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연은 사는 동안 한 번 한국에 왔다. 그건 이재현이 지금까지 이주연을 한 번 만났다는 얘기와 같다.
올해는 재현이 스물일곱 살이 되는 해고 스물여섯이 된 주연이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하는 해다. 정확히는 세 번째이긴 했다. 주연은 한국에서 태어났으므로. 하지만 첫 번째 한국은 그의 기억 속에 없다. 주연의 기억은 미국에서부터 시작된다. 마당의 강아지에게 쫓겼던 기억. 크게 울음을 터트린 자신을 어쩔 줄 모르고 안아주던 양부모님의 기억이 주연의 첫 번째 기억이다. 그래서 존재하지도 않는 첫 번째 한국의 기억을 주연은 없었던 셈 친다.
올해는 재현이 스물일곱 살이 되는 해이고 스물여섯이 된 주연이 두 번째로 한국에 오는 해이며 푸에트리코의 아레시보 망원경이 무너진 다음 해이다. 지난 12월, 주연으로부터 갑작스러운 한국행을 통보받았을 때 재현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메일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했다. [아레시보 망원경이 무너졌네. 서울에 가면 만날 수 있어? 형이 촬영 스케줄만 없다면 말이야.] 아레시 뭐? 재현은 네이버 검색을 이용해 주연의 암호 같은 메일을 해석해보고자 했다. 이틀 전 올라온 과학신문의 기사를 통해 아레시보 망원경이 무엇인지 대강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당최 이 망원경의 붕괴가 주연의 한국행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평생을 미국에서 산 것 치고 주연은 한국어를 제법 잘 구사했으므로 재현이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 메일은 몇 번이고 다시 읽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주연이 보낸 단 두 줄의 메일에 재현은 그저 더 짧은 답장을 보냈다. [그래 주연 표 사면 연락해ㅋㅋ 서울에서 보자]
그동안 주연은 좀처럼 한국에 올 것 같지 않을 것처럼 굴었다. 그것이 싫거나 섭섭했던 것은 조금도 아니고 단지 재현은 주연이 다시 한국에 온다면 아마 엄청나게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 하고 짐작했다. 애초에 주연은 그 이유 때문에 한국에 왔으니까. 우리도 그래서 만나게 됐으니까. 그 정도의 중요한 일이 아니고선 다시 한국에서 보기 힘들 거라 생각했는데, 도대체가 아레시보라니. 서울과 부산도 아니고 LA와 한국이었다. 태평양을 건널 까닭치고는 뜬금없는 이유였다. 혹시 지난 메일 속에 힌트가 있지 않을까? 한가득 쌓인 광고와 스팸메일을 휴지통으로 날리며 그간 받았던 주연의 메일을 살폈다. 8년 치 메일의 양은 적지 않았다. 그 속의 주연은 대체로 평온한 어조로 일상을 전하고 있었다. 가끔은 사진을 첨부하기도 했는데 본인의 모습 대신 미주 여기저기의 풍경을 담은 사진들이었다. [오늘은 그리피스 천문대에 다녀왔어.] LA에 살면서 이 유명한 관광지를 처음 와본다고 주연은 말했다. 과연 사진 속엔 사람들이 가득이어서 저 인파 속에 있었을 주연의 표정이 그려지는 듯했다. 끝이 먹혀 들어가는 웃음 소리로 난감하다는 듯 웃었겠지. 몇 번 듣지도 못한 주연의 웃음 소리를, 재현은 당연하게도, 즉각적으로 기억해냈다. 그렇게 메일을 읽어 내려가자 저 문단 끝에 아레시보가 있었다.
[언젠가 푸에트리코에 가면 아레시보 망원경도 볼 수 있겠지.] 9년동안 주연이 아레시보 망원경을 언급한 적은 단 한 번이었다. 그동안 주연의 메일 대부분을 읽고 또 읽었던 재현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사소한 언급이었다. 그래서 재현은 네이버를 통해 얻은 정보를 단단히 외워 두기로 했다. 주연이 오는 그날까지.
'반 세기 동안 지구에서 가장 큰 크기였던 전파 망원경이며 우주 어딘가에 있을 외계인에게 접촉의 의지를 담아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누군가 툭 치면 자동으로 나올 정도로 이 문장을 반복해서 외웠던 재현은 드디어 오늘 주연과 만난다.
[두 시에 시청역 어때?]
[좋아]
이건 그들의 두 번째 만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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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은 서울은 몹시 추웠다. 재현은 LA의 온난한 기후로부터 날아온 주연이 혹시나 얇은 옷을 입고 떨며 나타나진 않을까 생각했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들어온 카페에서 핫초코를 시키며 주연에게 춥다고 메시지를 보내야 하나 고민하다 금세 접었다. 어련히 알아서 하지 않을까 싶었다. 잠시 후 요란히 울리는 진동벨을 들고 카운터에 가 핫초코를 받아 왔다. 직원이 재현의 얼굴을 살피다 혹시, 하고 말을 걸었다. 재현은 작게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카페 문이 다시 한번 열렸다. 거기에 주연이 있었다. 겨울 공기를 한가득 몰고서. 다행히도 따뜻한 옷차림이었다. 재현은 챙기지도 않은 머플러까지 두른 채였다.
