으로 위험하게 깜빡이던 숫자들이 건전지를 세 개 연거푸 먹자 30으로 올랐다.
잠이 든 주연을 확인하고 다시 차를 몰았다. 그러면서 재현은 소리 없이 울었다. 무서웠다. 주연이 없이 혼자 남겨질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통신기. 통신기. 재현이 엑셀을 밟았다. 재현이 배낭 앞주머니에 있는 껌을 꺼냈다. 졸음을 쫓으려는 거였다.
재현은 아침이 올 때까지 운전을 했다. 길을 잘못 들어 도로 빠져나오기 일쑤였다. 맞는 길로 갔더라도 막혀있으면 내려서 길을 치워야했다. 그러느라고 속도가 더뎠다.
여수의 거리도 서울의 거리와 풍경은 비슷했다. 고요한 도시를 낡은 트럭이 덜덜 소리를 내며 달렸다. 나머지 건전지를 모두 먹여 주연의 배터리는 40까지 차있었다. 서울에서 출발하고 처음으로 주연은 정신이 멀쩡한 얼굴을 하고서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연이 기억하는 통신기 위치는 바닷가였다. <연구소> 라는 간판은 비록 90도로 꺾여있긴 했지만 아직 멀쩡히 붙어있긴 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둘은 짐을 두고 차에서 내렸다. 연구소 안으로 들어간 주연이 로비의 바닥 타일 중 하나를 뜯어냈다. 그 안에 밑으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었다.
"....."
"....."
주연이 기억하는 벙커의 마지막 모습은 통신기 네 대가 줄지어 세워져 있고 그 옆으로 침대가 네 개 놓여있는 모습이었다. 인간들과 주로 섞여 가는 안드로이드들은 건전지를 먹는 이상한 짓을 하는 대신 이 안으로 들어와 충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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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없다. 흔적도 없이 네 개의 통신기가 모조리 뽑혀 나가있었다. 주연은 바보처럼 아, 하고 중얼거렸다.
안드로이드들은 주연을 이 곳에 버린 게 맞았다. 그건 아마 인간을 사랑한 벌일 거다.
다시 눈 폭풍이 시작됐다. 연구소에서 찾아낸 건전지들로 주연은 겨우 버티는 중이었다. 다행히 연구소 안에는 재현이 먹을 만한 것들은 꽤 많았다. 텅 비어버린 지하 벙커에서 둘은 서로의 몸에 기댄 채 앉아있었다.
그러다 주연이 잠이 들었다. 재현은 배낭을 주연의 머리 아래에 받쳐주곤 몸을 일으켰다. 구석에 내팽개쳐진 패딩을 주워 입었다. 주연의 머리맡에 건전지를 놓아두고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허리띠를 풀어 주연의 손목과 기둥에 묶었다. 주연이 저를 벙커에 묶어두고 갔던 것처럼.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가만히 입을 맞췄다. 사랑해. 그 말은 처음해주는 것 같았다. 주연은 눈 뜨지 않았다. 재현은 입지 않고 내려놓은 패딩을 주연의 몸 위로 덮어줬다. 추위를 타지 않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덮어주고 싶었다.
재현은 건전지를 구해야했다. 그래서 주연을 살려야했다. 주연이 저를 구하러 지구로 다시 되돌아온 것처럼, 재현은 주연을 구하기 위해 눈 폭풍을 헤치고 나가야 했다.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온 몸으로 쏟아졌다. 재현은 어둠 속으로 걸었다.
언제 끝날지 모를 이 여행의 끝에 주연이 함께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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