“어, 주연.”
약 8년 만에 만난 주연은 조금 더 몸이 커졌고,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빛이었고, 감탄스러울만큼 잘생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형, 하고 안아오는 몸에서 향수 냄새가 났다. 커피를 시키고 오겠다며 걸어가는 뒷모습을 재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결 좋은 어두운 색의 코트가 맞춘 듯 잘 어울렸다. 생각 없이 입었던 패딩 점퍼가 민망해질 만큼 신경 쓴 차림새였다. 정말이지 스물여섯의 이주연은 세상 그 누구에게도 호감을 살만한 이십대 후반의 남자처럼 보였다.
“서울은 진짜 춥다.”
실제 그러하기도 했다. 주연을 보고 호감을 가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이 카페 안의 사람들 누구를 붙잡고 물어도 같은 대답이 나올 것이다. 재현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핫초코 위 휘핑크림을 내려다봤다. 재현과 달리 주연은 홀짝홀짝 커피를 잘도 마셨다. 머그잔을 든 손이 컸다. 커피를 좋아하는 이주연. 이 사실 역시 메일에서 수십 번 들었으므로 재현에겐 새삼스럽지 않다.
“엉. 그래도 따뜻하게 입고 나와서 다행이네.”
재현의 말에 머플러를 벗어 옆자리에 걸어둔 주연이 웃었다. 마치 평생 웃었던 사람처럼 유연한 입꼬리였다.
“잘 지냈어?”
“뭐, 내가 메일로 얘기했던 거랑 똑같지.”
처음 알게 된 이후 그들은 줄곧 메일로 연락을 나눴다. 다른 메신저들을 두고 메일을 고른 건 그때의 주연이 처음 알려줬던 연락처가 이메일 주소였기 때문이다. 편지처럼 길 때도 있고 엽서보다 짧을 때도 있던 메일들은 생각보다 긴 시간 동안 오갔다. 그렇게 8년이 지났다. 이렇게 오래도록 우리가 메일을 나눌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재현은 생각했다. 재현이 이젠 쓰지도 않는 옛 메일 주소를 유지하며 연락을 이어 나간 까닭은 단순하고 분명했다. 그게 주연과 닿을 수 있는 유일한 연결고리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연은.
재현의 눈앞에는 더 이상 열여덟 살이 아닌 스물여섯 살의 이주연이 있다. 근사한 어른이 된. 눈동자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반짝임이 온몸을 뒤덮은. 재현은 모른 척 다시 한번 그를 훑었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한 주연은 입을 열었다. 일주일간 한국에 머물 계획이라고 했다. 그래서, 오늘은 뭘 할 거야? 재현이 물었다. 주연이 빙그레 웃었다. 형이 가이드 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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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2호선은 순환한다며.
열아홉의 이재현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미국인 남자애와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까 고민했다. 그 애의 뜬금없는 호기심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순환, 이라는 단어를 어색하게 한 번 더 발음한 주연은 다시 물어왔다. 순환 맞지? 계속 도는 거.
그 애는 아닌 게 아니라 정말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재현의 어머니가 다니는 교회와 결연을 맺은 한인교회가 주연을 이곳까지 오게 했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한인 부부에게 입양되어 한국에서의 기억이 전혀 없다는 그 애는 신기하게도 한국어를 잘했다. 가이드 역할은 자연스럽게 재현에게 돌아갔다. 고등학교 자퇴 후 쭉 시간이 남아돌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재현의 엄마는 둘이 친구가 된다면 재현도 교회에 정이 붙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고등학교도 싫어서 그만둔 재현이 교회에 소속감을 느낄 리 없었다. 한국어를 자신만큼이나 잘 구사했지만 분명 낯선 미국인 남자애도 불편하고 귀찮았다. 그래도. 계절이 바뀌기도 전에 떠날 사람에게 애써 모질게 굴고 싶지 않았다.
적당히만 잘해주고 보내자, 라는 것이 재현의 기본 태도였다. 너무 귀찮게 하지만 않는다면 재현도 잘 대해줄 의향이 있었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데려다주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여주고. 그런데 이 남자애는 도통 가고 싶은 곳도 먹고 싶은 것도 없는 것 같았다. 애초에 한국까지 왜 온 걸까 싶을 만큼 이 땅에 흥미가 없어 보였다. 재현의 엄마와 교회 어른들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했으나 적극적이진 않았고 한국어를 놀라울 만큼 잘 구사했지만 필요한 말이 아니면 도통 입을 열지 않았다.
장마가 막 지난 한국의 여름은 살인적이다 싶을 정도로 습했고 LA의 뽀송한 햇빛 아래 살던 이방인은 영 맥을 못 추고 시들어갔다. 그래도 집에만 있을 수는 없었으니 일단 데리고 나온 카페에서 재현은 아이스초코 두 잔을 시켜 쪽쪽 빨았다. 덥다. 귀찮다. 지루하다. 재현은 밀려오는 따분함을 빨대와 함께 꾹꾹 눌러 담았다. 가보고 싶은 곳 정말 없어? 묻자 론리플래닛 가이드북을 조용히 넘기던 주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마주쳤다. 재현의 몹시도 따분한 얼굴과.
2호선을 타보고 싶은데. 탈 수 있을까?
2호선을? 목적지도 없으면서? 황당함에 물었지만 주연은 순환, 이라고 또 중얼거릴 뿐이었다. 읽고 또 읽던 론리플래닛 서울 가이드북에 2호선과 관련한 내용이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저 2호선을 타는 게 관광이 될 것 같진 않은데.
혹시 내가 화난 것 같아서 아무 데나 말했던 건가? 재현은 자신의 뒤만 따라오는 주연을 다분히 의식하며 생각했다. 결국 2호선을 타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강남역까지 왔다. 지하상가의 인파는 엄청났다. 답답했지만 야구모자를 더 깊게 눌러썼다. 워낙 정신이 없다 보니 행인들과 어깨가 쉴새 없이 치였다. 아, 정말 싫다.
여기 잡아.
어?
너 잃어버리면 나 엄마한테 죽을걸.
가본 적 없으니 모르긴 몰라도 LA의 인구밀도는 이곳보단 적을 것이다. 주연은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고 놀란 것 같았다. 이 정도의 인파는 처음이겠지. 저러다 날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전화번호도 없는 외국인 미아를 찾아 서울을 헤매고 싶진 않았다. 재현은 주연의 얼빠진 손을 잡아끌어다 자신의 티셔츠 옆구리를 단단히 쥐게 했다. 이거 놓치지 마. 주연은 그걸 동아줄이라도 되는 듯이 꽉 붙잡았다. 티셔츠의 늘어난 옆구리쯤이야 주연을 잃어버리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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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식당 아무 곳이나 들어간 게 쌈밥집이었다. 뭔가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아쉽지 않을까 싶었지만 주연은 물론이고 재현 역시 별로 아는 곳이 없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좌식 구조를 보고 주연은 오, 하는 소리를 냈다. 재현은 주연이 분방하게 벗어둔 단화를 자신의 운동화와 나란히 정리해 뒀다. 주연의 단화는 재현의 운동화보다 사이즈가 조금 컸다. 이주연이 원래 나보다 발이 컸었나? 아님 자란 건가? 나보다 키가 컸으니 발이 큰 건 당연한가? 그런 것을 가늠하다 이걸 그냥 숨겨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재현과 달리 주연은 깔끔하게 자신의 몫을 비웠다. 난 한국 음식이 좋아. 주연은 언젠가 메일에서 말한 적이 있었다. 열여덟의 주연은 한국에 머무는 내내 재현의 엄마가 만들어주는 한국 음식을 먹었다. 한국 음식 많이 못 먹어 봤을 텐데 이때 아니면 언제 먹겠니. 그게 엄마의 주장이었다. 재현은 왜인지 그게 창피했다. 엄마 걔가 한국 음식을 먹고 싶어 할지 안 먹고 싶어 할지 어떻게 알아. 부모님도 한국분이라면서. 그때 엄마가 뭐라고 했더라? 분명한 것은 그 말에 주연이 저 한국 음식 좋아해요, 라고 답한 것이다.
“고양이는 잘 지내?”
LA의 주연은 고양이를 키운다고 했다. 원래부터 도맡아 키웠던 것은 아니고 옆집에 살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맡게 된 고양이라고 했다. 하얗고 뚱뚱한 고양이 사진을 받고는 그 심술궂은 얼굴에 한참 웃었다. 그렇지만 무언가를 기르는 주연은 어쩐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무언가를 기르고 보살피고 관심을 준다는 건 지속성을 의미했다. 그건 뿌리내리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응. 맨날 잠만 자긴 하지만... 너무 귀여워. 볼래?”
주연은 뿌리를 내렸을까? 재현은 그러길 바랐다.
“귀엽네.”
“성격도 귀여워. 기품 있지만, 또 가끔은 바보 같거든.”
“기품?”
“기품이 아닌가? 우아하다는 건데.”
“뭐, 비슷해.”
한국어는 참 어려워. 메일 속 주연이 종종 썼던 말이다. 나도 어려워. 재현이 공감하면 주연은 말했다.
[나보다 어렵게 느껴지진 않을 거야.]
역시 맞는 말이었다. 주연에게 한국어는 머나먼 타국의 언어가 아니었던가. 그건 재현이 한국어를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럼에도 주연은 계속해서 한국어를 쓰고 배웠다. 왜냐면,
[이해하고 싶어서.]
무엇을 이해하고 싶은지 재현은 더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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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이 닳을 것처럼 들여보던 론리플래닛 코리아 가이드북은 결국 캐리어 한구석에 짐짝처럼 들어가고 말았다. 자퇴 이후 재현은 혼자 놀기라면 도가 터 심심함이나 외로움 같은 느낄 새가 없었는데 둘이 되니 오히려 할 게 없었다. 다행인 점은 그동안 폭염에도 틀지 못했던 에어컨이 미국에서 온 손님 덕에 제 기능을 다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재현은 21도로 설정한 실내 온도를 만족스럽게 만끽하며 소파에 늘어졌다.
또 하나의 다행인 점이라면 재현의 엄마가 일주일에 한 번꼴로 가져다주던 오디션 소식이 주연의 등장으로 뚝 끊겼다는 것이었다. 그 감독이 영화 한다던데, 걔가 이번에 광고한다는데, 한번 연락해볼까? 너 해볼래? 이런 말들을 하는 엄마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동안은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재현에겐 조금쯤 위안이 됐다.
론리플래닛을 대신해서 들여다보던 케이블 예능에 출연자들이 서울의 지하철을 타는 장면이 나오자 주연은 허리를 앞으로 숙여 집중했다. 며칠 전 탔던 2호선은 한 바퀴를 채 돌기도 전에, 주연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 순환하기도 전에 내려야 했다. 사람이 많은 곳을 참아내기엔 재현의 인내심이 2호선보다 짧았다. 창백해진 재현의 얼굴빛을 본 주연은 신림역쯤 와서 손을 잡아 이끌었다. 이전에 재현이 그랬던 것처럼.
그날 무턱대고 들어간 신림역의 한 카페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던 재현은 어딘가 크게 낭패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누구를 향해서인지 모르게 자꾸만 화가 났다. 정말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하지? 뜬금없이 2호선을 타자고 부탁한 이주연에게? 그 시간에 지하철을 탄 승객들에게? 푹푹 찌는 이 날씨에게? 아니면 도대체 누구에게?
못해도 한국인의 반은 알만한 유행어의 주인공으로 산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탐험가 모자를 쓴 어린이가 어설픈 정글 cg를 배경으로 춤을 추고 노래했던 장면, 그 귀엽던 대사를 모르는 또래는 없을 것이다. 재현은 공중파 어린이 티비 쇼가 최고 시청률을 올렸던 시기에 메인 출연자로 꽤 인기를 얻었다. 그때는 뭣도 모른 채 춤을 추라면 추고 노래를 부르라면 불렀다. 운이 좋았던 건지 진짜로 잘 소화를 했던 건지 한때는 광고 제의가 올만큼 유명해지기도 했다.
녹화가 있는 날마다 엄마가 사줬던 돈까스와 스파게티 세트가 물릴 때쯤 재현은 이미 훌쩍 자라버린 채였다. 마음 말고 몸이 그랬다. 마냥 아이 같던 얼굴에 제법 청소년 티가 나자 쇼는 재현을 잘랐고 배역은 재깍 다른 어린이로 교체되었다. 추는 춤도, 치는 대사도 같은데 배우만 바뀌었다. 그렇게 배우가 바뀐 뒤에도 재현에겐 쭉 그 춤과 대사가 따라다녔다.
길이든 학교든 늘 알아보는 시선이 있었다. 저만 보면 신나서 따라 하는 대사가 지겨웠다. 자연스럽게 사람이 모이는 곳을 피하게 됐다. 그 와중에 본 오디션은 늘 낙방이었다. 티비 쇼 속의 이미지가 강해서 떨어졌을 거라고 짐작만 했다. 이런 경험이 몇 년째 계속되자 재현은 어느새 도망치고 있었다. 문제는 어디에서 어디로 도망치고 있는지 재현도 몰랐다는 것이다.
며칠 전 일 때문인지 주연은 도통 먼저 어딜 가잔 얘길 꺼내지 않아서 오히려 재현이 눈치를 보는 입장이 됐다. 기절하기 직전 재현을 구해준 이 이방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짐작할 수 없는 표정으로 케이블 티비만 봤다. 그 애의 손이 아주 크다는 것, 피부가 까무잡잡하다는 것, 재현은 주연의 옆모습을 흘끔대면서 그런 사실들을 깨달았다.
그날 저녁, 버섯을 잔뜩 넣은 불고기를 내놓으며 재현의 엄마가 물었다.
오늘은 어딜 다녀왔어?
버섯을 골라내던 재현이 답하지 않자 대답은 주연의 몫으로 넘어갔다. 주연이 작게 말했다.
오늘은 안 나갔어요.
너희 어제도 집에 있지 않았어?
엄마가 금방이라도 재현의 등짝을 내려칠 것처럼 되물었다. 너는 집에만 있으면서 애 하나 안 챙기고, 이런 잔소리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2호선이 토하듯 쏟아내는 많은 사람들, 저마다의 짜증 섞인 표정과 진짜로 있었는지 없었는지 구분하기 어려운 시선들, 웃음들, 그 모든 것들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다고 재현은 말할 수 없었다. 그랬다간 엄마야말로 기절할지도 몰랐으니까.
제가, 제가 너무 더워서.. 형한테 집에 있자고 부탁했어요.
그때 주연이 말했다. 엄마의 표정이 순식간에 풀어져 사실이냐는 듯 재현을 채근했다.
그랬어?
네.
이번에도 역시 대답은 주연 쪽에서 나왔다. 재현은 어깨만 으쓱했다. 주연은 버섯 불고기를 역시나 말끔하게 싹 비웠다. 엄마가 감탄하며 말했다. 주연이는 정말 가리지 않고 잘 먹네, 얘는 편식이 심해서 걱정인데. 주연은 여전히 예의 바른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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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밥을 먹던 주연이 다음 행선지를 말했다. 어디든 말만 하라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말만 할 줄은 몰랐는데. 너무 뻔하지 않아? 박물관이라니? 장난 섞인 타박에 주연은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갈 거야. 애초에 가지 말자고 할 생각도 없긴 했다. 그해 여름에도 발걸음 못한 이 뻔한 장소에 이제야 오게 되었다.
박물관 가이드에는 자신 없다고 미리 선수를 치긴 했으나 주연도 그런 역할을 재현에게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각국의 언어로 번역된 팜플렛 앞에서 짧게 고민하던 주연은 영어 버전과 한국어 버전을 나란히 집어 들었다. 주연의 허리만큼 오는 어린이들이 로비를 우왕좌왕 뛰어다녔다.
다양한 전시관 사이에서 주연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두 개의 불상 앞이었다. 전시 해설이 나오는 이어폰을 낀 채 꽤 빠른 걸음으로 걷는 뒷모습을 재현은 천천히 쫓았다. 궁금했다. 지금 주연의 귀에 흘러나오는 해설은 어느 나라의 언어일까.
어두운 전시관 안은 박물관 관람객들이 다 여기 모였나 싶을 만큼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해 여름 2호선 열차는 이보다 많은 이들을 이보다 훨씬 좁은 공간 안에 싣고 갔다. 자연스럽게 딱 붙어선 커플 중 한 명이 재현을 알아보는 눈치였다. 그들의 귓속말 속에 재현의 이름이 있는 것 같았다. 웃음기가 섞인 것 같기도 했고 아예 말을 한번 걸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아닐 가능성도 있었다. 그들이 나누는 귓속말은 단지 뻔한 사랑의 속삭임일지도 몰랐다. 재현이 거기에 있다는 걸 아예 신경 쓰지 않는 쪽에 가까운지도. 어쨌든 재현은 그것을 구분해낼 여유가 없었고 에어컨 바람에 차갑게 식은 몸에서 다시금 땀이 줄줄 흐르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때 주연이 재현의 손을 잡아끈 것이다. 지하철에서 튕겨 나오듯 내리자 겨우 숨이 트였다. 거칠게 숨을 내쉬는 재현을 주연은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전시관의 희미한 조명과 많은 관람객 사이로 주연의 등이 사라졌다가 다시 보이길 반복했다. 다행히도 남들보다 키가 한 뼘은 큰 덕분에 이어폰 낀 뒤통수만큼은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어린이들이 뛰어다니던 로비와 달리 전시관 안은 조용했다. 그래서 선뜻 불러 세우지도 못했다.
큰 보폭으로 걷던 주연이 멈춰 섰다. 몇 걸음 뒤를 따르던 재현도 멈췄다. 그제야 전시관의 유일한 유물인 두 불상이 눈에 들어왔다. 재현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 옛날 어느 곳에서 이 불상의 사진을 본 것을 기억해냈다. 한 다리를 나머지 한쪽 다리에 얹은, 반만 가부좌를 튼 생소한 자세. 14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비슷한 두 불상 사이에 주연이 섰다. 그들은 바다 건너 9500km를 날아온 검은 머리 이방인을 내려다본다. 문득 웃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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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여지책으로 만들어낸 핑계 치곤 날씨가 정말 더웠다. 너무 더워서 못 돌아다니겠다는 말도 이쯤 되면 거짓말이 아니었다. 우산을 뚫을 것처럼 쏟아지는 장대비도 잊을만하면 한국의 여름이 만만하지 않다는 걸 상기시켰다. 며칠은 엄마를 따라 교회 사람들을 만나면서 관광객의 본분을 다하는 듯하던 주연은 곧 더위를 먹은 것처럼 정신을 못 차렸다. 주연이 묵는 방을 오가며 간호하던 엄마는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재현에게 일일 임무를 내렸다. 오늘은 아침부터 나가서 늦게 들어오는 날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점심과 저녁을 차려줄 것. 약을 챙길 것. 두 시간에 한 번은 방 안을 들여다볼 것.
하지만 다른 중병도 아니고 더위 먹어 병이 난 사람에게 크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몇 번 방 안에 들어가 죽은 듯 잠만 자는 얼굴 위에 손을 휘적이다 시간 맞춰 식사를 준비하기만 했다. 주연은 다행히 밥은 남기지 않고 먹었다. 엄마가 해둔 반찬에 밥만 떠서 차린 밥상이긴 했으나 조금은 뿌듯했다.
내가 설거지 할 테니까 넌 앉아 있어. 먹고 바로 누우면 속 아프다.
재현의 말에도 주연은 자신이 먹은 그릇과 수저를 개수대에 부지런히 갖다 놓으며 어딘가 불편한 사람처럼 부엌을 맴돌았다. 소파에 좀 앉아있으라고 반쯤 짜증을 섞어 말하자 결국 못 이긴 듯 소파에 엉거주춤 앉는다. 설거지를 마친 뒤 방으로 들어 가 게임이나 할까 하다가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어 주연의 옆자리에 앉았다. 삼복 더위 중 제일이라는 중복의 태양은 암막 커튼을 뚫고서도 들어왔다. 재현은 에어컨 온도를 조금 더 낮췄다.
이젠 좀 덜 어지러워?
응, 이젠 전혀 안 어지러워.
주연의 말투는, 뭐랄까. 가끔은 좀 낯설게 들리긴 했다. 미국에서 평생을 자란 것치곤 놀라울 만큼 한국어를 잘 구사하긴 했지만. 한인 부부라더니 집에선 한국어 쓰나? 학교에선 영어로만 말하겠지? 주연이 한국에 머문 지도 벌써 2주가 넘어가고 있었고 재현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것들이 궁금했으나 왠지 실례가 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결국 하는 말이라곤 밥 먹어, 티비 봐, 이런 것들 뿐이었다.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주연이 한국에 와서 가장 많이 한 일이 티비 보기일 것 같긴 했다. 주연은 한국에 존재하는 모든 케이블 채널을 섭렵할 기세로 시청하는 것도 모자라 질리도록 나오는 광고조차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드라마처럼 들여다봤다. 하지만 재현은 벌써 스무 번은 본 대출 광고에 진저리치며 먼저 리모콘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너 보던 거 있어? 다른 거 봐도 돼?
응. 다른 거 봐도 돼.
무엇이든 이 반복되는 광고들 보단 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대충 아무 영화 채널을 틀었다. 이전에 본 것 같기도 한 영화였다. 최근 몇 년은 집에 처박혀 티비와 컴퓨터만 들여다봤으니 이미 봤던 영화라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영화의 주인공은 천문학자 같았다. 솔직히 그렇게 집중해서 볼만한 재미는 없었다. 재현은 차라리 주연의 가지런한 발이 가끔 꼼지락대는 모양새가 더 볼만하다고 생각했다.
아레시보 망원경이네.
재현과 달리 집중해서 영화를 보던 주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꽤나 반갑다는 말투로. 주연이 가리킨 화면 속엔 옥상 안테나를 천배 정도 확대한 것 같은 모양의 거대한 구조물이 있었다.
저게 망원경이야?
응.
우주 보려고 만든 건가? 저렇게 크면 눈은 어디에 대?
그런 망원경이 아니라...
쏟아지는 질문에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듯 생각하던 주연이 답답하다는 듯 몇 번 벙긋대다 곧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화면 속 거대한 망원경은 사라져 있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도 잘 알지 못해서.
어렴풋이 아는 무언가를 설명하기엔 주연의 한국어가 부족했고 마음껏 편한 언어를 선택하자니 재현의 영어가 턱없이 짧았다. 그래. 그냥 계속 보자. 그때 주연이 다시 말을 꺼냈다.
보려고 만든 게 아니라 찾으려고 만든 거야.
뭐를?
외계인 같은 것을.
그 말을 들으니 영화의 내용도 배경도 대강 이해가 갔다. ET 같은 외계인을 찾겠다는 거지. 주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외계인을 그렇게 찾고 싶을까? 재현이 기우뚱 했다.
외계인은 없을 것 같지 않냐?
난 있을 것 같은데.
있어도 만나긴 어렵겠지.
그래도 찾고 싶나 봐.
뭘?
무엇이 됐든. 계속해서.
무엇을 얼마나 간절히 찾고 싶길래. 그날 밤 재현은 잠들지 않고 떠올렸다. 외계 생명을 만난 영화의 결말 말고, 무엇이 됐든 찾고 싶어 분투하던 주인공의 모습을. 재현으로선 도무지 짐작하기 어려운 마음이었다. 그때 처음 생각했다. 어쩌면 주연 역시 무엇이든 찾고 싶어 이곳에 왔는지도 모르겠다고.
며칠 뒤 주연은 재현의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해 왔다. 친모와 만나고 싶다는 말에 재현의 엄마는 한껏 난처해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희 부모님 얼굴을 어떻게 보니. 미국에 계신 부모님과 상의 된 일이 아니라면 도와줄 수 없다는 말이었다. 재현은 그때도 지금도 엄마의 결정이 맞다고 생각한다. 친모를 찾겠다는 결심 하나로 뾰족한 수도 없이 한국 땅에 온 청소년에게 혈연도 아닌 생판 남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부탁을 하면서도 입안이 자꾸 마르는지 계속해서 침을 삼키던 초조한 얼굴이나 거절을 듣고는 푹 숙이던 고개 같은 것은 도통 잊히지 않았다. 주연의 시간은 이제 그로부터 한참 흘렀을 텐데도 재현에게 주연은 늘 그 어린 모습이었다. 재현은 주연의 캐리어 구석에 있었던 론리플래닛 코리아를 생각했다. 열여덟의 이주연에겐 이 지구가 도대체 얼마만큼 외로운 행성이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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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만 했는데 두 시간이 다 갔네. 재현이 말했다. 박물관 내부의 카페에 앉아 커피 두 잔을 시켰다. 관람객이 줄어든 시간이었다. 주연은 오후의 햇살을 받은 창밖을 바라봤다. 이렇게 보니 전혀 추운 것 같지 않아. 주연의 말에 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싶은 건 다 봤어?”
“그런 것 같아.”
재현을 두고 전시 해설 이어폰을 낀 것이 신경 쓰였는지 주연은 몇 번 이어폰을 빼고 말을 걸어 왔다. 항아리들, 조각품들, 언젠가 교과서에서 본 것 같은 한 익숙한 유물들에 재현은 사실 큰 흥미가 없었다. 천천히 걸으며 소장품 하나하나를 유심히 보는 주연의 뒤를 따라 걸었다. 재현은 줄곧 미국에서 주연의 삶을 상상했다. 그가 메일로 전해준 이야기를 통해서. 고등학교 시절 럭비를 하다가 그만둔 이주연. 완전히 진로를 틀어 일본어를 전공한 이주연. 날이 좋으면 한 시간 거리의 해변에 가 서핑하는 이주연. 프롬 파티 대신 친구들과 트래킹 여행을 떠난 이주연. 땡스기빙 식사에서 칠면조 소스를 다 쏟고 웃는 이주연. 주연의 삶이 괜찮아 보일수록 재현은 스스로의 별 볼 일 없음에 매 순간 새삼스럽게 놀라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안녕 주연아. 난 오늘 라면을 먹었어.]으로 시작하는 메일을 쓰던 재현은 충동적으로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했다. 몇 년째 계획 없이 집에만 머물렀으므로 짜내고 짜내도 더 이상 쓸 말이 없었다.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난 뒤엔 오디션도 몇 번 봤다. 처음 일 년은 낙방의 연속이었으나 그 뒤론 종종 합격 소식이 들리기도 했다. 큰 배역은 아니어도 꾸준히 맡았다. 그러다 작고 작은 한 영화제에서 자신이 출연한 작품이 상을 받았을 때, 재현은 처음으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출연한 지 십 년이 지난 티비 쇼의 레파토리가 아직까지 자신을 쫓아다녀도, 어딜 가든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어도, 오디션 관계자들이 작품과는 조금도 상관없는 그 대사를 한 번 해달라고 졸라도, 그래서 면전에 대고 귀가 터져라 웃어도 괜찮다고. 미지근한 농담이 되는 삶도 나쁘진 않다. 어쩌면 평생 농담만 되진 않을지도 몰랐다. 재현이 그런 것을 깨달았을 땐 더 이상 사람 많은 곳이 두렵지 않았다.
어느 메일에서 재현은 어린 자신을 유명하게 만든 그 장면들을 잘라 올린 유튜브 주소를 주연에게 보냈다. 탐험가 모자를 쓴 쥐콩만한 자신이 어색한 솜씨로 춤을 췄다. 허 참, 이땐 그래도 유연했네. 재현은 그런 것을 생각했다. 주연은 간단한 감상평을 내놓았다. [우와ㅎ 형 진짜 귀여웠구나]
“얼마 못 머물러서 아쉽네.”
손 반만 한 에스프레소 잔을 깨끗이 비운 주연이 말했다. 그 모습을 보던 재현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한국엔 왜 오게 된 거야?”
재현의 말에 주연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는 답했다.
“메일에서 말했잖아. 아레시보 망원경이 무너졌더라고.”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답하기에 재현은 순간 주연의 집이 LA가 아니고 푸에트리코의 아레시보 망원경 인근이었던 건지 고민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 뜬금없는 한국행의 진짜 이유가 될 리 없는데.
“그니까, 그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야? 나도 검색을 해보긴 했는데......”
“형 기억 안 나는구나.”
하하하. 끝이 먹혀 들어가는 소리로 주연이 웃었다. 재현만 계속해서 영문을 몰랐다. 아, 실망이야. 주연이 말했다.
“우리 그때 그 영화 같이 봤잖아.”
“무슨 영화?”
“콘택트.”
“우리가 그런 영화를 봤다고?”
“기억 안 나? 두 번이나 봤는데.”
“영화 봤던 건 생각난다.”
“거기에 나와. 아레시보 망원경이. 난 형이 그걸 기억할 줄 알았는데.”
주연은 못내 서운한 척을 했다. 그해 여름 수많은 케이블 영화를 함께 봤던 것은 기억난다. 날씨는 더웠고 재현은 밖이 싫었으며 주연은 한국행의 목적을 잃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시간을 죽이며 티비 앞에 앉아 있는 것뿐이었다. 화소가 아주 낮은 영상처럼 그때 그 영화들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재현이 보다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런 장면이 아니었다.
눈 떼기 힘들었던 옆얼굴과, 나란하던 팔과, 스칠 뻔했던 손가락 같은 것. 거기에서부터 미미하게 발생한 열기 같은 것. 재현이 기억하는 그들의 장면은 그랬다.
“그게 무너지는 걸 보자마자 형이 떠올랐어.”
그리고 주연은 재현이 결코 들을 줄 몰랐던 답을 내놓았다.
“한국에 형을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한국에 나를 보러 왔다고.
그날 박물관에서 주연은 말했다. 자신은 이제 더 이상 낳아준 엄마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이젠 궁금하지도 않고, 찾고 싶지도 않다고. 이상한가? 주연의 물음에 재현은 고개를 저었다. 뭐가 이상하냐. 주연은 조용히 덧붙였다. 그래도 그녀가 괜찮았으면 좋겠어. 정말로. 괜찮았으면 좋겠어.
집에 돌아가던 길 재현은 자신이 언제 마지막으로 울었는지 어림해봤다. 연기할 때를 제외 하고 못 해도 십 년은 넘은 것 같았다. 갑자기 그런 것을 되새긴 이유는 주연이 말했던 영화 때문이었다. 두 번이나 봤는데 상기하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재현은 그 영화를 보던 주연이 울던 모습을 영화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건 외계인 이야기를 나눈 첫 번째 관람이 아닌, 그로부터 며칠 뒤 어느 새벽이었다. 불 꺼진 거실에서 영화를 보던 주연은 숨도 못 죽이고 울었었다. 그날은 주연이 친모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거절당한 날이었다.
야, 그때 그 영화 또 해 준다. 열아홉의 재현은 주연의 방문 앞을 서성인다. 푹 숙인 고개를 본 뒤로 줄곧 신경이 쓰였다. 주연이 자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똑 똑똑 똑똑. 일부러 장난스럽게 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잠시 후 나온 주연은 꽤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팝콘을 렌지에 돌렸다. 티비의 불빛이 주연의 얼굴을 파랗게 비췄다 꺼지길 반복했다. 그렇게 주연의 옆얼굴을 흘끔대던 재현은 그가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재현이 할 수 있었던, 혹은 해야만 했던 최선의 행동은 무엇이었을까? 어떻게든 위로해주기? 안아주기? 무엇이든 재현은 하지 못했다. 열여덟의 이주연은 계속해서 울었고 지금보다도 어리고 요령 없던 재현은 그저 옆자리에 앉아 있는 일밖에는 할 수 없었다. 영화가 다 끝날 때까지도. 재현은 불쑥 바랐다. 스물여섯의 이주연은 그렇게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반만 가부좌를 튼 두 불상의 미소가 닿지 못할 바다 너머, 이곳으로부터 9500km 멀리 떨어진 행성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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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주연은 미국에 돌아갔다. 촬영이 있어 공항까진 배웅하지 못했다. 머문 호텔 아래 카페에서 나눈 대화는 짧았다. 새로 들어간 영화의 줄거리를 들은 주연은 크게 즐거워했다. 주연이 미국까지 실어 갈 이야기가 그런 것이라면 재현도 좋았다.
형이 어떻게 화성인이 돼?
분장과 cg의 세계를 무시하지 마라.
넷플릭스라는 거 좋네. 형이 외계인 분장한 모습도 볼 수 있고.
우습게도 재현이 새로 맡은 배역은 외계인이었다. 주인공이 잘못 받은 편지의 수신자를 찾기 위해 방문한 화성의 거주민이라나. 이 해괴한 이야기의 장르는 뮤지컬이었다. 춤과 노래는 그 옛날 어린이 티비 쇼 시절 이후로 처음이다. 끔찍한 모양새가 될 것만 같은 예감 혹은 분명한 확신이 들었지만 이왕 웃음거리가 될 거라면 제대로 웃겨보자는 욕심도 생겼다. 웃음거리조차 되지 못한다면 최소한 출연료가, 미국행 비행기 값 정도가 남을 테니 괜찮을 것이다.
‘그때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었어.’ 그날 헤어지기 전 주연은 말했다. 재현 역시 줄곧 그랬다고 말하고 싶었다. 인파 속에서 자신을 끌어낸 손에게, 긴 긴 밤 주고 받은 메일에게, 이곳과는 다른 하늘 아래서 반짝이던 모습에게. 다만 몹시도 부끄러우니 미뤄두어야겠다고 재현은 생각했다. LA의 거짓말 같은 햇살 아래서라면 그런 말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다음날 재현은 우스꽝스러운 화성인 분장을 한 자신의 사진을 주연에게 전송했다. 아이메시지는 분명, 이메일보다 답장이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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